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분 사회, 헌법 정신에 길을 묻다>巨與만 되면 ‘다수결 만능주의’… ‘民意 대변’ 역할 팽개쳐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지난해 12월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회의장 앞에서 국민의힘 의원들이 더불어민주당의 쟁점 법안 처리 시도를 규탄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뉴시스

■ ⑧ 다수결만 남은 국회, 사라진 정치

183석 거대 여권 21代 국회
처리법안 80%가 여당 발의
30건은 200명 이하만 참석
‘부동산 3법’ 1주만에 처리 등
토론 제대로 않는 법안 속출

패스트트랙·필리버스터 제도
시간 때우기 등으로 변질되며
與는 ‘소수 존중’원칙 짓밟고
野는 막무가내식 일정 거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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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대 국회의원들이 당선 후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인 2020년 6월 5일 국회 본회의장. 새로 출범한 21대 국회를 이끌 국회의장단을 선출한 이날의 회의장 풍경은 전혀 새롭지 않았다. 주호영 미래통합당(현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여야 간 의사일정 합의가 없었기 때문에 본회의를 열 수 없다”며 “오늘 이 본회의는 적법하지 않다”고 외쳤다. 그러자 김영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국회의원 재적 4분의 1(120명) 이상의 요구로 본회의를 열도록 한 헌법 제47조를 거론하며 “오늘 본회의는 4분의 1을 훌쩍 뛰어넘는 188명의 의원이 소집을 요구했으니, 본회의를 여는 것은 헌법을 지키는 일”이라고 말했다. 수십 명의 미래통합당 의원이 항의하며 퇴장했고, 끝내 재적 의원 300명 가운데 193명만 투표에 참여해 191명의 찬성으로 박병석 의원이 국회의장에 뽑혔다.

이날 국회의 모습은 ‘독주’와 ‘의사일정 거부’ ‘충돌’로 얼룩진 21대 국회의 예고편이었다. 민주당(163명)과 더불어시민당(17명), 열린민주당(3명) 등 당선인 183명의 거대 여권이 주도하는 이번 국회가 어떻게 흘러갈지 압축적으로 보여줬다. ‘소수의견과 함께하는 다수결’이라는 이상은 흔적도 찾기 어려워졌다.

거여(巨與)의 ‘다수결 만능주의’와 소야(小野)의 ‘보이콧 만능주의’가 맞서면서 국회는 대화와 타협의 장이 아닌 무한충돌의 공간으로 전락했다.

◇21대 국회 처리 법안 80%는 민주당 발의 = 거대 여당의 독주는 입법 통계로 확인된다. 3일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21대 국회 출범 1년이 지난 현재까지 본회의에서 가결된 법안 403건 가운데 80.4%인 324건이 민주당 의원이 대표 발의한 법안으로 집계됐다. 제1야당인 국민의힘 소속 의원이 발의한 법안 중 본회의 문턱을 넘은 것은 73건(18.1%)에 불과했다.

정도는 덜했지만, 이 같은 불균형과 입법 독주는 과거의 여대야소 국회에서도 나타났다. 지금과 정반대로 보수 정당이 압도적 우위를 차지했던 18대 국회 당시, 본회의 가결 법안의 대표발의 비율은 한나라당이 65.2%, 통합민주당이 23.3%였다.

◇‘독주’와 ‘보이콧’만 남은 국회 = 법안 처리 과정은 더 심각하다. 지난해 8월 통과된 이른바 ‘부동산 3법(소득세법·법인세법·종합부동산세법 개정안)’은 상임위원회 상정부터 본회의 의결까지 1주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여야의 기 싸움만 있었을 뿐 법안 내용에 대한 충분한 토론과 숙의는 거치지 않았다. 그러나 1년도 지나지 않은 지금, 법안 처리를 밀어붙였던 민주당 내부에서조차 종부세 과세 기준을 상향하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 종부세 최고세율이 6%로 올라간 데다 전국적인 집값 상승으로 종부세 적용 대상자가 급증하면서 국민 반발이 확산되자, 대통령선거에 미칠 악영향을 의식한 여당이 급하게 방향을 선회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21대 국회 본회의 가결 법안 403건 가운데 30건은 재적 의원 3분의 2인 200명에도 못 미치는 의원만 참여한 채 표결됐다. 190석에 달하는 의석을 확보하고 있는 거대 여권이 밀어붙이자 국민의힘이 표결 불참으로 대응한 결과다. 부동산 3법을 비롯해 국가정보원의 대공수사권을 경찰로 이관하는 내용의 국정원법 개정안, 대북전단 살포를 금지하는 내용의 남북관계발전법 개정안 등이 이에 해당한다. 본회의뿐 아니라 상임위원회 차원에서도 국민의힘 의원들의 집단 퇴장 속에 법안이 처리되는 일이 반복해서 일어나고 있다.

여야가 타협 없이 충돌하다 보니,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과 필리버스터 등 숙의민주주의를 위한 제도들도 갈수록 왜곡되고 있다. 패스트트랙은 법안 처리가 무한정 지연되는 것을 막는 동시에 여야가 압축적으로 토론에 나서도록 강제하는 제도다. 그러나 실제로는 제대로 된 토론도 없이 공방만 벌이다 패스트트랙 기간이 종료되면 표결을 밀어붙이는 ‘꼼수’가 빈발한다. 시간제한 없는 발언으로 의사 진행을 막는 필리버스터 역시 무한토론이 아닌 ‘시간 때우기’로 변질되곤 한다. 지난해 대북전단 살포를 금지하는 내용의 남북관계발전법 개정안 처리 당시 탈북자 출신 태영호 국민의힘 의원이 필리버스터에 나서 북한의 실상에 대해 사실상 강의를 하다 김상희 국회부의장의 제지를 받기도 했다.

◇“대의는 없고 권력 쟁투만 남아” = 민의(民意)가 하나일 수 없는 만큼, ‘민의의 전당’인 국회에서 갈등이 빚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무엇을 위한 싸움이냐가 중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은 “이념의 분화를 전제로 하는 정당 정치에서 이념이 다른 정당들끼리 경쟁하는 게 자연스럽다”며 “하지만 우리 정치권은 정책을 둘러싼 이념적 대결이 아닌 권력 다툼만 벌이고 있다”고 비판했다.

박근혜 정부 시절이던 19대 국회 말기(2016년 2월) 극심한 갈등 속에 본회의를 통과한 테러방지법은 여야 충돌이 명분 없는 권력 쟁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당시 민주당 의원들은 필리버스터를 통해 법안 처리에 강력히 저항했고, 이 법을 폐기하는 법안을 20대 국회 1호 법안으로 추진하겠다고 약속하기도 했다.

그러나 민주당은 압도적 국회 의석을 확보한 21대 국회 들어서도 테러방지법의 ‘문제 조항’을 개정하려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고 있다.

주로 ‘대통령 관심 법안’과 ‘대통령 공약 법안’이 싸움 대상이 된다는 점도 여야 충돌의 성격을 보여준다. 21대 국회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1호 공약인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설치 과정에서 여야가 격하게 충돌한 것과 마찬가지로 박근혜 정부에선 테러방지법을, 이명박 정부에선 4대강(한강·금강·낙동강·영산강) 사업을, 노무현 정부에선 행정중심복합도시(세종시) 설치를 둘러싸고 여야가 첨예하게 대립했다. 이들 ‘대통령 관심 법안’ 처리 때마다 국회는 회의장 점거와 직권상정, 심지어 여야 의원들의 욕설과 몸싸움 등으로 얼룩졌다.

◇“소수의견 보호가 다수결에 정당성 부여” = 전문가들은 “민주주의가 다수결 원칙을 따르는 게 맞지만, 다수결 원칙이 곧 민주주의의 필요충분조건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소수의견을 보호하고 존중하는 것이야말로 다수결 원칙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핵심 근거인데, 우리 정당들은 다수당이 되면 ‘다수결 만능주의’에 빠진다는 지적이 나온다. 고문현 숭실대 법학과 교수는 “현재의 국회는 소수 의견 존중을 전제로 하는 다수결 원칙이 무너졌다”면서 “이는 국회가 (소수 의견도 존중돼야 한다는) 국민의 기본권을 대변하는 역할을 포기한 것”이라고 말했다. 소수 의견을 무시하는 게 국민의 기본권 침해에 해당한다는 얘기다. 강원택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도 “소수를 존중할 때 다수결이 의미 있어지는 것”이라며 “소수를 존중한다는 것은 국회를 장악하고 있는 세력이 법 통과 시 생길 수 있는 여러 문제점을 다양한 형태의 논의를 통해 검토한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수적 열세에 처한 야당들이 여당과 대화를 통해 타협을 모색하는 대신 막무가내로 의사일정을 거부하는 것도 의회민주주의에 어긋난다는 비판이 나온다. ‘보이콧 만능주의’도 문제라는 얘기다. 21대 국회에서 걸핏하면 ‘국회 보이콧’을 외치는 국민의힘 의원들은 “힘이 없어 어쩔 수 없다” “표결 불참도 의사 표시다”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토론과 표결에 불참하는 것은 국민의 의사를 대변해야 할 국회의원의 권리와 의무를 저버리는 무책임한 행위”라며 “무력하다고 해서 무책임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라고 비판한다.

거대 여당의 ‘독주’와 소수 야당의 ‘보이콧’이 충돌하는 악순환을 막기 위해 우리 정당의 ‘패거리 문화’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국회법상 국회의원은 양심에 따라 표결하도록 규정돼 있지만, 현실에서는 철저히 당론에 구속받는다. 당 지도부와 열성 당원들에게 밉보였다간 다음 공천을 보장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다 보니 ‘상임위원회 중심 국회 운영’이라는 목표는 허울뿐이고 국회의원들은 싸움판의 병졸 신세를 면치 못한다. 채진원 경희대 공공거버넌스연구소 교수는 “국회의원 한 명 한 명이 헌법기관이고 자기 소신에 따른 투표는 당연한데도 이를 가로막고 있는 것은 정당의 패거리 문화”라면서 “당론이라는 이름으로 의원 개개인의 의견이 묵살되다 보니 정치는 실종되고 토론의 장인 국회가 싸움의 장만 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박세희 기자 saysay@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