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 편안히 늙기를 기다리리오

1. “이번 겨울엔 늦겨울 추위가 기승을 부렸다. 하지만 추위에 끄달리고 더위에 끄달리면 공부는 언제 하겠는가. 일대사를 마치기 전에는 해제도 없고, 결제도 없다.”

지난 21일 오전 조계총림 송광사 사자루. 3개월간의 동안거를 마치는 해제 법회에서 법어를 위해 법좌에 오른 방장 보성스님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가만히 대중을 내려다 볼 뿐이었다. 긴장한 채 자신을 올려다 보는 선승들의 눈빛에 깨침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음인가. 천천히 법어를 시작한 여든 노스님의 말투는 어눌했으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시퍼렇게 날선 칼날 같았다.

“하루 아침에 얼음이 녹고 물도 마르면 모든 물건이 나를 향해 생사없는 도리를 설해 주리라…, 이를 알겠는가. 알지 못하거든 참구하고 참구하라. 이독치독(以毒治毒), 독은 독으로 다스릴 뿐이다. 야운조사께서도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금생에 마음을 밝히지 못하면 한 방울 물도 빚이 된다고. 무수원자상고지(無首猿子上枯枝·머리없는 원숭이 새끼 마른 나무가지로 올라가는구나)로다. 어~억~.”

법회를 마친 선승들은 오래 머물지 않았다. 바랑 하나 짊어지고 총총히 산문을 나섰다. 구름처럼, 물처럼 떠나는 운수행각.

지난해 늦가을, 이번 동안거 동안이야말로 일대사 해결의 실마리를 잡고야 말겠다며 산문에 들어선 지 3개월만이었다. 그 사이 산사의 나무는 차가운 겨울 바람을 받으며 수없이 울었고, 눈도 몇 차례 내렸다 녹았다. 어느 날은 참선 삼매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몰랐지만 어느 날은 수마(睡魔·악마처럼 달려드는 졸음)와 번뇌 망상에서 벗어나느라 몸부림을 쳤다. 풀리지 않는 화두를 가슴에 안고 조계산을 오르내린 것은 또 몇 차례던가. 알 수 없다, 그렇게 해서 눈과 마음이 밝아졌는지. 풀리지 않는 공안(公案·화두)으로 체증처럼 답답한 가슴이 시원해졌는지.

해제 법회에 앞서 포살(布薩 ·매달 보름과 그믐날, 산내 암자의 모든 스님들이 한 자리에 모여 계를 외우고, 지은 죄를 참회하는 의식)법회가 열렸다. 삼보(三寶)에 예경하는 의식이 끝난 뒤 주지스님이 단위에 올라 계본(戒本)을 읽었다.

“늙고 죽음은 지극히 가깝고 불법은 멸(滅)하려고 하니, 모든 대덕들과 우바새(남자 재가신도)와 우바이(여자 재가신도)들은 도를 얻기 위하여 일심으로 부지런히 정진하라. …어찌 도를 구하지 아니하고 편안히 늙고 병들기를 기다리리오. 이날이 이미 지나감에 따라 목숨도 또한 따라 멸함일지니, 마치 줄어드는 물의 고기와 같거늘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오.”

2. 20년 쯤 전, 지리산 칠불사 선방에 한 스님이 있었다.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결코 말하지 않으리라 서원하고 묵언 수행중인 스님이었다. 그렇게 1년쯤 되던 어느날, 그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자신도 모르게 말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 깨졌구나’절망하며 자책하는데 느낌이 이상했다. 생시가 아닌, 꿈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세월이 좀 더 흐르자 그는 몽중에서도 말을 잊었다. 앉거나 눕거나 깨어 있거나 잠 자거나 살아있는 오직 한 가지는 화두뿐이었다. 그렇게 말을 잊은 채 정진하기를 7년. 입을 연 뒤에도 3년은 해제철, 결제철 없이 가행 정진을 계속했다.

송광사 선원의 유나(선방에서 방장을 보좌하며 수좌들의 수행을 책임지는 스님)를 맡고 있는 현묵(58)스님. 성철, 향곡, 경봉 스님 등 당대의 선지식을 찾으며, 2555일여 묵언하며 수행하던 그가 마침내 깨침을 얻었던가. 그는 이에 대해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30대 초반에 출가 본사를 떠났던 그가 선원의 책임을 맡아 송광사로 돌아온 것은 16년 만이었다고 했다. 스승 구산(1903~1983)스님은 이미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난 뒤였다. 총림의 최고 어른인 방장스님이면서도, 새벽예불과 대중 공양, 정진과 울력을 함께 하며 송광사의 선풍을 드날리던 스님이었다.

구산스님이 열반한 뒤 잠시 흔들리던 송광사의 가풍은 10여년 전 보성스님이 방장으로 추대된 것에 이어 9년 전 현묵스님이 선방을 책임지면서 다시 살아났다. 타락한 고려 불교를 혁신하기 위해 정혜결사(定慧結社)를 벌인 보조국사 지눌스님의 아호(목우자·牧牛子)를 따서 ‘목우가풍’으로 소문난 전통이었다. 16국사를 배출한 승보사찰로서의 면모 또한 새로워졌다.

잠자지 않고 눕지 않는 용맹 정진을 하지 않아도 송광사 선방은 선방의 교과서라 할 만하다. 선방의 일과는 새벽 2시부터 밤 9시까지 어김없이 진행된다. 30명이 함께 한 이번 동안거의 선방 청규는 유나 현묵스님부터 한치의 어긋남이 없이 지켰다. 일신된 수행전통은 행자 교육이나 강원, 율원에도 마찬가지여서 송광사는 스님사관학교로 불린다.

3. 해제를 하루 앞둔 정월 열나흘 밤, 현묵스님과의 차담(茶談) 시간. 속세를 떠난 선방 스님답게 그는 세간의 현안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그러나 삶의 자세에 대해 묻자 그는 준비한듯‘숫타니파타’에 나오는 붓다의 가르침을 노래로 불렀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노래를 끝낸 뒤 그는 덧붙였다. 사자처럼 칭찬이나 비난 소리에 흔들리지 않고, 바람처럼 인연 따라 오고 가는 사람이나 물질 때문에 끄달리지 않으며, 순수한 마음(연꽃)으로 본래의 마음자리를 찾아, 무소처럼 오직 집중된 마음으로, 자신을 가지고 당당하게 나아가시라. 이 게송이야말로 팔만대장경의 가르침을 함축한 것으로, 수행자와 재가자 가릴 것 없이 삶의 거울로 삼을 만하다…. 오랜 묵언을 한 스님답게 세상살이를 하며 넘치는 구업(口業·입으로 짓는 잘못)의 해소에 대해서도 사례를 들어가며 말했다.

“관상에 통달한 한 스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스님이 거울을 보며 통탄했습니다. 왜 이리 박복하게 생겼느냐 하고요. 그 스님이 원을 세웠습니다. 앞으로 3년 동안 어떤 일이 있어도 남의 허물을 입으로 말하지 않으리라. 그렇게 3년이 지난 뒤, 거울을 들여다 보던 스님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렇게 박복하던 상이 복이 넘치는 상으로 바뀌어 있음을 보고요….”

공부가 경지에 이르면 모든 것이 자연스러워지는가. 선문답이 생활화된 수좌답지 않게, 스님의 법담은 어렵지 않았다. 그저 ‘산은 산, 물은 물’이라고 말할 뿐이었다. 재가자도 하루 30분씩 참선을 하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건강해지며 덕이 생긴다는 식으로 쉽게 말했다. 스님과 헤어져 숙소로 내려오는 길은 달빛 하얗게 빛나는 밤길이었다. 달빛이 만든 대나무숲 그림자가 쉼없이 밤길을 쓸어도 길에는 먼지 하나 일지 않았다.

김종락기자jrkim@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