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도덕 쟁탈전’[뉴스와 시각]

  • 문화일보
  • 입력 2024-05-10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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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채 사회부 차장

대한민국은 자본주의 국가지만, 여전히 조선 시대를 지배했던 성리학의 영향이 남아 있는 나라다.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계속해서 선진국적 시스템을 갖춰 갔지만, 구성원들의 인식 속에는 성리학의 본령인 도덕과 명분론이 적지 않은 비중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8년 동안 한국에서 한국철학을 공부한 오구라 기조(小倉紀藏) 일본 교토(京都)대 교수는 한국 사회를 ‘화려한 도덕 쟁탈전을 벌이는 거대한 극장’으로 규정했다. 그는 “운동선수나 연예인도 경기 성적이나 노래 실력만으로 평가받지 못하고, 자신이 얼마나 도덕적인가를 납득시킨 후 비로소 스타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인 손흥민이 아시안컵 축구 대회에서 “나라를 위해서 뛰는 몸인데 힘들다는 건 핑계”라고 말한 것이 오구라 교수가 지적했던 단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지나친 도덕·명분론은 한국 사회의 발전에 발목을 잡기도 했지만, 순기능을 한 부분도 있었다. 문·이과에서 최고의 인재로 불렸던 법대·의대 출신자들에게도 돈보다 공익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강박을 심어줬다. 이를 통해 한국의 판·검사, 의사 양성 체계가 구축됐다. 공무원으로 민간 기업 종사자보다 박봉을 받는 판·검사들은 밤을 새워서라도 사건을 처리해야 했고, 지방 순환 근무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의사들도 최저임금 수준 급여와 장시간 노동을 감수하면서 수련의 시절을 견뎌야 했다. 능력이 있어도 도덕적 우위를 확보하지 못하면, 지위와 부(富)를 누릴 자격을 끊임없이 의심받았기 때문이다. 이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힘없는 사람들의 사건이 조기에 해결되기도 하고, 최상급 종합병원에도 서민들의 접근권이 주어졌다.

선진국 문턱에 오면서 과거의 시스템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이미 발전한 한국에서 태어난 세대들은 불합리함을 수용할 생각이 없다. 재판과 수사가 지연되고 있지만, 일선 판·검사들 사이에서는 사건 쟁점이 늘고 변호사들이 많은 것을 따지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반응이 주류다. 판·검사를 대폭 늘려서 일을 합리적으로 배분할 수 있는 대책을 세워야 하고, 더 이상 희생을 강요하지 말라는 식이다. 의대 증원에 반발해 현장을 이탈한 전공의들은 대놓고 병역 기간 단축을 얘기한다. 정부의 의대 증원이 ‘울고 싶은데 뺨 때려준 격’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쌓여 왔던 불만이 폭발한 것이고, 의대 증원으로만 국한해서 이 사안에 접근한다면 문제가 계속 풀리지 않을 수 있다.

수백 년 동안 한반도를 지배했던 도덕 쟁탈전의 양상이 달라지고 있는 조짐이 보인다. 스포츠계에서도 손흥민보다 아홉 살 어린 이강인은 국가대표의 의미를 다르게 이해하고 있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수십 년, 수백 년이 더 지나면 이방인의 눈에도 한국은 더 이상 도덕 쟁탈전 국가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환경이 바뀜에 따라 구성원들의 집단적 의식 변화가 수반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를 꼭 옳고 그름의 문제로 볼 것은 아니다. “요즘 것들은 이해 못 하겠다”는 식의 ‘꼰대’ 반응은 절대 금물이다. 의식의 변화에 따라 불가피한 시스템 수정을 항상 준비하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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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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