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자본주의는 어떻게 뿌리내렸나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근대 한국의 자본가들 / 오미일 지음 / 푸른역사

한반도에 자본주의가 정착된 과정을 둘러싸고 여러 가지 학설이 난무한다. 그중에서도 구한말 자본주의의 맹아가 이미 싹텄으며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발전해왔다는 ‘내재적 발전론’과 일본의 영향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식민지근대화론’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이 책은 그 같은 사관(史觀)과는 다소 거리를 둔다. 저자는 보다 구체적으로, 이 땅에 공장과 기업을 설립하고 운영한 근대 자본가들의 경제적 실천과 사회·정치적 행동을 분석한다. 그럼으로써 초기 한국 자본주의의 성격을 규명하려 시도한다.

다시 말해, 이 책은 한반도 근대의 다양한 자본가 군상을 그들의 사회적 신분이나 배경, 자본 축적 토대와 경로 등 몇 가지 기준에 따라 분류해 각 유형의 대표적인 자본가들을 분석하고 있다. 저자가 분류한 근대 자본가 유형은 크게 세 가지다. 우선, 관료 출신으로 기업 설립에 참가한 유형. 구한말 고위 관료 출신은 권력을 빙자한 수탈에 의해 자산을 집적한 이들로서, 관직 진출이 불가능해지는 1907년 이후 새로운 활로를 찾기 위해 기업 활동에 나서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두 번째로, 상업 활동과 무역업을 통해 축적한 자본으로 기업에 투자한 상인층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대한제국 정부의 관용물품 용달업이나 수세청부업, 관영사업을 통해 성장한 어용상인과 시전상인, 전국 혹은 지역 연안 상업 유통망을 이용한 객주·선상, 그리고 기타 소상인 출신으로 분류된다. 세 번째로는 직포·금은세공·도자기·한지(韓紙) 제조 등 재래업종에 종사한 수공업자 혹은 기술자로서 소규모 제조업체를 경영하며 근대 기업가로 성장한 유형이다.

우선, 첫 번째 유형의 대표적인 예로 민영휘 일가를 들 수 있다. 민영휘는 ‘반도 유일의 부호’라 불릴 정도로 일제 초에 상당한 부를 축적하고 있었다. 그의 재산은 구한말 평안도 관찰사, 선혜청 당상 등 봉건 권력을 기반으로 백성들의 재산을 수탈함으로써 이뤄진 것이었다.

민영휘의 자산을 상속받아 운영한 이는 2남 민대식과 3남 민규식. 특히 이재에 밝았던 민대식은 1920년 이후 한일은행장으로 활동하면서 재계의 거물로 부상했다. 민규식은 국민총력조선연맹, 흥아보국단, 조선임전보국단 등 총독부가 조선인의 전쟁 동원을 위해 조직한 단체의 임원으로 활동했다. 일제 지배에 대한 적극적인 협력은 경제적 특혜의 수혜로 이어졌다.

두 번째 유형의 인물로는 백남신·백인기 부자를 꼽을 수 있다. 관부물자 조달 등으로 자본을 축적한 백 씨 부자는 특히 기업 이윤보다 미간지 불하에 의한 초과 이윤과 지대 수익으로 자본을 크게 늘린 것이 특징이다. 이는 산미증식을 목표로 미간지 개척, 토지 및 농사 개량에 중점을 두었던 일제 산업정책에 적극 부응했음을 의미한다.

금은세공업자에서 화신백화점 창업주로 성공한 신태화는 세 번째 유형의 대표적 인물. 구한말∼1920년대 격변의 경제상황 속에서 금은세공업계의 ‘패왕’으로 불린 신태화는 신행상회를 남대문통에 설립, 경영하다 백화점의 대명사로 불린 화신상회를 창립했다. 직공으로 출발해 자본을 모아 소공업체를 운영하다가 마침내 공장을 설립·경영한 그는 자본 축적의 새로운 양상과 경로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한마디로, 이 책은 근대 한국의 자본가 계보를 통해 초기 한국 자본주의의 특징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주고 있다.

김영번 기자 zerokim@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