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 꿇은 총리… 강하면서도 인간적이었던 삶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1970년 12월 폴란드의 유대인 희생자 추모비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죄하는 브란트. 북로그컴퍼니 제공

빌리 브란트를 기억하다 / 에곤 바 지음, 박경서·오영옥 옮김／북로그컴퍼니

독일 서베를린 시장, 사회민주당 당수와 외교부 장관 겸 부총리를 거쳐 서독 총리를 역임한 빌리 브란트(1913∼1992). 독일 통일의 주역인 그는 1971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장벽은 붕괴됐고, 1990년 10월 3일 독일 통일이 된 지 2년 후인 1992년 눈을 감았다.

냉전 시대에 화해와 독일 통일을 이끌었던 한 정치가의 삶이 그의 친구이자 조력자에 의해 되살아난다. 저자 에곤 바는 브란트 총리 시절 비서실장이었고, 브란트를 시작으로 헬무트 슈미트, 헬무트 콜 등 3명의 독일 총리를 보좌하며 통독 정책을 추진했던 인물이다.

저자는 빌리 브란트 탄생 100주년이던 지난해 두 사람이 함께했던 시절을 되살리며 정치가 브란트의 인간적 면모까지 추억한 평전을 펴냈다. 그는 독일 사회민주당 입당 무렵 브란트를 알게 됐고, 브란트의 베를린시장 시절부터 함께 일했다. 통일 독일을 지향하는 ‘동방정책’의 실질적인 설계자였다.

이 책은 독일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과 더불어 동서 분단에서 독일 통일을 이끈 지도자의 삶과 업적을 회고한다. 브란트의 면모를 드러내는 역사적 장면으로 독일 분단 25주년의 해이던 1970년의 두 현장이 등장한다.

1970년 3월 19일 동독 에르푸르트 시내 광장에서 동독 사람들은 서독 총리로 처음 동독을 방문한 브란트를 열렬히 반겼다. 같은 해 12월 7일 폴란드 바르샤바의 유대인 희생자 추모비에서 헌화하던 브란트는 갑자기 무릎을 꿇고 사죄의 묵념을 했다. 이 같은 화해·용서·평화의 정책은 1990년 독일 통일로 이어졌다.

이 책에는 “궁지에 몰린다고 느끼면 느낄수록 단호한 용기가 솟아나는 강한 면모”뿐 아니라 자신의 과거와 가족에 대한 정적의 공세에 충격과 상처를 받았던 모습도 등장한다.

많은 선거전에서 아데나워를 포함한 라이벌들이 그가 사생아였고 나치 시절 국적을 박탈당한 뒤 노르웨이 군복을 입고 조국 독일과 싸웠던 과거의 상처와 불법시위에 가담해 재판을 받은 아들 교육 등을 비방할 때 몹시 힘들어 했다는 것. 그러나 자신의 약점을 감추지 않는, 연약함과 인간적 민감함은 그를 더 인간적으로 보이게 했고 오히려 장점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이 브란트를 오래 지켜본 저자의 평가다.

두 사람이 함께 일하게 된 계기, 저자가 모스크바와 동베를린을 오가며 동서 화합의 중재자로 활동한 임무도 소개된다. 모스크바조약, 바르샤바조약 및 동서독 통행협정, 동서독 기본조약 체결을 비롯해 미국의 닉슨 행정부, 소련의 브레즈네프, 동독의 호네커와 직접 협상하며 미·소 양국 간 핫라인을 유지한 일도 생생하게 전한다.

지난 9일은 베를린장벽 붕괴 25주년 기념일. 통독의 기틀을 마련한 해외 지도자의 평전을 계기로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위한 정치가, 위대한 지도자의 역할을 새삼 생각해 보게 된다.

신세미 기자 ssemi@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