더운밥[한성우 교수의 맛의 말, 말의 맛]

  • 문화일보
  • 입력 2024-01-05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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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은 따뜻하게 먹어야 하는데 같은 온도의 밥이라도 ‘더운밥’과 ‘데운 밥’의 띄어쓰기가 다르다. ‘더운밥’도 띄어 써야 할 것 같지만 갓 지은 따뜻한 밥을 가리키는 말로 자주 쓰이다 보니 한 단어처럼 굳어진 것이다. 같은 이유로 지은 지 오래되어 식은 밥을 뜻하는 ‘찬밥’도 붙여 쓴다. ‘찬밥’은 업신여김을 당하거나 푸대접을 받는 것을 비유적으로 가리키기도 하니 밥의 온도는 무척이나 중요함을 알 수 있다.

더운밥은 단순히 밥의 온도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갓 지어낸 밥을 뜻한다. 뜸을 잘 들이고 난 뒤에 가마솥의 뚜껑을 열면 구름처럼 피어오르는 김 뒤로 가지런히 자리 잡은 밥을 가리킨다. 뽀얀 빛의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탱글탱글한 밥알의 모습이 그대로 살아 있는 밥이다. 아궁이에 불을 지펴 가마솥으로 밥을 지어야 하는 불편함을 감수하더라도 더운밥을 먹이려 애쓰던 이들의 노고가 이해되는 것도 더운밥이 가진 온도 이상의 의미 때문이다.

데운 밥은 요즘에는 꽤나 드물어졌다. 전기밥솥이 널리 쓰이면서 밥이 완성되자마자 보온이 시작되니 찬밥이 생길 일이 없어졌다. 밥을 짓기가 어렵거나 귀찮은 이들은 즉석 밥을 사다가 뜨거운 물이나 전자레인지에 덥혀 먹지만 이건 데운 밥과는 성질이 다르다. 오히려 밥솥에서 보온이 잘 되고 있더라도 갓 지은 밥이 아니니 이 밥이 ‘따뜻한 찬밥’ 대접을 받기도 한다.

겨울철 학교의 석탄 난로에 도시락을 얹어 데웠던 기억이 있는 이들, 늦게 귀가한 가족을 위해 몇 번을 덥히다 보니 졸아들어 맛이 짜진 찌개를 먹어본 이들은 더운밥의 소중함을 안다. 그런데 정작 더운밥을 매일 먹을 수 있는 이들은 더운밥의 가치와 의미를 잘 모른다. 찬밥 신세가 되어 찬밥을 먹을 때가 되어야 그 의미를 알게 된다. 더운밥을 먹을 수 있는 삶을 지키려 노력해야 하는 이유, 더운밥을 먹지 못하는 이들을 돌아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하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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