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입니다>“俳優면서 정치쪽에 서 있으려는 사람들 난 싫어”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사진 = 김선규기자 ufokim@munhwa.com

‘명예의 전당’ 입성 원로 배우 김지미

그는 레드 카펫에서 여신(女神)이었다. 한껏 꾸민 젊은 여배우들의 반짝거림 속에서도 그의 자태는 단연 돋보였다. 7일 오후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에 참석한 만 70세 노배우 김지미씨의 아우라는 세월을 무색게 했다. 영화제 집행위원인 후배 연기자 강수연씨와 함께 행사장 맨 앞자리에 앉은 그는 대형 화면이 자신의 모습을 비출 때마다 만면에 환한 웃음을 띠며 팬들에게 화답했다. 그의 바로 뒷자리엔 신영균, 신성일, 남궁원, 윤정희씨 등 그와 더불어 한 시대를 풍미한 원로 배우들이 앉아 아시아최고영화제로 성장한 이 축제의 개막식을 지켜보고 있었다.

개막식이 끝난 오후 8시, 김씨를 그가 묵고 있는 한 호텔의 커피숍에서 만났을 때 “예쁘다”는 찬사가 절로 나왔다. 노 여배우는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 하면서도 흐뭇한 미소를 애써 감추지 않았다. 배우 데뷔 53년째인 그는 올해 부산영화제 회고전의 주인공이다. 이 때문에 현재 살고 있는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서 지난 7월 일찌감치 귀국했다. 그는 이번 영화제에 영화인으로서 마지막 열정을 쏟는 듯이 보였다.

영광도 겹쳐 오는 것인지, 김씨는 오는 20일 영화인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다. 2006년 고 신상옥(‘위대한 영화인’), 고 유현목(‘위대한 감독’), 2007년 황정순(‘위대한 여배우’)씨에 이어 네 번째다. ‘화려한 여배우’라는 타이틀로 경기 남양주시 영화종합촬영소에 김씨의 동상이 세워진다. 그가 출연한 영화 관련 자료와 관련 물품 등도 전시된다.

정진우(감독) 한국영화복지재단 이사장으로부터 이 소식을 들었던 지난 6일 김씨에게 밤늦게 축하 전화를 했다. 그는 “영화계에 훌륭한 분들이 많은데 제가 선정이 됐다니 처음엔 당혹스러웠다”면서도 “은퇴 해프닝 한 번 없이 오로지 영화 외길을 걸어온 공적을 인정해주신 것”이라고 담담히 말했다. 김씨는 영화인들이 지난 세기말부터 정치권력의 이념 싸움에 연루돼 갈등을 겪고 있는 것을 염두에 둔 듯 “배우는 시대의 흐름과 상관없이 좋은 연기, 좋은 작품을 창조하는 데만 전력을 다해야 한다”고 뼈있는 말을 했다. “배우는 정치를 한다고 해도 결국은 배우로 끝나는 것이지요. 정치 쪽으로 간 연기자들이 결국은 다 돌아오더군요.”

7일 김씨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부산영화제에서 만나자고 했다. 그는 “이번 영화제에선 공식 행사 참석 이외에 언론과의 인터뷰는 절대 하지 않겠다”고 극구 사양했다. 우여곡절 끝에 막상 마주 앉게 되자, 그는 특유의 활달한 어투로 거침없이 말을 쏟아냈다.

―외국에 살다가 국내에서 열리는 국제영화제에 와 보니 어떤 느낌인가.

“너무 즐겁고 좋다. 영화인들의 축제니까 부산영화제엔 자주 온 편이다. 하지만 회고전으론 처음 오는 것이어서 감회가 새롭다. 국제영화제라는 큰 잔치에서 내 회고전은 작은 행사 아니냐. 그래서 묻힐까 봐 솔직히 걱정했다. 주최 측과 그런 문제를 잘 논의해서 행사가 잘 치러질 수 있도록 조율하고 잘 해결했다.”

그는 한국 영화를 대표하는 배우로서, 또 회고전의 주인공으로서 부산영화제에 큰 책임을 느끼고 있었다. 개막식이 끝난 직후, 그는 잔칫집의 주인장처럼 안상수 한나라당 대표,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진동섭 청와대 교육과학문화수석 등 참석 인사들을 찾아가 일일이 악수를 청하며 감사를 표했다.

―김동호 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이 회고전을 간곡히 요청했다는 게 맞느냐.

“김 위원장이 (올해 영화제를 끝으로) 물러나지 않느냐. 내가 영화인협회 이사장 등을 할 때 (당시 정부 관료이던) 김 위원장이 많이 도와줬다. 부산영화제를 만들기 전에 해외 영화제를 함께 다니면서 국제영화제를 구상했다. 그분의 노력으로 부산영화제가 이렇게 자리를 잡았다. 김 위원장이 그만두기 전에 내 회고전을 꼭 한 번 챙겨주고 싶다고 했다.”

김 위원장은 영화계에서 좌파 쪽과 가까워서 현 정부로부터 퇴진 압력을 받는다는 구설에 시달려왔다. 그런 김 위원장이 영화계 일각 반대진영으로부터 구세대 우파 세력의 거두라는 비판까지 받았던 김씨와 동지적 관계에 있다는 것이 무척 흥미로웠다.

―대부분의 영화인들이 김 위원장의 능력과 인품을 신뢰하지만, 일부는 그가 한쪽 입장에 서 있다는 의심을 해왔다.

“(얼굴이 다소 굳어지며) 이념 이야기냐. 김 위원장은 좌도 우도 아닌 사람이다. 이쪽도, 저쪽도 아니다. 나도 그런 것에 관심이 없다. 한 번도 정치적 입장을 가진 적이 없다. 배우이면서도 정치 쪽에 서 있으려는 사람들을 나는 싫어한다.”

―영화인협회 등에서 일할 때 반대쪽에 서 있던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냐.

(그가 1995년부터 이끌었던 영화인협회는 당시 진보 정권과 가까웠던 젊은 영화인인 명계남·문성근씨 등이 98년에 만든 충무로포럼과 대립각을 세웠다.)

“배우가 정치색을 띠면 안 된다. 오로지 좋은 연기자가 되는 데 전력을 다해야 한다. 나는 50여년 배우 생활을 하며 이렇게 박수를 받지만, 그때 설쳤던 ‘아이’들은 생명이 끝났지 않았느냐. 배우가 반쪽 짜리 박수를 받아선 안 된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을뿐더러 그런 상식을 갖고 배우 노릇을 한다면 인정해줄 수 없다.”

―과거에 갈등 관계였던 영화계 후배들을 최근에 만나본 적이 있느냐.

“걔네들이 아직 활동하는가. 여기(부산영화제)선 얼굴을 못 봤다. 보게 되면, 잘하라고 등을 두드려줄 것이다. 격려하고 싶다.”

―회고전 끝나면 다시 LA로 돌아간다고 들었다. 거기 간 지 몇 년 됐는가. 이제 고국으로 돌아올 생각 없는가.

“숫자 개념이 없어서 잘 모르겠는데 7∼8년쯤 됐다. 앞으로도 계속 LA에 살 것이다. 형제가 거기에 4명이 있고, 딸 둘(홍경임, 최영숙), 그리고 손자가 6명이다.(이 대목에서 그는 함박웃음을 머금었다.) 거기서 가족들과 함께 외부 신경 쓰지 않고 조용하게 사니까 참 좋다.”

평생 세간의 갈채를 받고 살았던 그가 세인의 이목을 피하고 싶다는 소망을 절실히 드러내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다. 하지만 4명의 남자와 살다가 헤어지면서 무수히 입방아에 오르내렸던 여성으로서는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김씨는 18세 때 12세 연상의 홍성기 감독과 결혼, 영화 출연료를 남편의 제작비로 대주며 헌신했으나 4년 만에 헤어졌다. 1963년 기혼남자인 최무룡씨와 결합했을 때 비난 여론이 거셌으나 최씨의 전처에게 위자료를 직접 챙겨주고 사랑을 얻은 김씨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69년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최씨의 유명한 말을 남기고 두 사람은 결별했다. 김씨는 76년 당시 최고 인기가수였던 7세 연하의 나훈아씨와 열애 사실을 발표하며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으나, 두 사람이 함께 산 기간은 7년을 넘기지 못했다. 그가 1991년 심장전문의인 이종구 박사와 네 번째 결혼을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영구 정착’이라고 생각했으나 예상은 또 빗나갔다.)

―(여러 번 결혼한 미모의 여배우라는 점에서) 한국의 엘리자베스 테일러라고 불렸다. 그 별명이 싫다고 했는데.

“나는 나다. 자꾸 비교하는 것은 싫다.”

―‘남자는 항상 부족하고 불안한 존재’라고 어디에선가 말했던데.

“모성애에서 나온 표현이다. 한국의 여자들에게 남편에 대해서 만족하느냐고 물으면 늘 부족하다고 할 것이다. 100% 만족할 사람이 있겠느냐. 여성들은 모성 본능이란 게 있어서 부족한 남자들을 감싸주고 싶어한다. 여자는 그런 존재인데…. ”(이 말을 하는 그에게서 어쩔 수 없이 그늘이 비쳤다. 저녁도 먹지 못하고 인터뷰에 응한 노 여배우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어 화제를 바꿨다.)

―데뷔 후 출연한 영화 편수에 대한 기록이 글마다 다르더라. 700여편이냐, 800여편이냐.

“700편은 훨씬 넘었을 것이다.”

―출연한 영화 중에….(김씨가 말을 끊으며 “어떤 작품이 가장 좋냐고 물어보려는 것이냐”고 하기에 “그렇게 아마추어처럼 묻지 않는다”고 농담으로 답한 뒤에 말을 이었다.) 대표작 8개를 골라 이번 회고전에서 상영한다. 그중에 이 시대의 관객에게도 꼭 보라고 권하고 싶은 작품은.

“영화는 사회를 반영하는 거울이고 시청각 교재다. 우리 역사와 현실이 좋은 소재다. 한국 사회는 격변했고 정치적으로 혼란이 거듭됐다. 그것이 한국 영화의 바탕이고 힘이기에 이렇게 세계적으로 각광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 질문을 상기한 듯 잠시 쉬었다가) 한국전쟁의 비극을 뼈아프게 되새긴 작품이 ‘길소뜸’이다. 그리고 88올림픽을 앞두고 사회가 불안정하고 정돈이 안 된 상황을 반영한 작품이 ‘티켓’이다.”

―‘티켓’은 제작과 주연을 겸한 작품 아니냐. 연출자인 임권택 감독이 최근에 다시 보고 스스로 놀랄 만큼 완벽한 작품이라고 하던데.

“사회고발 영화다. 검열에 걸려서 공연윤리위원회와 싸우기도 했다. 당시 전국적으로 성매매가 성행한다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됐다. 시골에 가서 보니 다방에서 티켓을 끊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였다.”

―1992년작 ‘명자, 아끼꼬, 소냐’에도 애정이 있을 듯 싶은데….(김씨가 20대부터 60대까지 연기한 이 작품에 대해 일부 평론가는 “참사”라고 표현했으나 그는 일관되게 자부심을 피력해왔다.)

“1922년인가, 23년인가 (일제의) 강제 징용이 시작되지 않았느냐. 힘이 없어서 나라를 뺏긴 것이다. 정치하는 사람들에게 똑바로 하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미국에 살며 한국을 바라보면 요즘 우리 정치인들이 잘하고 있는가.

“정치에 대해서는 내가 이야기할 수 없다. 다만 이번에 와서 보고 한국이 너무 달라졌다는 생각을 했다. 이번에 아이들이랑 강원도로, 충청도로, 제주도로 쭉 돌아봤는데, 시골의 구석구석이 참 깨끗해졌더라. 국민 의식이 높아진 것이다.”

부산 = 장재선 문화부 차장 jeijei@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