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의 한반도, 내전과 정치테러의 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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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냉전 / 권헌익 지음, 이한중 옮김 / 민음사

인류학자로 1990년대 중반 베트남을 현장조사한 저자(51·영국 케임브리지대 트리니티칼리지 석좌교수)는 형제 간의 비극에 대한 일화를 많이 들었다. 대부분 형은 혁명군 편에 가담한 반면, 동생은 미국과 동맹관계인 남베트남 정부에 끌려간 이야기였다. 결국 둘 다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는데, 그나마 동생은 세월이 흘러도 추모 행위(제사)를 통해 돌아올 수 없었다. 그런데 저자가 1996년 다낭 남부에 있는 한 집을 찾았을 때 조상을 모시는 제단에 서로 다른 길을 걸은 두 청년의 영정이 놓여있는 것을 발견했다. 두 전사자를 제단에 한데 모시기로 결정한 어머니는 친지와 가족들을 초청한 뒤 손주들에게 두 삼촌을 돌봐주고 공경해 줄 것을 당부했다.

베트남전쟁과 제주 4·3사건의 상흔이 남아있는 베트남 중부 마을과 제주도 하귀리 마을 등을 현장조사한 저자는 지난 2010년 컬럼비아대 출판부에서 펴낸 책에서 서구에서는 미국과 옛 소련의 대립 속에서도 평화가 오래 지속된 시기로 기억되는 냉전시대가 한국과 베트남 등 아시아와 아프리카, 남미 등 주변부 국가들에선 내전 또는 국제전 등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폭력과 파괴의 시대였음을 역설한다.

번역본 출간을 맞아 2013년도 1학기 서울대 인류학과 초빙교수로 와 있는 저자를 지난 18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 강남출판문화센터에서 만났다. 그는 “냉전의 역사가 다양하고 복잡하다는 사실을 서구 사람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한 목적에서 쓴 책”이라며 “한국학의 미래를 염두에 두고 쓴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 현대사의 특수한 상황들을 개념화·보편화시킨 점에서 의미가 적지 않다고 본다”고 밝혔다. “한국은 여러가지 모순이 중첩됐다는 점에서 냉전을 가장 모범적으로 겪은 나라라고 할 수 있지요. 폭력도 그렇고 거기서 파생된 경제발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극히 예외적인 것만도 아니어서 일종의 대표성이 있기 때문에 다른 나라들과 비교연구하면 흥미로운 내용이 많을 것 같아요.”

책에도 나오지만 1955년 12월 미국의 여론조사 회사 갤럽이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냉전의 의미에 대한 여론조사는 서구의 냉전관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당시 조사원들은 냉전의 의미에 대한 다양한 반응 가운데 ‘말로 하는 전쟁, 열전(熱戰)이 아닌 것, 외교전, 무혈 전쟁’ 등을 정답으로 분류했다. 반면 ‘한국에서처럼 많은 청년들이 죽어 가고 있는 뜨거운 전쟁, 군복무 중인 내 형제들의 모습, 모두가 전쟁 중인 곳, 내전’ 등은 오답으로 간주했다. 하지만 콜롬비아의 작가인 가브리엘 마르케스가 라틴아메리카 대륙이 이른바 냉전기간 동안 대량살상으로부터 “한 순간의 휴식도 갖지 못했다”라고 말한데서 볼 수 있듯, 글로벌 냉전이 상상의 전쟁인 동시에 정치테러와 대량살상, 실제 전쟁이 일반화된 경험이었음을 저자는 강조한다.

인류학의 참여관찰법을 이용해 사회주의와 냉전 등을 비교연구해온 저자는 2006년 출간한 ‘학살, 그 이후’로 기어츠상, 2008년 ‘베트남전쟁의 영혼’으로 카힌상 등 인류학계의 굵직한 상을 받았다. 냉전시대 베트남과 한국 연구로 방향을 돌리기 전까지는 옛 소련 등 공산주의 국가들을 실증적으로 연구했다.

원래 1981년 서울대 철학과에 입학했던 저자는 북한 등 사회주의 국가 사람들이 어떤 제도를 갖고 어떻게 살고 있을까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서울대를 중퇴하고 미국 미시간대로 유학가 정치학을 공부했으나 만족하지 못하고 인류학 저작을 읽다가 방법론에 관심을 가지게 돼 케임브리지대로 진학, 인류학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2개월 전 옛 소련에 들어가 14개월 동안 실증연구를 하며 동구권이 와해되는 과정을 지켜본 저자는 “자신을 포함해 1988년부터 1990년까지 옛 소련에 연구하러 간 연구자들이 러시아 사회주의 사회를 인류학적 방법으로 연구한 1세대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1993년 박사학위를 받고 영국 맨체스터대 교수로 부임했을 때 냉전 종식이 당시 유럽 학계의 큰 주제였기 때문에 이에 대한 관심을 자연히 갖게 된 그는 최근에는 세계 각지의 연구자들과 함께 한국전쟁 연구에도 매진하고 있다.

“일본은 냉전체제를 가장 유럽풍으로 겪은 나라이고 한반도는 냉전을 비유럽적으로 경험한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중국은 국공내전을 빼면 유럽 방식으로 겪긴 했지만 우리와는 다른 차원의 냉전인 중소분쟁을 경험했어요. 동아시아 냉전의 서로 다른 차원을 부각시키는 연구도 구상 중입니다.”

최영창 기자 ycchoi@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