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의 끝자락서 만나는 자연

여행길에 오르면 누구나 일상과 다른 세상을 꿈꾼다. 문명의 손길이 닿지 않은 오지마을도 그래서 언제부터인지 주요한 여행목적지중의 하나로 꼽힌다. 전기도 없고, 전화도, TV시청도, 당연히 인터넷통신도 불가능한 곳. 불편함 투성이지만 그래서 오히려 머리아픈 일상사를 잠시나마 잊을 수 있는 공간. 경북 청송 주왕산(720.6m) 자락의 내원동 마을은 어쩌면 사람들의 그러한 바람을 조금은 충족시켜줄 수 있는 장소인지 모른다.

내원동 가는 길은 ‘주왕의 전설’이 깃든 주왕산의 수려한 산세를 두루 감상하며 오르는 길이다.

^

주왕산 전설은 신라말 당나라의 ‘주도’라는 자가 반란에 실패하고 멀리 이곳 신라땅에까지 숨어 들어와 은거하면서 세력을 키워나가던중 신라 토벌군에 의해 진압되었다는 내용이다. 후세사람들은 이 반란자를 주왕(周王)이라 불렀고, 산이름도 주왕산이 되었다는 것이다.

국립공원매표소에서 마을까지는 약 4㎞의 산길. 매표소 옆 대전사를 거쳐 이어지는 숲길은 평탄하면서도 낙엽이 푹신하게 깔린 흙길로 마치 산책하듯 걸어올라갈 수 있다. 주방천 계곡과 어깨를 나란히 해 운치도 그만이다.

특히 매표소에서 30여분 거리의 제1폭포 일대는 거대한 바위봉과 협곡이 천험의 요새처럼 하늘을 가리고 펼쳐져 ‘기암절벽이 병풍같다’고 해 붙은 주왕산의 또다른 이름 석병(石屛)산이 정말 실감난다.

가뭄 때문에 계곡과 폭포의 물줄기가 빈약하다. 그러나 신록과 그 사이를 뚫고 하늘로 두둥실 솟은 듯한 학소대 시루봉 등의 기암연봉들과 시퍼런 물이 담긴 선녀탕 구룡소 등이 어우러져 비경을 연출, 물이 줄어든 계곡의 안타까움을 순식간에 날려보낸다.

제1폭포에서부터는 임도가 끊어져 자동차로 국립공원 매표소 통과가 허락된 마을주민들도 하차해 도보로 올라가야 한다.

마을까지 오르는 길목에는 주왕산 사슴할아버지로 알려진 권영도(68)씨가 관리하는 대피소와 제2폭포 제3폭포가 나란히 이어진다. 30여년전 내원동 마을에 들어온 권씨는 아호가 소록(素鹿)이어서 언제부터인가 사슴할아버지로 불리고 있다. 4년전 마을에서 내려와 대피소를 관리하고 있다.

길 한쪽편 100여m 바위 협곡을 헤치고 들어가면 나지막히 모습을 보이는 제2폭포, 또 2단의 암반위로 물보라를 날리며 폭포수가 쏟아지는 제3폭포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수석전시장이고, 한폭의 진경산수화다.

‘전기없는 마을 내원동 가는길’ 입간판은 제3폭포를 지나면 곧바로 모습을 보인다.

입간판에서 마을까지는 다시 10여분. 억새밭 사이로 놓인 다리를 지나 울창한 송림 사이 오솔길을 가다보면 갑자기 탁트인 분지가 모습을 보인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청송군 부동면 상의리.

마을을 가로지르는 개천 양쪽에 10여가구가 옹기종기 자리잡고 있고 그 분지를 감싸안으며 왕거암 벅구등 도솔봉 등의 준봉들이 첩첩이 펼쳐진다. 내원동에는 현재 모두 아홉가구에 18명이 거주하고 있다.

감자 옥수수 고구마 콩 등이 심어져 있는 텃밭에는 평화로움이 넘치고, 집집마다 뒤편에는 국화과의 하얀 개망초꽃이 무리지어 피어 있다.

마을 초입에는 이제는 폐교가 된 내원분교를 개조해 청솔 솔뫼산악회 산꾼인 이상해(43) 김희숙(44)씨 부부가 식당 겸 민박집인 내원산방을 운영하고 있다.

내원산방에서 50여m 마을로 더 접어들면 사슴할아버지댁, 옹달샘, 예천할매댁 등 간판을 내건 식당들이 나란히 이어진다. 모두 살림집을 개조해 앞마당에 비치파라솔 등을 설치해 식당으로 꾸며 놓았다.

엄밀히 말하면 내원동은 ‘전기 없는 마을’은 아니다. 집집마다 태양열발전기나 대형충전전지 등을 마당에 묻어놓고 전화는 물론 TV시청도 한다. 단지 자연훼손을 우려한 국립공원관리공단측이 전기가설공사를 미뤄, ‘한전’의 전기가 들어오지 않고 있을 뿐이다.

관광지로 변해가는 마을 모습에 적이 실망스럽다.

그러나 내원동 반장인 김희걸(72)씨의 얘기. “숯가마가 있고 엽연초를 재배했던 70년대 초반만해도 60여가구에 700여명이 거주했어. 그러나 숯가마도 금지되고, 담배농사도 재미를 못보자 하나둘 마을을 떠나 지난 80년엔 분교도 폐교됐지. 그나마 등산객 바라보고 민박이라도 못했다면 마을이 없어졌을지도 몰라.”

내원동 민박집을 찾은 여행객들은 밤이면 전깃불을 밝힐 수 있는데도 굳이 촛불을 찾는다.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향수일까. 어찌보면 주왕의 전설이 최근 신라 헌덕왕때 김헌창의 난을 미화한 허구로 밝혀지고 있음에도 계속 중국인 주왕의 전설로 믿고 싶은 것이나 마찬가지 심정인지 모른다.

/주왕산〓이경택기자 ktlee@munhw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