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원, 권력 앞에선 暴君백성 앞에선 聖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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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의 길, 이성계와 이방원 / 이덕일 지음 / 옥당

“사극이라면 사실에 입각해야 한다. 시청률이 높다고 해서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는 사극이 판치는 것은 문제가 있다.”

KBS 드라마 ‘정도전’ 출연진은 방송 전 제작 발표회에서 이렇게 일갈했다. 자신들의 작품이 정통 사극임을 강조하기 위한 홍보용 발언이었으나, 허구와 사실을 버무리는 팩션 사극이 횡행하고 있는 탓에 식자들의 공감을 꽤 얻었다.

“그 사람이 어디 사학자냐, 팩션 작가일 뿐이지.”

‘정통’을 자처하는 일부 사학자들은 역사 저술가로 이름이 높은 이덕일(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씨에 대해 이렇게 비꼰다. 이른바 실증(實證)을 중시하는 이들에게 이 씨의 저술 작업은 마뜩잖을 수 있다. 사료 등에 나타난 사실을 그대로 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해석을 붙이거나 사료가 왜곡됐을 가능성을 제기한다는 점에서 그는 여느 연구자와 다르다. 또 대중 역사서를 쓴다는 명분으로 워낙 다작을 하기 때문에 ‘날림’의 우려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의 책이 나올 때마다 주목하게 되는 것은 역사 이야기를 통해 ‘오늘 여기’에 죽비 소리 같은 메시지를 던지고 있어서다. 그가 스토리텔링을 강조하는 까닭에 이야기 속에서 갈등을 극대화하고, 아직 확인되지 않는 역사의 빈 공간에 대해 지나친 상상을 한다는 지적은 옳다. 하지만 그의 작업은 팩션 사극과는 내용 측면에서 완전히 다르다. 역사를 왜곡하거나, 없었던 일을 있는 것처럼 꾸미지 않기 때문이다.

이번에 나온 ‘부자의 길, 이성계와 이방원’은 이덕일의 역사특강 두 번째 책이다. 첫 번째 책 ‘정도전과 그의 시대’에 이은 것이다. 서점가의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첫 번째 책은 KBS 사극 ‘정도전’ 팀에게 강연한 내용을 중심으로, 조선 개국의 으뜸 공신이었던 정도전의 삶과 이상을 다뤘다.

이번 책은 조선을 건국한 혁명 동지이자 부자 지간인 이성계와 이방원의 관계를 집중 탐색하고 있다. 조선 건국을 전후한 당시 상황은 큰 인기를 끌었던 TV 사극 ‘용의 눈물’(1996∼1998) 등을 통해 꽤 알려져 있는 편이다. 그래서인지 책의 내용이 친근하게 다가온다.

저자 이덕일은 조선 건국의 세 영웅인 이성계와 이방원, 정도전의 역사적 관계를 결정짓는 날로 1398년(태조 7년) 8월 26일을 꼽는다. 바로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난 날이다. 이방원은 이날 이복동생인 세자 방석과 방번, 그리고 경순공주의 남편인 이제를 죽이고, 정도전과 남은 등 자신의 반대쪽에 서 있는 공신들을 제거한다. 이로써 자신이 그토록 인정받고 싶어했던 아버지 이성계와 평생 적대하는 관계가 된다. 사실상 정치적 라이벌이 된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이성계가 정도전 등에 의해 ‘천명을 받은 인물’로 떠받들어졌다면, 이방원은 스스로 ‘천명을 만든 인물’이다. 이방원은 개국 시조인 아버지와 대립하는 상황에서 자신의 정권을 정당화하기 위한 방법으로 백성에게 다가가는 정치를 택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종부법(從父法) 시행이다. 당시 양인(良人)이 천민(賤民)과 결혼했을 때, 그 자식은 종모법(從母法)에 따라 어머니의 신분을 따랐다. 신분제 사회인 조선에서는 부친의 신분이 모친보다 높은 경우가 많았다. 바꿔 말하면 모친의 신분이 낮은 경우가 훨씬 많았기 때문에 종모법을 시행할 경우에 노비 숫자가 많아졌고, 노비 숫자를 늘리고 싶어했던 양반 사대부들은 한결같이 종모법을 주장했다. 그러나 태종 이방원은 양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를 아버지의 신분을 따르는 종부법(從父法)으로 바꿨고, 이에 따라 모친의 신분 탓에 노비가 됐던 수많은 백성들이 양인으로 구제받았다.

태종은 무엇보다 권력층의 횡포를 막기 위해 개혁의 칼날을 내부로 겨눠 피의 숙청을 단행했다. 공신을 숙청하는 것은 물론이고 양인을 노비로 만들었다는 이유 등으로 네 명의 처남을 죽였다. 최측근인 이숙번까지 읍참마속(泣斬馬謖)으로 다스렸다. 저자는 “이성계와 정도전의 토지 개혁에 이방원의 공신 숙청, 종부법 등이 더해져 조선은 보다 완벽한 나라의 기틀을 갖추게 됐다”고 강조한다.

전제시대의 군주가 자신의 정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백성의 아픔을 어루만지는 길을 택했다는 것, 또 권력층 내부 개혁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수족을 잘라내는 아픔을 견뎌냈다는 것. 이것이 오늘날의 권력자들에게 주는 메시지는 분명하지만, 현실에서 실천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이성계는 자신에게 반기를 든 아들 방원을 끝내 용서하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났다. 1408년 5월 24일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이방원은 땅을 치면서 발을 구르고 울부짖었다고 한다. 권력을 얻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아버지와 불화한 한이 얼마나 깊었을 것인가.

서울 청계천과 중랑천이 만나는 지점에 있는 ‘살곶이 다리(箭串橋)’는 이방원의 한을 되새기게 하는 곳이다. 아들이 보기 싫어서 함흥으로 갔던 이성계가 무학대사 등의 간청으로 한양으로 돌아오게 됐을 때, 이방원이 중랑천 하류 근처까지 마중을 나갔다. 함흥에서 돌아오던 이성계는 이방원을 보자마자 활을 쏘았다. 화살은 태종을 맞히지 못하고 땅에 떨어졌는데, 그 자리를 화살이 꽂힌 자리라고 해서 ‘살곶이 다리’라고 불렀다고 한다. 과연 이성계는 아들 방원을 죽이기 위해 화살을 쐈을까. 방원이 그 화살을 피하지 않고 가슴을 대어 맞았다면, 아버지는 생전에 아들을 용서했을 것인가. 그러면 두 사람의 역사적 관계는 지금과는 상당히 달라졌을 것이다.

장재선 기자 jeijei@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