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와 시각>힐式 북핵협상, 더 이상 없다

이미숙 / 국제부장

미국의 역대 외교관 중 크리스토퍼 힐 전 주한 미대사만큼이나 대중적 인기를 누리며 논쟁을 몰고다닌 인물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가 조지 W 부시 행정부 때 6자회담 수석대표 겸 국무부 차관보로 발탁됐을 때 한국 사람들은 열광했다. 미국의 대북 협상 수석대표로 북한과 협상을 주도해나갈 때 그는 록스타 같았다. 그의 한마디 한마디는 서울에서든, 베이징(北京)에서든, 베를린에서든 톱뉴스가 됐다. 그가 6자회담을 진척시켜나가는 동안 국내의 반미여론도 누그러들었다.

그의 대북 접근법에 대해선 늘 찬반양론이 팽팽했다. 힐의 과감한 대북 행보에 대해 대북 협상론자들은 찬사를 보냈지만 대북 압박론자들은 북한을 제대로 모르는 인사가 북한에 끌려다니며 양보를 했다고 비난했다. 힐을 ‘김정 힐’(김정일+힐)이라고 불렀을 정도다.

힐이 협상 무대를 떠난 뒤 잊어졌던 논란은 그가 이달 초 회고록 ‘전초기지-미국 외교 최전방의 삶(Outpost, Life on the Frontlines of American Diplomacy)’을 펴내면서 또다시 폭발하고 있다. 미 국무부 정보조사국 출신인 로버트 칼린은 북한 전문매체 38노스 기고문에서 “힐은 딕 체니 등 네오콘(신보수주의자)의 대북 대화 저지 음모를 뚫고 6자회담을 진척시킨 뛰어난 협상가”라고 평했다. 반면 미 중앙정보국 출신인 수 미 테리는 월스트리트저널 기고문에서 “힐은 북한에 너무 많은 인센티브를 제공하고도 성과를 내지 못했고, 무엇보다 독재자 김정일에 대해서 오판을 했다”고 비판했다. 미 정부 출신 인사들조차 ‘최고의 협상가’라는 상찬과 ‘판단력이 형편없는 인사’라는 혹평을 동시에 내놓는 것이다.

힐을 둘러싼 논쟁이 회고록 출간을 계기로 재연되는 것은 그가 추진한 협상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고 있기 때문이다. 대화론자들은 여전히 힐 스타일의 과감한 대북 협상만이 북핵 해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압박론자들은 더 이상 힐처럼 북한에 끌려다니는 협상을 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현시점에서 확실한 것은 앞으로 어떤 경우에도 힐 스타일의 북핵 끝장 협상이 다시 반복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당시 힐은 북한이 핵을 포기할 경우 얻게 될 혜택의 모든 로드맵을 제시하며 최대한 유연한 자세로 협상을 타결 직전까지 끌고갔지만 최종 순간에 김계관은 돌아섰다. 아마 김정일이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였다면, 힐은 데이튼평화협정을 통해 보스니아 내전을 끝낸 그의 멘토 리처드 홀브룩처럼, 북핵종결자로 역사에 기록됐을 것이다.

국무부 퇴임 후 힐은 문화일보 파워인터뷰(2011년 1월 21일자) 때 “북한이 체제 생존을 위해 핵 보유 쪽으로 결론은 내린 것 같다”고 했다. 회고록에서 힐은 수석대표 퇴임 전 방북해 부시 친서를 김정일에게 전달하려 했지만 북측이 거부했다고 털어놨다. 따라서 힐 스타일의 대북 협상이 남긴 교훈은 한·미 양국이 앞으로 어떤 보상책을 제시한다 해도 북한은 결코 핵을 놓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협상을 통한 북핵 폐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확인된 상황에서 우리는 뭘 해야 할까. 이것이 바로 6자회담 중단 6년 만에 대북 협상 기대감에 다시 젖어들고 있는 우리에게 힐이 던지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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