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지하철 참사>폐속엔 검은재,머릿속엔 악몽

“반드시 건강을 회복해 가족들의 사랑에 보답하고 싶어요. 그리고 지하철은 절대 타지 않을거예요.”

대구지하철 방화참사로 부상한 김은주(여·25·대구시 동구 방촌동)씨는 방화용의자와의 참으로 질긴 악연 때문에 오늘도 대구시 동구 파티마병원 4층 중환자실인 집중치료실에서 힘겨운 사투를 벌이고 있다. 김씨는 이번 날벼락같은 사고로 부상한 146명 가운데 지금까지 남아있는 단 두명의 중상자중 1명. 나머지 1명은 방화용의자 김대한(57)씨이다.

첫불이 난 전동차의 맞은편 전동차인 1080호 5호차에 탔다가 구사일생으로 빠져나와 병원으로 옮겨진 김씨는 사고발생 16일째 생존을 위한 몸부림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처음 4일은 눈조차 뜨지 못했다. 폐 속에 가득찬 유독가스를 밖으로 뱉어내야 하지만 혼자 힘으로는 기침조차 할 수 없어 ‘석션(흡입술)’을 수없이 되풀이했다.

기침이라도 할라치면 온몸이 식은 땀으로 젖어버리는 탈진 상태에 빠지는 것은 매일의 일과처럼 돼버렸다. 석션을 할때마다 심한 고통으로 울부짖으면서도 폐속 깊숙이 차있는 ‘악몽의 찌꺼기’를 매일 1000㏄가량씩 16일째 뱉어내고 있다.

기자가 찾은 4일 오후에도 30분이나 넘게 걸리는 기관지 내시경 검사를 통해 병세를 확인하며 폐속의 찌꺼기를 밖으로 끄집어 내고 있었다.

아직까지 기침할때마다 가래에 중앙로 역사를 뒤덮었던 검은 연기의 흔적이 묻어나고 있다.

김씨는 한때 병세가 호전되면서 지난달 27일에는 일반병실로 옮겨져 안도감을 맛보기도 했으나 그것도 단 하루에 불과했다. 호흡곤란 증세가 다시 악화되면서 중환자실로 다시 내려와야 했다.

김씨는 “16일째 병상을 지켜준 엄마의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건강을 되찾아 새로운 인생을 살아보고 싶다”고 강한 회복의지를 보이면서 가족들을 안심시키려 애쓰고 있다.

어머니 박영자(50)씨는 “‘죽어도 지하철은 타지 않겠다’는 딸은 요즘도 밤이면 악몽으로 몇번이나 가위에 눌려 잠을 깨곤 한다”며 “하루빨리 병세가 좋아져 일반병실이라도 옮겼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은주씨가 손끝에서 잡히는 봄 햇살을 받으며 집에서 500m나 떨어진 지하철 방촌역으로 나와 불이 난 전동차의 맞은편 전동차인 1080호 5호차에 탑승한 시간이 18일 오전 9시 30분쯤. 자신이 일하는 가게가 일요일에 쉬지 않는 대신 매주 하루씩 갖는 평일 휴무가 내일(19일)인데다 결혼을 약속한 ‘오빠’(29)가 충북 청주에서 달려온다는 설렘에 기분 좋은 출근길이었다.

그러나 은주씨의 즐거운 상상은 전동차가 중앙로역에 도착하는 순간 악몽으로 바뀌고 말았다. 전동차가 중앙로역 구내로 들어오면서 반대편 선로에 정차해있던 전동차에 불이 보였고 열려야 할 전동차의 문은 잠시 열리는가 싶더니 내릴 사이도 없이 다시 닫혀버렸다. 한참을 기다려도 닫힌 문사이로 연기만 들어올 뿐 문은 열리지 않았다. 승객들의 술렁거림과 기침소리가 뒤섞인 아수라장에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일단 불길과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옮겨 4호차에 발을 내딛는 순간 “출입구가 열렸다”며 승객들이 빠져 나가기 시작했다.

은주씨도 메케한 연기 속으로 나와 계단을 향해 마구 뛰었다. 1079호 불이 1080호로 옮겨 붙기 전에 그곳을 빠져 나왔지만 이미 지하 3층은 고통스러운 울음으로 가득찼다.

대구〓한강우기자 hangangmunhw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