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시다[한성우 교수의 맛의 말, 말의 맛]

  • 문화일보
  • 입력 2024-02-16 11:38
프린트

photo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어린 손주가 할머니께 ‘할머니, 빨리 자셔요’라고 했다면 손주는 말을 잘한 것일까? 김삿갓이 가게에 가서 ‘이게 무엇이오?’라고 물었더니 ‘잣이오’란 대답을 듣고 값도 안 치르고 냉큼 먹었다는 것이 이해가 되는가? 손주가 잠자리에서 한 말이라면 ‘주무세요’라고 해야 할 말을 잘못 한 것이겠지만, 밥상머리에서 했다면 대단한 어휘력이다. 김삿갓의 일화 속 ‘잣이오’의 발음이 ‘자시오’이니 이 단어를 아는 이라면 이 일화도 금세 이해가 될 것이다.

음식을 섭취하는 행위는 ‘먹다’로 대표되지만 높임법이 발달한 우리말에서는 매우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다. ‘잡수시다’나 ‘잡숫다’는 가장 높여야 할 대상에게 쓸 수 있다. ‘자시다’ 역시 이와 같은 등급인데 더 예스러운 표현이어서 손주가 이 말을 썼다면 애늙은이 취급을 받을 것이다. ‘들다’ 또한 음식을 목적어로 삼으면 높임의 뜻이 더해진다. 이렇게 높임의 용도로 대체할 단어가 있다 보니 ‘먹다’를 높이기 위해 ‘먹으시다’를 쓰지는 않는다.

임금과 같이 특별히 더 높여야 할 대상에게는 ‘젓수시다’를 쓰기도 했다. 임금의 밥상은 따로 ‘수라’라고 불렀으니 먹는 행위 자체에 이런 표현을 쓰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이 말을 쓰지 않는다. 반대로 먹는 것을 비하할 때는 ‘처먹다’를 쓸 수는 있지만 사람에게 써선 안 될 말이다.

높임의 등급이 복잡한 것도 모자라 이렇게 다양한 어휘로 높임을 표현해야 하는 것이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으로 상대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전할 수 있는 장점도 있다. 그런데 ‘자실’ 주체는 늘어나는데 ‘먹을’ 주체는 줄어드는 현실은 걱정스럽기 그지없다. 어르신들이 자실 것을 젊은이들이 오롯이 감당해야 하는 것도 문제다. 자실 분보다 ‘자셔요’라고 말할 사람이 더 많도록 유지하려는 노력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다.

인하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주요뉴스
기사댓글
AD
count
AD
AD
AD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