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대학 투자 없이는 국가 혁신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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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근관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前 통계청장

잠재성장률 하락 방치 땐 재앙
유능한 인재는 모험 기피하고
보호 대상은 내몰린 구성 모순

대학 투자 없어 인재는 떠나고
정부지원 기댄 뻔한 연구 조장
도전적 실패 감싸 안아야 희망

민족의 비극 6·25전쟁은 우리를 도탄에 빠지게 했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우리 대한민국은 세계가 놀란 눈부신 경제 발전을 이뤄냈다. 정치적 민주화도 달성했다. 1997년 말에는 아시아 외환위기가 있었다. 경제가 곤두박질치고 수많은 직장인이 일터를 잃었다. 2008년엔 세계적 금융위기가 닥쳤다. 이전 아시아 외환위기의 악몽이 재현될까 봐 국민 모두가 전전긍긍했다.

우리 경제에서 1970∼1980년대에는 선진국의 것을 베껴 제품을 만들어내도 괜찮았다. 제조업 위주였고 지식재산권 보호의 국제적 집행도 약했다. 그러나 지난 30년간은 달랐다. 5년마다 1%포인트씩 성장률이 추락했다. 성장률의 하락세는 진보든 보수든 정권의 속성과 무관하게 우리 경제를 짓눌러 왔다. 이른바 ‘김세직 법칙’은 현재도 진행 중이라 우리 경제는 어디까지 추락할지 모른다. 오늘날 우리는 새롭고 낯선 환경에 처해 있다. 우리가 느끼는 불확실성의 본질이 무엇인지, 진원지가 어딘지, 우리 미래는 대체 어떤 모습일지 가늠하기조차 쉽지 않다. 혁신으로 자신감을 회복할 때다.

혁신이 일어나려면 사회 구성원이 과감히 모험에 나서야 하는데 국민 개개인은 관성(慣性)의 힘을 거부하기 어렵다. 현재 대한민국에선 가장 능력 있는 사람이 가장 먼저 의사·변호사 등 각종 ‘사’자 들어가는 안전한 직업을 선택한다. 다음으로 능력 있는 사람이 그다음 안전한 직업을 취한다. 정작 보호받을 사람은 험한 광야(曠野)로 내몰린다. 스스로 선택해 모험에 나서는 게 아니라, 떠밀려 위험한 지경에 처하게 된다. 위험 배분이 전혀 잘못돼 있다. 위험에 구성의 모순(fallacy of composition)이 작동한다. 개개인 모두가 위험을 꺼리는 사회가 전체로 보면 가장 위험한 사회다.

변화와 혁신이 필요한 지금, 우리나라 교육은 소명을 다하고 있는가. 위험에 도전하는 창의적인 인재를 배출하고 있는가. 모든 학생이 어려운 문제를 풀 필요는 없다. 하지만 아무도 어려운 문제를 풀지 않는 나라에는 희망이 없다. 착각하지 말자. 평균 수학능력이 세계 1위라는 것은 별다른 의미가 없다. 허준이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 같은 수학 엘리트가 나와야 한다.

한데, 우리 대학은 장기간 할인 판매 중이다. 지난 10년 이상 계속된 반값 등록금 결과 대학은 반 토막이 났다. 혁신을 리드해야 할 대학이 시름시름 앓고 있다. 세계 각지의 한국인 인재조차 국내 대학으로 불러들일 여력이 없다. 들어왔던 인재마저 떠나간다. 필자가 속한 서울대만 해도 젊은 교수를 적잖이 외국으로 보내야만 했다. 이제는 최초 유치조차 힘든 실정이다. 서너 배 이상 차이 나는 연봉의 현실 앞에서 모국애만으로 귀국을 호소하기엔 역부족이다.

현실이 이러할진대 우리 사회에서 대학에 대한 투자다운 투자가 언제 있었는지는 기억조차 희미하다. 정부는 연구비 배정에 있어 각종 평가 기준을 정해 놓고 우리 교수를 ‘동네 게임’에 끌어들이고 있다. 정부로부터 연구비를 따내야 하는 교수들은 ‘물주(物主)’가 정해 놓은 게임 규칙을 따라가기에 급급하다. 국제 기준으로는 그리 대단한 연구가 아닌데도 교육부 등이 정한 기준에 의하면 좋아 보여야 연구비를 지원받을 수 있다. 이러다 보니 ‘뻔한’ 연구만 하는 ‘동네’ 연구자가 늘어나고 있다.

국제적으로 통하는, 보다 혁신적인 연구를 해 보겠다고 나서는 연구자는 점점 줄어만 간다. 우리나라 대학에는 학점에 연연하는 학생과 함께 교육부 평가 점수에 연연하는 교수만 늘어나고 있다. 이들로부터 도전이나 모험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의미 있게 시도하지도 않고 새로이 모험하지도 않는다. 이들의 연구만 장려하는 대학 정책은 망국의 지름길이다. 그만그만한 실력과 기술로는 가속화하는 국제 경쟁 속에서 의미 있는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없다.

혁신적인 연구에 대한 합당한 평가와 보상은 없고 위험과 시련만 있다면 누가 고생뿐인 도전의 길에 나서겠나. 우리 사회는 외롭고 고독한 싸움을 하는 도전적 인재와 혁신적 대학을 키워야 한다. 도전이 실패로 끝날 때는 감싸 안아 줘야 한다. 그런데 대학은 역주행하고 있지 않나. 국제적 수준이 나날이 추락하고 있지 않나. 서울대마저 혁신 없는 혁신센터가 돼 가는 모양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