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윤의 스포츠 인생> “태극마크 달면 ‘코트서 죽어도 좋다’ 각오로 싸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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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수준이야 한참 떨어졌을지라도 축구 보는 재미는 70~80년대가 훨씬 더 했던 것 같다. 월드컵 아시아예선에서나 만났던 호주나 이스라엘은 너무 강팀이었고 버마는 한수 아래로 여겼지만 잘 이기지는 못했던 그 시절, 킹스컵축구라도 열리면 TV가 있는 집이나 동네 전파상의 수신기 앞에 몰려들어 축구수준과 비슷했던 선영재씨의 해설을 들으며 손에 땀을 쥐었다.

볼 것이 그만큼 없었던 시절이라 더 그랬으리라. 농구도 마찬가지다. 마니아층이나 스타들을 보려는 소녀 팬들의 차지인 것 같은 요즘의 프로농구보다는 그 시절의 농구가 ‘백성’들의 심금을 울렸다.

중국을 중공이라고 불렀던 그 때 여자농구는 우리의 자존심을 한껏 높여주었다. 2m가 훨씬 넘는 장신 센터들을 갖춘 중공을 조직력과 롱슛으로 번번이 꺾었다. 아마 그때가 한국여자농구 전성기의 끝자락으로 보여지는데 ‘마지막 불꽃’은 ‘세계 올스타’에 올랐던 박찬숙이라는 센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84 LA올림픽 은메달의 주역인 왕년의 농구스타 박찬숙(48·사진)씨를 지난 23일 만났다. 여자프로농구연맹(WKBL) 경기이사를 맡아 매 게임을 분석해야 하는 그는 그날도 경기가 열리는 부천으로 가는 길에 문화일보에 들렀다. 여자로는 지금도 큰 키인 190㎝지만 검정색 정장을 해서인지, 균형이 잘 잡힌 체격 때문인지는 몰라도 지나치게 크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박찬숙은 서울 창신초등학교 5년 때까지 또래보다 머리 하나가 큰 키(170㎝)였지만 운동선수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공부 잘하는 학생이었다. “공부를 잘해서 줄곧 반장을 했는데 5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너를 농구선수 시키자고 하더라’라는 말을 살짝 흘렸어요.

깜짝 놀라 한 마디로 거절했고 선생님도 ‘그래, 그래 나도 농구 말고 공부를 했으면 좋겠다’고 하시데요. 나중에 알고 보니 농구명문 숭의초등학교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있었더군요. 내가 펄쩍 뛰더라는 말을 전해들은 김윤 코치는 하교하는 내 뒤를 몰래 밟아 부모님을 구워삶았나 봐요. 부모님이 적극적으로 권했죠. 어릴 때라 거역을 못하고 ‘해보겠다’고 했어요.”

얼떨결에 선수가 됐지만 처음에는 매일 울었다. “농구골대가 그렇게 높고 농구공이 그렇게 큰지 몰랐어요. 전학수속이 끝날 때까지 다른 학교에서 ‘채갈 지 모른다’며 몇 달간 집에 보내지도 않고 선배 언니집에 재워 집에 보내 달라고 매일 울었죠.”

아버지(박응서씨·2004년 타계)는 173㎝으로 보통 키였지만 어머니(김순봉씨·2003년 타계)가 180cm로 컸는데 두 분 모두 육상 단거리선수 출신이다. “친구들이 키다리라 놀리는 것을 공부로 이겨보려고 책만 봤으니 내 운동능력에 대해 몰랐어요. 하지만 선생님의 부추김과 칭찬에 고무돼 열심히 했더니 되더라고요. 물려받은 운동신경이 있었던 거죠.”

농구 강팀이었던 숭의초교는 박찬숙이 가세한 후 ‘대회에 나기기만 하면 우승’이었다. 첫 출전한 대회에서 박찬숙은 소년신문에 대문짝만한 기사가 실릴 정도로 유망주 대접을 받았다. “어린 나이였지만 신문에 그렇게 크게 나자 ‘못하면 어떡하나’하는 걱정이 들었고 ‘더욱 새로운 면을 보여주자’고 더 열심히 하게 되데요. 사실 난 신문기자들이 싫었어요. 괜히 압박감을 많이 주셨거든요.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농구스타 박찬숙’을 만든 것은 매스컴의 관심과 그로 인한 스스로의 분발이었죠.”

박찬숙은 1975년 숭의여고 1년 때 188㎝로 자랐고 그 해 국가대표로 선발됐다. 16세 때 태극마크를 단 것은 지금도 여자농구 사상 최연소 기록이다. 170㎝급이 센터를 봐야했던 사정 때문에 ‘중공’에 밀렸던 한국 여자농구는 박찬숙이라는 대형 센터의 출현으로 아시아 정상에 설 수 있었다.

210㎝인 천웨팡과 204㎝인 정하이샤가 버틴 중국은 높이에서 한국을 압도했지만 한국에는 조직력이라는 또다른 무기가 있었다. “그 시절 외국 농구전문가들은 한국 여자농구를 ‘예술이다’ 또는 ‘아름답다’고 표현했어요. 조직력에 의한 패스게임으로 슛 찬스를 만들어 가는, 참 ‘이쁜 농구’를 했죠. 요즘 세계 농구는 무서울 정도로 남성 못지않은 파워플레이를 해요. 우리도 프로화가 되면서 조직력보다는 개인기와 파워플레이 경향으로 갑디다. 근데 우리는 ‘피가 달라서’ 서구식 농구는 한계가 있어요.”

한국여자농구가 가장 빛났던 LA올림픽에는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 국가가 대거 불참해 미국 중국 유고 캐나다 호주 등 6개국만이 출전해 풀 리그를 벌였다. “6개국이라 하지만 ‘어차피 6등인데, 잘하면 호주정도는 이길 수 있겠다’고 내심 생각했을 정도로 모두 강한 상대였어요. 사실 LA올림픽 이전에 다리 수술도 하고 해서 은퇴하고픈 마음이 굴뚝같았는데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지 못했어요.

첫판에 강적 캐나다를 꺾고 또 호주도 이기고 하니까 뭔가 보였어요. 중국전을 앞두고는 밤새 혼자 작전을 짜보느라 누워서 농구 한 게임을 다했어요. ‘섀도 복싱’같은 거죠. 아침에 일어나니 그렇게 몸이 가벼워요. 날아다녔죠. 69-56으론가 완승했어요. 나하고 최애영, 이형숙, 김화순, 성정아가 베스트5였지요. 미국은 키 차이도 있고 한국 남자대학생 선수정도의 파워를 갖춰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요.

내가 그때 주장이었는데, 역시 모든 일에는 리더가 중요합디다. 주장인 내가 정말 열심히 하자 후배들이 잘 따라왔어요. 정치도 그래야 하는데…. 우리 때는 태극마크를 달면 사명감으로 몸이 부르르 떨릴 정도였어요. 여자들이지만 ‘코트에서 죽어도 좋다’는 각오로 싸웠는데, 요즘 후배들은 프로가 돼서인지 그런 점이 부족해요.”

박찬숙은 85년 아시아선수권에서 또다시 한국을 정상으로 이끈 후 은퇴했다. “태극마크만 10년 달았어요. 정말로 농구를 하기가 싫었어요. 생각해보세요. 1년에 50일정도만 빼고는 태릉에서 합숙했는데, 요즘 태릉 시설은 호텔 급이지만 당시는 엉망이었지….”

은퇴와 함께 7년간 사귄 서재석(53·사업)씨와 결혼했고 이듬해 첫딸(서효명·22)을 낳았다. “당시는 결혼하면 무조건 은퇴였어요. 요즘 같이 프로가 있었다면 돈 욕심에서라도 싫어도 40세까진 뛰었을 텐데…. 아무튼 3년을 푹 쉬었는데 불현듯 농구생각이 나요. 정말 간절하게. 마침 대만에서 불러서 88년 플레잉 코치로 3년간 뛰었는데 그땐 정말 재미있게 농구를 했지요.

다들 ‘한국의 국보 박찬숙’이 왔다고 치켜세우는데다 한국에서와는 달리 내 마음껏 다할 수 있는 분위기여서 그랬었나 봐요. 개인 1게임 최다득점 기록(53점)도 대만에서 수립했죠.” 대만에 이어 친정팀 태평양에서의 플레잉 코치 등 ‘제2의 농구인생’이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박찬숙은 첫째를 낳은지 10년만에 둘째(서수원·12)를 봤다.

남편과는 실업 1년생일 때 미팅에서 만났다. “부상을 당하면 가는 지정병원이 있었는데 어느 날 원장 동생이라는 분이 왔다가 팬이라고 하면서 ‘언제 한번 제 친구들과 미팅이나 하죠’해서 나도 농담 삼아 그러자고 했는데 진짜 미팅을 하게 됐어요. 그때 파트너가 재석씨인데 복학해서 4학년 때였죠. 그인 내 팬이 돼 주로 엽서로 격려를 많이 해줬죠.

그렇게 7년이 되니까 그만 정이 들어 결혼했던 것 같아요. 다른 커플처럼 ‘사랑한다’ 이런 말도 없었고…. 뭐 연애할 시간도 없었지만. 제가 현역일 때는 인기가 ‘짱’이었어요. 매일 태릉으로 팬레터가 라면박스로 한 개씩 왔고 개중에는 우리 집 담을 넘어와 만나게 해달라고 떼를 써 경찰이 출동하기도 하고, 선수촌 정문 앞에 나를 만나겠다고 진 치고 기다린 사람도 많았어요.

김성집 촌장님을 통해 중매도 많이 들어 왔었어요. 동료 남자 국가대표 중에도 나를 노리는 사람이 많았다고 하데요. 체육계에서는 은근히 부추기는 눈치였죠. 뭐, 2세를 낳으면 스포츠 영재가 나올 것이라나. 미 프로농구에 진출한 중국의 야오밍이 그런 케이스로 태어난 경우긴 하지만. 장신 콤플렉스인지는 몰라도 신랑은 나보다 키가 작아야 한다는 원칙을 세워 놓고 있어서 운동선수는 싫었어요.”

박찬숙은 농구공에서 인생을 배웠다. “농구공만큼 큰 공이 어디 있나요. 또 다른 공처럼 휘어나가지 않고 항상 일정하잖아요? 또 내가 요리하는대로 따라오고.”

농구공처럼 둥글둥글하고 변함없는 인생을 살고 싶다는 박찬숙은 그러나 여성지도자가 없는 한국 스포츠의 풍조에 대해서는 상당한 불만을 토해냈다. 2005년 동아시안게임 여자대표팀 감독을 맡은 적이 있는 그는 “이제는 우리나라 스포츠계도 여성을 활용해야 할 때가 됐어요. 준비된 여성지도자도 많고요. 솔직히 국제대회에서 한국의 명예를 빛낸 게 여성이 많았나요, 남성이 많았나요? 남성들이 기득권만 챙기려 하지 말고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죠”라고 다부지게 말했다.

글 = 체육부장 dylee@munhwa.com

사진 = 김낙중기자 sanjoong@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