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인물현대사>임종 그날까지 장묘문화 개선 앞장

최종현(전 SK그룹회장)은 1998년 8월26일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69세였다. 합리적인 성격의 그는 눈을 감기까지 ‘집없는 재벌총수’로 지냈고, 죽어서도 화장을 선택해 ‘장묘문화 개선에 앞장선 재벌총수’라는 평을 받았다.

최종현의 장례는 회사장으로 치러졌다. 유가족은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가 제의한 전경련장을 극구 사양하며 가족장을 고집했으나 결국 회사측의 권유를 받아들여 ‘SK장’으로 치르게 됐다.

1998년 8월30일 오전 8시 서울 광진구 쉐라톤워커힐호텔에서 최종현의 영결식이 거행됐다. 김우중 전경련 회장대행, 도요타 쇼이치로(豊田章一郞) 일본 게이단렌(經團連) 명예회장, 사돈인 노태우 전 대통령 내외, 평소 가깝게 지냈던 방일영 조선일보 고문 등 각계인사 700여명이 참석해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영결식이 끝난 뒤 최종현의 유해는 경기도 벽제화장장으로 옮겨졌다. 고인의 뜻에 따른 것이었다. 최종현은 평소 장례문화에 대해 이같이 말하곤 했다.

“헬기를 타고 출장을 가면서 나라가 온통 무덤으로 덮여있는 걸 보고 이대로 가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좁은 국토의 효율적 이용 측면에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를 개선하는 방법은 화장을 해서 가족묘나 납골당에 모시는 것이다.”

1997년 작고한 부인 박계희의 유해도 이날 새벽 수원 가족묘지에서 벽제로 옮겨져 남편의 뒤를 따라 화장됐다.

최종현의 화장은 파장이 컸다. 당시 빈소를 찾은 상당수 사회 지도층 인사들은 고인의 화장문화운동에 적극 동참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은 SK가 화장터를 만들어 기증하면 1호 이용자가 되겠다고 말했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역시 SK의 화장문화운동을 적극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고건 당시 서울시장은 SK가 화장터를 기증하면 화장터 설립에 필요한 모든 행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했다.

최종현의 화장은 SK 내부에도 적지않은 영향을 끼쳤다. 2000년 타계한 최윤원(최종건 SK그룹 창업주의 장남) 전 SK케미칼 회장은 삼촌의 뒤를 따라 화장을 택했고, 최종현의 ‘평생동지’였던 손길승 전 SK그룹회장도 고인의 뜻에 공감, 1999년에 사망한 어머니 장례를 화장장으로 치렀다.

최종현이 타계하자 각계의 조문과 애도가 줄을 이었다. ‘경제계의 거목이 쓰러졌다’는 탄식이 터져나왔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뜻을 같이하는 재계 선배와 동지로 평소 존경해온 당신의 별세 비보는 하늘이 무너지고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과 충격이었다”며 최종현에 대한 추모의 정을 나타냈다.

일본 재계를 대표해 장례식에 참석했던 도요타 쇼이치로 게이단렌 회장은 “한국뿐 아니라 일본도, 아시아도 지금이야말로 당신의 활력과 리더십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대변혁기에 당신을 잃은 것은 너무나도 통한스러운 일입니다”고 말해 참석자들의 심금을 울렸다.

손길승 전 SK그룹회장은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비통함마저도 이 참담한 마음 같지는 못할 것입니다. 언제나 회장님께서 함께하시며 저희를 인도해 주실 줄 알았는데 너무도 갑작스러운 현실 앞에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고 말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최태원 SK㈜ 회장은 최종현 사후 1주기 추모식에서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애정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저는 세가지 큰 가르침을 선친께 받았습니다. 첫째로 선친께서는 지식의 필요성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항상 저희 자식들에게 ‘내가 물려주고 싶은 재산은 물적 재산이 아니라 지적 재산이다. 지식이 있으면 재물은 따라온다. 허나 지식없이 재물만 있으면 그 재물은 오히려 사람을 불행하게 만든다’하시며 지식을 쌓을 것을 권유하셨습니다. 두 번째 큰 가르침은 지식의 운용법입니다. 제가 경영을 배우던 어느날 경영상의 어렵고 힘든 문제를 상의드리고자 선친을 찾아뵈었습니다. 제 이야기를 다 들으시기도 전에 ‘그건 네 문제구나 네가 고민하고 네가 풀어라’하시면서 또 다른 할 말이 없으면 나가보라는 표정으로 저를 쳐다보시는 것이었습니다. 세 번째 가장 중요하고 큰 가르침은 지식의 실천 과제였습니다. 선친께서는 지식을 실천, 즉 행동을 하심으로써 저희에게 지식인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죽음을 맞이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하나 흐트러짐없이 당신의 경험을 글로 만드시고 장례문화의 개선을 위한 마지막 배려까지 해주시며 행동하는 지식, 실천하는 지식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계속〉

산업부 특별취재팀
팀장 최준영차장,박영출기자,유회경기자,노윤정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