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인물현대사>거인,아내의 죽음앞에 한참을 통곡하다

최종현은 평소 건강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고, 일종의 기(氣)체조인 ‘심기신수련(心氣身修練)’을 통해 누구보다 열심히 몸을 관리했다. 특히 그는 독창적으로 기수련에 관한 이론을 정립했고, 이를 책과 비디오로 만들어 임직원들에게 설파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갑자기 폐암선고를 받자 식구들은 물론 SK그룹 임직원들과 재계가 받은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최종현 회장이 폐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된 것은 아주 우연이었습니다. 1997년 5월 어느 날로 기억됩니다. 당시 최 회장은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을 겸하고 있어 이곳저곳에서 강연요청이 많이 들어왔는데, 한번은 춘천에서 서울대 의대 교수들의 세미나에 참석해 강연을 하게 됐습니다. 세미나를 마치고 의대교수들과 식사를 함께 했죠. 그 때 옆에 앉은 한 의사가 최 회장이 마른 기침을 자주 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겨 ‘진찰을 한번 했으면 한다’는 뜻을 전했습니다. 평소 건강에는 자신이 있던 터라 별 걱정없이 병원을 찾았는데, 진단 결과 폐암일지 모른다는 얘기를 들은 것입니다.”(이노종 SK아카데미 원장)

당시 최종현을 진찰했던 의사는 박재갑 현 국립암센터 원장이었다. 그야말로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었다. 담배를 끊은 지 15년이 넘었고,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아침 심기신수련으로 몸을 단련했던 그였기에 충격은 더 컸다. 최종현은 당시의 심정을 ‘마음을 다스리고 몸을 움직여라’(1999년 최종현 저) 서문에 이렇게 적고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진단에 이어 수술까지 받게 되자 충격이 너무 컸다. 아무리 나이는 어쩌지 못한다고 하지만 누구보다 건강에 자신이 있었기에 나는 병원의 진단 결과를 선뜻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재차 검사를 했으나 역시 같은 결과가 나왔고 꼼짝없이 수술을 받아야 했다.”

최종현은 뉴욕의 폐 전문 병원인 ‘메모리얼 슬론 케터링’에 입원했다. 대수술을 앞둔 최종현은 평소와 다를게 없었다. 별다른 몸의 이상을 느끼지도 못했고 수술을 잘하면 나을 수 있을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었다.

“최회장은 폐암이 발견되고 수술을 위해 사모님과 미국으로 떠나실 때도 마치 출장을 가시는 양 아무렇지도 않게 떠나셨습니다, 오히려 주변 사람들이 초주검이었지요.”(손재택 당시 비서실장)

수술을 앞두고 뉴욕 근교에 있는 컨트리클럽에서 아들과 함께 골프를 치는 일정까지 잡아놓을 정도로 그는 태연했다. 1997년 6월16일 수술 당일에도 걱정스레 지켜보던 식구들에게 “난 이제 올라간다”며 명랑한 표정으로 수술실로 향했다. 수술은 6시간에 걸쳐 진행됐다. 대수술을 마치고 병실로 돌아온 그의 입에서 나온 첫 마디는 “설렁탕이 먹고 싶다”였다. 노심초사하며 결과를 기다렸던 부인 박계희 여사는 즉시 고깃국을 만들어와 남편에게 직접 떠먹였다.

“사모님은 평소 몸이 약했습니다. 대식가였던 회장님과 달리 소식가였죠. 식사 약속이 없는 날은 하루종일 거의 음식을 먹지 않았습니다. 수술이 있던 날도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커피만 들며 기다렸습니다. 일주일 가까이 잠도, 음식도 제대로 챙기지 못했습니다. 최회장 식사를 일일이 직접 하셨고, 함께 간 임원들 식사까지 챙겼으니 몸도 약하신 분이 얼마나 힘이 들었겠습니까.”(이노종 SK아카데미 원장)

하늘처럼 믿고 의지했던 남편의 갑작스러운 폐암 선고, 그리고 대수술. 박 여사가 받았을 당시의 충격을 어찌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대수술이 끝난 날, 박 여사는 남편과 모처럼 오순도순 시간을 보냈다. 서울에서 뒤늦게 도착한 회장단은 두 사람의 얘기가 끝날 때까지 밖에서 기다렸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모든게 안정을 되찾는 것처럼 보였다. 박 여사는 태원과 재원, 두 아들과 막내딸 기원을 데리고 모처럼 맛있게 외식하고 뉴욕에 있는 SK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와 잠이 들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62세. 박 여사는 조용한 성품 그대로 밤사이에 고요히 숨을 거뒀다.

SK그룹은 18일 국내 언론에 “박계희 여사가 지난 5일 최회장과 함께 미국으로 출국한 후 사망했으며, 사인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나 과로로 인한 심장마비로 추정된다”고 발표했다.

박 여사가 마지막 숨을 몰아쉬던 그 순간, 최종현은 갑자기 열이 오르면서 상태가 악화돼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아버지께서 수술을 받고 내려온 것이 오후 2시였는데, 다음날 새벽 1시쯤 다시 중환자실로 들어가셨습니다. 폐수술후 가장 위험하다는 폐렴 부작용 때문이었습니다. 무슨 얘기를 하면 반응은 보이시는데, 깨어나면 아무 것도 기억을 못하는 일종의 무의식 상태였습니다. 이틀이 지나서야 깨어나셨죠.”(최재원 SK엔론 부회장)

회사는 비상 사태에 돌입했다. 회장의 병환과 박씨의 장례식 문제를 동시에 논의해야할 기가 막힌 상황이었다.

영결식은 1997년 6월24일 뉴욕 맨해튼 프랑크 캠벨장에서 거행됐다. 삼남매를 비롯해 유족과 SK그룹 임원, 지인 등 수백명의 국내외 인사들이 참석했다. 평소 최종현과 친분이 두터웠던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대사, 손넨 샤인 시카고대 총장, 게일 존슨, 랄프 니콜러스 교수 등도 참석해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유해는 영결식 직후 귀국길에 올랐고, 빈소는 서울 광진구 워커힐 호텔 빌라 자택에 마련됐다. 28일 장례식이 치러질 때까지도 최종현은 아내의 죽음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회복세이긴 했지만 대수술을 마친 지 얼마 안된 상황에서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이란 충격적인 소식을 듣고 견딜 수 있겠느냐는 우려 때문에 즉각 알리지 못했던 것이다.

의식을 찾고나서도 박씨가 모습을 나타내지 않자, 중환자실에 있던 최종현은 아내를 찾기 시작했다. “네 엄마는 어디 갔느냐”는 물음에 자녀들은 “감기몸살 때문에 쉬고있다”고 둘러댔다. 그러자 최종현은 “그래, 네 엄마도 무척 힘들었을 거야. 무리하지 말고 푹 쉬라고 그래”하고 오히려 아내의 건강을 걱정했다.

하지만 계속 사실을 감출 수는 없었다. 이미 영결식을 마치고 운구는 서울로 옮겨져 장례식까지 치른 뒤였다. 논의 끝에 자녀들이 함께 들어가 사실을 알리기로 했다. 갓 수술을 마친 중환자가 극심한 심적 충격을 받을 것에 대비해 의료진은 비상대기에 들어갔다.

갑자기 자녀들이 우루루 들어오자 최종현은 뭔가 이상했는지 “뭐야” 하고 물었다. 김항덕 회장과 손길승 실장은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다. 어색한 침묵 가운데 막내딸(최기원)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아빠, 사랑하는 엄마가 하늘나라에 먼저 가셨어요.”

“아버지께서는 직감으로 모든 것을 눈치채신 것 같았습니다. 퇴원하기 전 마지막 이틀 동안 중환자실에서 어머니를 정말 많이 찾으셨습니다.”(최재원 SK엔론 부회장)

사정을 모두 전해들은 최종현은 “다 나가라”고 짧게 말했다. 그리고 병실 밖에서도 들릴 정도로 통곡했다. 최종현의 미국 유학시절 친구였던 홍사중 전 조선일보 고문은 당시 최종현의 모습을 이렇게 회고했다.

“딸이 어머니의 죽음을 아버지에게 알린 후,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최 회장의 병실로 들어갔다. 병상에 윗몸을 일으키고 비스듬히 앉아있던 그는 나를 보자마자 ‘난 이제 어떻게 사니’하며 울부짖었다. 최 회장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본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최 회장의 울부짖음은 멈추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최 회장이 울음을 그쳤다. 그러더니 슬픔에 애써 매듭이라도 짓듯이 ‘내가 이러고만 있을 수는 없지’라고 평정을 되찾은 듯한 말투로 말했다. 되는 소리 안되는 소리,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하며 그를 달래고 있던 내게 ‘고맙다’는 말도 했다. 그것은 내가 그에게 생전 처음 들어본 말이었다.” (회고록 ‘나는 한없이 살았다’중에서)

후일 최종현은 ‘마음을 다스리고 몸을 움직여라’에서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적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폐암 진단을 받고 수술까지 받는 고비에서 나는 일생의 동반자를 잃는 슬픔도 감수해야 했다. 운명이 가혹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지만, 준비된 운명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연습도 할 수 있었다. 새삼 ‘사람의 목숨이란 욕심대로 되는 것이 아니구나’하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병원에서 퇴원한 최종현은 코네티컷의 한적한 교외에서 요양을 마치고 1997년 8월 귀국했다.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수원 가족묘지에 있는 부인의 묘소를 찾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다시 한 번 눈물을 쏟았다.1년뒤인 1998년 6월18일. 박 여사가 관장을 지내며 애정을 쏟았던 워커힐 미술관에서 1주기 추모식이 열렸다. 이 날 추모식에는 친지, 미술계인사, SK 사장단, 한국고등교육재단 관계자 등 200여명이 참석했다. “항상 진실되게 살라고 가르쳐온 어머님 모습이 눈에 아른거린다”는 장남 태원(현 SK㈜ 회장)의 추모사는 참석자들의 눈시울을 적셨다. 아들이 추모사를 읽는 내내 최종현은 말없이 허공만 응시하고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