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바람둥이 ‘진짜 사랑’을 하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사진 = 김선규기자 ufokim@munhwa.com

다음달 2일 개봉하는 영화 ‘모던보이’(감독 정지우)에 등장하는 1930년대 경성 청춘들의 패션과 스타일, 유행 감각은 오늘날 서울 강남에서 살고 있는 청춘들이 봐도 매력적이다. 아니 재수가 없어 나가는 곳마다 족족 망한다는 점괘를 떠벌리며 자신이 총독부에서 일하는 게 조국의 독립에 일조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모던보이 이해명(박해일)의 모습은 의식 면에서도 별다른 고민없이 인생을 즐기려고 하는 현대 청춘의 군상들과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파격적인 웨이브 헤어스타일에다 파스텔색 양복과 롤렉스 프린스 시계, 중절모로 치장한 이해명은 ‘낭만의 화신’이라 자부하며 즐겁고 행복한 삶만을 추구한다. 상류 1%에 속하는 부유층이자 조선총독부 1급 서기관인 그에게서 식민강점기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요구되던 이른바 ‘역사의식’이란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사랑한 여인 조난실(김혜수)이 갑자기 사라지고 그녀의 뒤를 쫓는 과정에서 “나라 없이 살아도 그녀 없인 살 수 없다”던 이해명은 엄청난 운명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들게 된다.

배우 박해일(사진)이 뻔뻔하고 유치찬란한 바람둥이에서 사랑을 위해 시대와 맞서는 것도 불사하는 이해명으로 돌아왔다. 지난 23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배우 박해일은 자신이 연기한 해명이 매우 다이내믹하고 인간적인 캐릭터라고 밝혔다. 연쇄살인용의자(‘살인의 추억’)에서 순박한 제주도 우체부(‘인어공주’), 작업에 능한 영어교사(‘연애의 목적’), 까칠한 성격의 고학력 백수(‘괴물’), 마을의 살인사건을 추리하는 의사(‘극락도 살인사건’)에 이르기까지 변신을 거듭해온 그였지만 정작 그동안 맡았던 배역들이 스릴러나 멜로 등 한 가지 기운을 많이 풍기는 캐릭터였던 것에 비해, 해명은 자신의 모든 측면을 다 끄집어내 보여야 했다는 것.

‘모던보이’는 중일전쟁이 시작되는 1937년 경성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단짝친구이자 일본인 검사인 신스케(김남길)와 함께 놀러간 비밀구락부에서 댄서로 등장한 여인 조난실에게 첫눈에 매혹된 해명은 온갖 방법을 동원한 끝에 그녀와 꿈같은 연애를 시작한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 난실이 싸준 도시락이 총독부에서 폭발하고, 그녀는 해명의 집을 털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만다.

이때부터 이름도 여럿, 직업도 여럿, 남자마저도 여럿인 정체가 묘연한 여인 난실에 대한 해명의 추적이 시작된다. “해명이란 캐릭터에 충실하면서도 영화 속 볼거리인 해명과 난실의 관계를 설득력 있게 표현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이 박해일의 고백이다. 해명이 난실의 매혹에 이끌려 그녀에게 다가가거나 진창에 빠지는 등 온갖 어려움을 겪으면서 그녀를 계속 쫓아가는 상황 하나하나가 밀도있게 설명되지 못하면 영화가 중단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모던보이’는 작가 이지민이 지난 2000년 발표한 장편소설 ‘망하거나 죽지 않고 살 수 있겠니’(문학동네)를 토대로 만들어졌다. 1930년대를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본 원작 소설은 식민시대의 ‘거룩한’ 투쟁 대신, 당시를 매우 특이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독특한 두 남녀, 해명과 난실에 초점을 맞췄다. 그러나 정작 정지우 감독이 시나리오 작업을 한 영화에선 원작과 다른 엔딩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관련, 박해일은 “기존의 영화 맥락과는 다른 원작의 내용대로 할 것인가, 또다른 진부한 독립운동 이야기를 만들 것인가 하는 ‘양날의 칼’ 사이에서 감독님의 고민이 컸던 것 같다”고 말했다.

1936년 개봉된 한국영화의 고전인 ‘미몽’을 보면서 연기는 물론, 당시 시대의 면면을 파악하는 데 도움을 받았다고 밝힌 박해일은 ‘모던보이’의 주인공이 경성이나 근대 자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은 그 친구와 재미있게 놀아보자는 심정으로 일했다고 한다.

“수입차가 굴러다니는 시대적 배경이나 영화 ‘미몽’에서 오래된 영화라기보다는 사실적인 느낌을 받으면서 현재 자신이 보고 느끼고 있는 기운들을 그대로 가져가도 되겠다고 생각했다”는 것. 사실 5~6개월의 촬영을 끝마친 뒤 1년 여의 컴퓨터 그래픽(CG) 작업을 통해 재현한 1930년대 경성의 생생한 모습이나 분위기는 현대 서울의 그것과 언제든지 대치될 수 있다.

어떤 배우가 되고 싶으냐는 질문에 박해일은 “구체적인 디자인 없이 한 작품 한 작품 해나가면서 벽돌 하나씩을 쌓아 자신의 스타일을 만들어가고 있는 기분”이라며 “사람 살아가는 모습이 많이 담겨있는 영화, 재미있으면서도 허황되지 않고 현실에 발붙이고 있는 작품에 출연하는 배우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앞으로 기회가 되면 사냥 등 총을 다룬 영화나 기자 역할을 해보고 싶다는 희망도 밝혔다.

글 = 최영창기자 ycchoi@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