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와 비전>“50년만에 상상못할 발전… 한국 국민에 경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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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50년 전 자신이 디자인한 한국전 참전 영국군 전적비 앞에 선 다큐멘터리 감독 아널드 슈워츠먼. 이 전적비를 세울 때 그는 21세의 청년이었으나 이젠 백발의 노장이 됐다. 파주 = 이미숙기자

세계 디자인계의 거장으로 꼽히는 영국 출신의 산업디자이너이자 아카데미상 수상감독인 아널드 슈워츠먼(71)이 자신의 첫 작품인 한국전 참전 영국군 전적비 제막 5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했다. 슈워츠먼은 지난 21일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설마리에서 개최된 전적비 제막 50주년 행사에 참석한 데 이어 22일 주한영국대사관에서 한국전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조용한 아침의 나라’(The Morning Calm·사진)의 첫 시사회도 열었다. 슈워츠먼을 21일 파주 설마리 및 22일 시사회 현장에서 만나 50년 전 그가 체험한 한국과 요즘의 한국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한국전 관련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든 동기는.

“내가 한국에 근무한 기간은 1956~57년에 걸쳐 11개월인데 미군 면세점에서 8㎜ 촬영기를 구입해 파주 적성군 일대의 군부대와 마을, 그리고 광화문 인근 거리의 표정과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찍어뒀다. 그 후 영국으로 돌아간 뒤 자료더미 속에 묻어뒀는데 나의 첫 작품인 영국군 참전비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특별히 제작했다. 한국에서 보낸 내 체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는 점에서 자전적 다큐멘터리라 할 수 있지만 이 필름은 전쟁의 상흔이 완연한 50년대 후반 기록물로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이번이 ‘조용한 아침의 나라’의 첫 시사회인가.

“그렇다. 세계적으로 처음 열린 시사회다. 상업용으로 만든 것은 아니기 때문에 개봉관에 선보일 계획은 없지만 한국전과 50년대 한국에 관심있는 이들을 위해 활용됐으면 한다. 한국전 참전 영국노병들과 세계 각국의 수많은 군인들 그리고 당시 전쟁으로 고생했던 모든 한국 사람들을 위해 만든 것이다.”

방한한 한국전 참전영국용사 70여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영국대사관에서 시사한 ‘조용한 아침의 나라’는 15분짜리 단편 다큐멘터리다. 56, 57년 파주 일대 군부대 및 일반주민들의 생활상이 그대로 닮겨 있고, 남대문에서 광화문으로 이어지는 서울 한복판의 소박한 풍경, 이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린 중앙청과 광화문 일대의 거리상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영화는 영국군복을 입은 슈워츠먼이 한국 소년 및 병사와 지게를 지고 짐을 나르는 장면으로 시작해 1957년 철수해 영국으로 귀환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영국은 한국전 발발 후 군부대를 파견, 1957년 7월 철수하기까지 총 8만7000명을 파병했으며 이 가운데 1108명이 전사하고 2674명이 부상했다. 슈워츠먼의 ‘조용한 아침의 나라’는 비록 영국군의 한군전 참전 전 과정을 그린 작품은 아니고, 슈워츠먼 자신의 한국파견 기간에 한정되어 있는 작품이지만 전쟁 후 영국군의 활동과 당시 한국의 사회상이 가감 없이 담겨진 기록물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을 만하다.

―다큐멘터리에 담긴 한국과 요즘의 한국을 비교한다면.

“당시 한국은 가난하지만 친근감이 있는 농촌의 이미지를 풍겼는데 반세기 만에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내가 8㎜ 카메라에 담았던 남대문 주변의 옛길과 중앙청이 모두 없어졌다. 상상 못할 변화 속에서 한국은 아주 발전한 나라가 됐다. 한국이 얼마나 변화했는지 이제는 영국과 미국이 내겐 제3세계 같은 느낌이 들 정도다. 50년 전 인천항에 도착했을 때 진흙에 빠져 고생했는데 이번엔 세계에서 최고로 꼽히는 인천공항을 거쳐 서울로 왔다. 세계 어디에서도 50년 만에 이렇게 변한 나라는 찾아볼 수 없다. 이 같은 기적을 만든 한국 사람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영국군 입대 후 한국배치 통보를 받았을 때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 기억이 나는가.

“21세 때 미술학교를 졸업한 뒤 입대했는데 독일에서 잠깐 근무한 뒤 곧바로 한국으로 배치됐다. 영국에서 한국까지 요즘엔 12시간이면 오지만 그때는 선박으로 6주나 걸렸다. 한국에 대해 아무런 지식이 없었지만 세계지도를 보며 아시아의 한 나라로 간다는 데 조금 들떠 있었던 게 사실이다.”

―한국에서의 1년 남짓한 체험이 디자인계의 세계적 거장으로 성장하는 데 바탕이 됐다고 생각하는가.

“파주 설마리에 있는 영국군 전적비는 나의 첫 작품이라는 점에서 많은 애착이 간다. 나는 캔터베리 미술대를 졸업한 직후 한국에 파견됐는데 전적비 디자이너로 선발되어 밤낮없이 일했다. 한국을 떠난 뒤에도 그때 밤새워 일하던 열정이 많이 생각났다. 1982년 다큐멘터리 ‘대량학살’(Genocide)로 오스카상을 받고 2000년 오스카상 시상식 포스터 디자인을 하는 등 수많은 작품을 만들었지만 설마리 전적비는 그런 점에서 내게 기념비적 작품이다.”

―한국전 참전 이후 한국과 연관된 활동이나 작업을 한 것이 있는가.

“유감스럽지만 설마리 영국군 전적비 이후 만든 첫 한국 관련 작품이 ‘조용한 아침의 나라’다. 하지만 84년 LA올림픽 디자인총괄감독을 지낸 뒤 88년 서울올림픽 때 디자인 관련 조언을 한 적은 있다.”

―어떤 조언을 했는가.

“있는 시설과 자산을 그대로 많이 활용하고 예산을 최대한 아끼라는 얘기였다. 내가 디자인총괄감독을 맡았던 LA올림픽의 경우 시민들의 세금은 단 1센트, 1달러도 소비하지 않고 모든 것을 기업 광고로 대체했다. 세븐일레븐이 사이클링경기장, 맥도날드가 수영경기장을 만들었을 뿐 LA시당국은 기존에 있던 것을 활용했다. 그 결과 흑자 올림픽이 될 수 있었다. 서울올림픽도 그런 측면에서 성공적인 대회였다. 그러나 몬트리올, 아테네 올림픽은 예산을 과다소비해 적자대회가 됐고, 런던시는 2012년에 있을 런던올림픽에 벌써 수십억파운드를 낭비하고있어 걱정된다.”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면서 한국영화 등을 접할 기회가 있었는가.

“직접 접할 기회는 없었지만 한국영화가 아주 뛰어나고 경쟁력이 있다는 얘기는 많이 들었다.”

―앞으로 한국 관련 작업을 할 계획이 있는가.

“현재 구상하는 것은 없지만 조언을 필요로 하는 이들을 위해선 얼마든지 할 생각이다. 내가 국제 디자이너로 클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 나라가 바로 한국이고 파주 설마리는 나의 디자인 1호 작품이 있는 곳이 아니냐. 어떤 일이든 요청을 받는다면 하겠다. 나는 한국을 좋아하기 때문이다.(웃음)”

―그간 다큐멘터리영화감독, 산업디자이너, 저술가 등 다양하게 활동해왔는데 주업은 무엇인가.

“내일은 그간 디자인에서 광고, 에니메이션, 영화로 진화해왔지만 나는 그래픽 디자이너라는 데 자부심을 갖고있다. 앞으로는 저술활동 쪽에 주력할 계획이다. 작년에 로스앤젤레스건축에 대한 책이 나왔는데 내 13번째 책이다. 다음 달에 런던건축에 대한 책이 나온다. 닭을 주인공으로 한 어린이용 그래픽동화도 쓰고 있다.그간 쓴 것은 모두 논픽션이었는데 새로운 장르인 픽션에 도전하는 셈이다.”

―한국에 머무르는 동안 하고 싶은 일은.

“한국의 미술관과 박물관을 둘러볼 생각이다. 한국은 내가 20대 초반 근무했던 곳이라서 친근하지만 한국의 문화예술에 대해선 익숙하지 않은 게 사실이다. 이번 기회에 한국의 아름다움을 직접 느껴보고 싶다.”

인터뷰 = 이미숙 정치부차장 musel@munhwa.com

[ 슈워츠먼 약력 ]

▲1936년 런던 출생 ▲캔터베리 미술대 졸업(1955) ▲영국군 입대, 한국파견(1956~57) ▲영국에서 TV프로듀서로 활동 후 미국 할리우드로 이동(1978) ▲다큐멘터리 영화 ‘대량학살’(Genocide)로 오스카상 수상(1982)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디자인총괄감독 ▲대영제국 4등 훈위(OBE, Order of British Empire) 수여(2002) ▲영국왕실디자인협회, 세계의 대표적 산업디자이너 9인으로 선정(2006) ▲‘데코 랜드마크(Deco landmarks)’, ‘비전의 영속성’ 등 디자인 관련 저서 10여권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