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사진=심만수기자
남들이 택하지 않은 길을 가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이렇게 볼 때 노동계를 대표하는 양대 조직 중 하나인 한국노총 수장의 최근 행보는 지금까지 보여준 노동조합에 대한 선입관을 송두리째 바꿔버릴 정도로 파격적이다. 근로자의 날(노동절)을 하루 앞둔 지난달 30일 오전 서울 여의도 한국노총 사무실에서 장석춘(51) 한국노총 위원장을 만났다. 장위원장은 정장 차림이 어색한지 넥타이를 어루만지며 몹시 신경이 쓰이는 눈치였다.
장위원장은 “평소 정장을 잘 안 하는데 오늘 청와대에서 열리는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등 행사에 참석하느라 억지로 맸다”며 웃어보였다. 이날 하루에만 정부가 주최하는 근로자의 날 포상식과 전국 사회복지 자원봉사대회 등 스케줄이 빼곡히 차있다는 장 위원장은 마치 기업의 최고경영자(CEO)를 연상시키듯 분주한 모습이었다. 최근 국내외에 화제가 된 대통령 순방 동행으로 말문을 열었다.
―장 위원장은 노동계 수장으로는 처음으로 이명박 대통령의 미국, 일본 순방에 공식 수행원 자격으로 참석했습니다. 외국기업들이 한국 노사관계에 매우 왜곡된 인식을 갖고 있다고 하셨는데 어떤 인상을 받으셨는지요.
“미국과 일본 기업인들의 한국 노동운동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예상보다 훨씬 강하더군요. 우리 언론이 제공하는 뉴스나 외신화면에 나오는 폭력시위 장면과 일부 기업의 사례를 전체 노동운동이 그런 것으로 선입관을 가진 사람들이 예상외로 많다는 데에 무척 놀랐습니다. 그런데 제가 대통령과 같이 와서 한국에 투자해달라고 했더니 ‘한국의 노동계 대표가 이런 데에 올 리가 없다’면서 깜짝 놀라는 모습이었습니다. 일본의 한 정치인은 ‘몹시 충격을 받았다’고 얘기했습니다. 양질의 일자리를 위해 투자를 유치하고 노사관계의 변화를 역설한 제 모습이 한국에 대한 투자여건을 개선하는 등 긍정적 이미지로 작용했으면 하고 바랍니다.”
―선진국의 노사관계를 통해 배운 점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선진국들도 한때는 다 우리와 비슷한 시절을 경험했습니다. 미국도 총탄에 맞서 죽음을 불사하고 파업투쟁을 했던 시절이 있었고, 일본도 전투적 노동운동이 맹위를 떨쳤던 적이 있습니다. 선진국들은 그 시절로 돌아갈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는 생각이 노·사·정 모두에게 분명하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LG전자 근무 시절 노조위원장 시절 LG-필립스 합작을 통해 유럽 노사관계도 제법 알게 됐습니다. 기업의 이익과 사회정의를 자본주의 시장경제 속에서 동시에 달성하기 위해서는 이제 우리도 선진국처럼 영악할 정도로 합리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노사관계 선진화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 노동계가 어떻게 달라져야 할까요.
“군사문화나 폭력적인 위계질서가 공장을 지배하던 시절에 대한 반작용이 폭발돼 나온 것이 87년 이후의 전투적이고 비타협적인 노동운동입니다. 머리띠 동여매고 확성기 볼륨을 최대한 높이고 죽으라고 달려들고 저항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시대가 달라졌습니다. 선진 노사관계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서로에 대한 신뢰가 전제돼야 합니다. 대부분의 사업장에서는 상생의 노사관계로 가고 있는데 오히려 중앙 조직에서 일부 단위사업장의 노사갈등을 부풀리고 전국단위 투쟁으로 키우려는 구태가 남아있습니다. 이것은 80~90년대 상황에서 필요하고 가능했던 일이지요. 지금은 시대가 변한 만큼 극단적인 노조, 극단적인 사용자의 모습을 강요하는 문화와 관성에서 탈피해야 합니다.”
―한나라당과의 정책연대를 신뢰할 만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민주노총은 “한국노총이 노동조합이기를 포기했다”고까지 비판했습니다. 장 위원장은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정책연대는 언제든지 깨질 수도 있다”고 말씀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장 위원장이 생각하는 한계는 어디까지입니까.
“저는 노동조합이 무엇인지 반문하고 싶습니다. 혹시 민주노총은 노동조합을 대중 조직이 아닌 이념 조직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한국노총은 대중 조직으로서 조합원 총투표를 통해 한나라당과의 정책연대를 체결한 것입니다. 위원장인 저는 조합원의 뜻에 따라 한나라당과 맺은 정책협약이 실현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할 뿐입니다. 조합원 대중과 자꾸 유리되는 것이 오히려 노조이기를 포기하는 길입니다. 정책연대가 깨질 수 있다고 발언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지도부 몇몇이 특정한 정치적 입장을 갖고 노총을 움직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조합원 다수가 한나라당이나 이 정권과 도저히 같이 갈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정책연대는 깨질 수밖에 없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그런 얘기를 시도 때도 없이 떠들면 지도자라고 할 수 없겠지요.”
―투쟁을 해야 할 땐 할 수도 있다고 하셨는데, 이는 정부가 강조하는 ‘법과 원칙’ 안에서의 투쟁을 뜻하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한국노총은 2년 전부터 평화집회와 시위를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한국노총의 평화집회는 우리가 주장하는 내용을 가장 효과적으로 알리기 위해 국민들의 동의를 얻는 투쟁의 방식으로 선택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정부가 강조하는 ‘법과 원칙’과 결부시키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노사관계를 ‘법과 원칙’만으로 풀어가려고 하면 오히려 더 큰 반발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한국노총이 투쟁할 때 투쟁한다는 것은 정부나 사용자가 법과 원칙만 내세우면서 대화와 타협을 거부할 때 선택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해외에서 “한국노총에 가입한 노조 가운데 노사분규가 발생하는 곳은 전체의 1.9%에 불과할 정도로 노사관계가 안정돼 가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노사관계 선진화 입법(노사관계 로드맵) 처리과정에서 보듯 첨예한 갈등을 일단 피하기는 했지만 충돌 가능성은 언제든지 잠복해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요.
“안정된 노사관계라는 것은 긴장과 갈등을 풀어나가는 해법이 물리력이 아닌 대화와 협상을 통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올해도 비정규직법 후속대책, 공공부문 구조조정, 복수노조와 전임자 임금지급 등 노·사·정 사이에 풀어야 할 첨예한 문제가 산적해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피한다고 풀리는 것이 아닌 만큼 노·사·정이 머리를 맞대고 최선의 대안을 만들어 풀어가야 합니다.”
―공공부문 구조조정에 대해 “정부가 일방적으로 몰고 가서는 안 된다”며 노·사·정 대화를 강조해왔는데, 노사정위원회에 민주노총은 빠져 있습니다. 이용득 전 위원장이 노사정위원회 산하 비정규직후속대책위원회와 별도로 민주노총과 비정규직 실태조사 특별위원회를 만들기로 합의했는데, 공공부문 구조조정에 대해서도 민주노총과 협력할 계획이 있습니까.
“공공부문은 일방적 구조조정과 무리한 민영화추진 등 시장 만능주의가 아니라 국민 전체의 삶의 질을 더욱 윤택하게 하는 기본 인프라 구축, 즉 사회공공성의 확대 강화에 초점을 맞추어 추진해야 합니다. 민주노총과의 협력 가능성은 열려 있고 민주노총이 사회적 대화를 통한 문제해결에 나선다면 언제든 함께 할 수 있습니다.”
―노동부는 올해 정기국회에 복수노조 허용과 노조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 관련 세부안을 제출할 예정입니다. 법이 통과된다면 기존 노동운동 방식에 엄청난 변화가 예상되는데요.
“그렇기 때문에 복수노조와 전임자 임금지급 문제 관련 법안이 어떤 내용으로 통과되느냐가 중요합니다. 세계적으로 전임자 임금 지급을 법으로 금지하고 처벌하는 나라는 없습니다. 오히려 다양한 방법으로 노조 대표나 종업원 대표의 유급활동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한국노총은 전임자 임금 지급 문제가 법률로 규제할 대상이 아니라 노사 자율에 따라 결정돼야 한다는 국제노동기구(ILO)의 원칙을 반드시 관철할 것입니다.”
정충신기자 csjung@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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