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언제까지 ‘親日 유령’에 휘둘릴 것인가

장재선/문화부장

‘친일(親日) 청산을 해서 민족 정기를 높이자.’ 우리 사회에서 이런 말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불구덩에 섶을 지고 뛰어드는 일이다. 독립운동가의 후예보다 친일파의 후손들이 더 떵떵거리고 산 현대사의 오점 탓이다. 친일논란이 불거지면 격노하든지, 침묵하든지 둘 중에 하나를 택하는 게 지식인의 불문율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문창극 전 총리 후보에 이어 이인호 KBS 이사장에 대한 친일파 공세를 보며, 소리내어 말하지 않을 수 없다.‘이건 아니다’라고.

되돌아보건대, 문 전 총리 후보가 낙마한 것은 반대파들의 공격을 견딜 만한 힘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정권과 그의 준비가 부족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그가 친일파라고 낙인이 찍힌 것은 어이가 없는 일이다. 낙마의 빌미가 된 그의 강연 동영상을 본 사람은 알겠지만, 그 내용은 친일보다는 극일(克日)에 가까운 것이다. 오히려 거슬리는 것은, 기독교 역사의 바탕인 서양문명에 대한 사대주의를 거침없이 피력하고 있는 점이다. 그런데 엉뚱하게 친일파로 몰리다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인데도 그는 친일의 덫을 걷어내지 못한 채 물러나야 했다. 대다수의 국민은 그의 친일 발언 여부를 판단하기보다는 그 덫에서 허우적대는 모습에 거부감을 토로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그의 조부가 독립유공자였다는 사실이 확인됐다고 발표된 것은 사후약방문에 불과했다.

지난 5일 선임된 이인호 KBS 이사장도 친일 역사관을 지녔다는 공세에 시달리고 있다. 그에 대한 반대파들의 공세는 연좌제 성격이 짙다. 이 이사장의 조부가 일제 시대에 친일 행적을 보였다는 것이 공격 대상이 됐기 때문이다. 반대파들은 이 이사장의 외조부가 반일(反日) 인사였다는 사실은 언급하지 않는다. 그의 외조부는 망국(亡國) 당시 규장각 부제학으로서 일제에 협력하기 싫어 지방으로 잠적한 지사였다.

이 이사장에 대한 공세의 본질은 정치적·이념적 세력 싸움이다. 이른바 좌파 진영에서 뉴라이트 쪽의 인물이 공영방송 이사장이 되는 것을 두고볼 수 없어 나선 것이다. 반대파들의 공세에 맞서고 있는 이 이사장은 조부의 친일파론을 인정하지 않는다. 조선유도(儒道)협회 이사 등을 지낸 그의 조부가 유학(儒學)을 지키기 위해 일제와 타협을 한 것이어서 친일파로 매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조부에 대한 변호이기는 하지만, 역사학자인 그의 말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

그의 논리는, 친일 문제를 깊게 연구한 이들의 주장과 통한다. 친일파와 친일 행위 단죄를 위해서는 그 시대의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일제 식민통치는 가혹했으며 길었다. 체제 저항자라는 판정을 받고 살아남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목숨을 바친 항일 투사도 있었지 않느냐는 비난은, 오늘날 자유 국가에 사는 사람의 관점에서 나온 것일 뿐이다. 저항시인으로 알려진 윤동주조차도 일본 유학을 위해서 창씨개명을 해야 했다. 당시 사람들은 일제의 협력 요구를 거절할 여지가 없었다. 그런 타협을 극렬하게 비난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일제 통치가 가혹하지 않았다고 변호해주는 셈이다.

친일 문제에 정통한 작가 복거일 씨는 “식민 시기의 행위가 친일로 비판되려면, 자발적이며 조선인들에게 해로웠다는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독립운동을 하는 조선인을 붙잡아다가 고문을 했다는 등의 명백한 친일에 한정해서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단죄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파의 대표 지식인인 복 씨의 주장을 좌파 진영에서 당장 수용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광복 70주년을 앞둔 시점에서도 우리 공동체 구성원들이 ‘친일 유령’에 계속 휘둘려야 하는지 심사숙고할 필요가 있다.

눈을 밖으로 돌리면 ‘망언(妄言) 총동원령’을 내린 듯한 일본의 아베 체제가 보인다. 한국에도 팬이 많은 작가 시오노 나나미가 일본군의 위안부 강제 동원을 부정하는 글을 썼다. 우익 정치인과 언론인, 시민운동가들뿐만 아니라 세계적 유명 작가까지 우경화 선동에 나선 셈이다. 그들은 일제의 강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조선인의 자발적 동조로 군대위안부가 유지됐다고 강변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내부의 세력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친일 유령’을 불러들여 스스로의 역사에 침뱉는 것이 과연 누구에게 이로운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