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지역주의

세상 어딜 가나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관계를 묘사하는 데는 공통점이 있다. 사이가 나쁘다는 것이다. 다만 나라마다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싸우는 모습일 것이다. 그 가장 극단적인 예는 인도와 일본이라고 한다(나카네 지에 도쿄대 명예교수 ‘수직사회의 인간관계’).

인도에서는 싸움이 벌어질 경우 집안이 떠나갈 듯이 다툰다. 그래서 온 동네 주민이 금방 사태를 짐작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동네의 시어머니와 며느리들이 서로 편을 갈라 당사자들을 지원한다. 즉 가정이라는 ‘장(場·field)’보다는 시어머니나 며느리라는 ‘자격’이 더 중시된다.

일본은 이와 정반대다. 아무리 고부간 갈등이 심각하더라도 집안싸움이 바깥으로 비화되는 법은 없다. 어떤 경우에서든 장(場)이 우선시된다. 장을 파괴하는 것은 자신의 존립기반을 훼손하는 것과 같다.

지난 1992년 알베르빌 동계올림픽 피겨 스케이팅 여자싱글 결승전에서 1, 2위를 다툰 선수는 미국의 크리스티 야마구치와 일본의 이토 미도리였다. 둘다 일본인 핏줄이었다. 그런데도 당시 일본인 관객들은 미국 대표 선수로 나온 크리스티 야마구치를 차갑게 외면했다. 이미 일본이라는 장을 떠났으니 철저히 타인일 뿐이라는 인식이었다.

만일 야마구치가 한국계였다면 한국 관객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2위를 기록한 한국 선수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1등을 따낸 한국계 미국인을 자랑스러워했을 것이다. 다시 말해 한국은 인도처럼 자격을 중시한다. 여기서의 자격은 물론 핏줄이다.

그러나 자격을 중시하는 한국인의 이런 문화인류학적 특징이 최근 수십년간 크게 흔들려 온 감이 있다. 자격이 여전히 중요한 요인이기는 하나 장(場) 역시 그에 못지않게 중요성을 발휘해온 것이다. 특히 정치 분야에서 이런 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그 가장 상징적 예가 정치인 김대중(DJ)과 호남 민심이었다.

DJ는 한국의 현대정치사에서 어느 누구보다 장(場), 즉 ‘지역주의’의 혜택을 입은 정치인이다. 한국사회에서 지역주의가 언제부터 그토록 기승을 부리게 됐는지는 알기 어렵지만 호남 지역주의야말로 DJ에게는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정치적 기반이었다.

지역주의라는 장(場)만이 아니다. 그는 이념이라는 자격의 문제에서조차 남다른 행운을 누린 정치가다. 지역주의가 진보·좌파의 정치적 이념과 중첩되는 바람에 어느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견고한 성(城)을 독차지할 수 있었다.

사실 호남이라는 지역주의가 진보·좌파 이념과 일심동체를 이루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해하기 어려운 수수께끼다. 호남은 한국 현대사에서 보수·우파 정치가 처음 탄생한 곳이기 때문이다.

1945년 건국 직후 호남지역은 한민당의 정치적 근거지였다. 한민당은 잘 알다시피 보수·우파 내지 지주계급을 지지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따라서 호남이 진보 진영으로 인식된다는 것은 영남 특히 대구·경북(TK)이 보수·우파 세력의 근거지로 인식되는 것만큼이나 불합리하고 어울리지 않는 분류법인 셈이다.

아니나다를까, 최근 들어 한국사회의 왜곡된 지역주의가 와해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지난 19일에 있었던 한나라당 대통령선거 후보 선출 과정은 지역주의와 관련해 혁명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즉, 한나라당의 전통적 지지 기반에서 승리한 박근혜 후보가 수도권과 호남에서만 더 많은 표심을 얻은 경쟁 후보인 이명박에게 패배한 사실이다. 이것은 한마디로 유권자들의 영남 지역주의에 대한 해체 명령이나 다름없다.

호남에서도 같은 패턴의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한나라당은 지금 전통적 DJ 세력권인 호남에서 지지도 1위로 떠오르고 있다. 어떤 지역주의도 발붙일 수 없는 수도권을 발신지로 해서 호남에까지 ‘한국사회를 통치하려거든 오로지 자격다운 자격으로만 말하라’는 묵언의 외침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지역주의라는 ‘장(場)’과 이념적 ‘자격’을 양수겸장의 정치적 수단으로 향유해온 ‘DJ정치’도 마침내 종언(終焉)을 맞이하고 있다.

[[이신우 /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