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민우 샤토 라피트 로칠드 한국 대표가 15일 수백여 병의 프랑스 와인을 보관해놓은 서울 강남구 대치동 사무실에서 와인을 시음해 보고 있다. 이 대표는 “한국 사회에서 와인이 하나의 음식문화로 대중화되길 기대한다”는 소망을 내비쳤다. 정하종 기자 maloo@
이민우샤토 라피트 로칠드 한국대표
프랑스의 한 작은 마을에서 장터가 열렸다. 와인 학교에 다니던 한 학생은 필수 이수 과정 중 하나인 ‘와인 판매’를 위해 그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그때 80세가 넘어 보이는 백발의 노부부가 이 학생 앞으로 다가와 2만 유로(약 2690만 원)어치의 와인을 주문했다. 너무나 많은 주문량에 놀란 학생이 물었다. 어디에 그렇게 많은 와인을 쓰실 거냐고. 그러자 노부부는 웃으며 말했다. “30년 후 내 손주들이 마실 와인입니다. 지금 내가 마시고 있는 와인도 우리 할아버지가 30년 전에 나를 위해 사 놓으신 것들이죠.”
프랑스에서 배운 가장 큰 가치에 대해 ‘시간을 바라보는 방법’이라고 대답한 이민우(40) 샤토 라피트 로칠드 한국 대표는 와인 학교 학생이던 시절을 회상하며 이 이야기를 들려줬다. 지난 15일, 곳곳에 와인 상자가 가득 놓여 있는 서울 대치동 개인 사무실에서 만난 이 대표는 프랑스 생테밀리옹 와인 전문학교를 동양인 최초로 졸업한 사람이자, ‘5대 샤토’ 중 하나로 꼽히는 와인계의 명품인 샤토 라피트 로칠드의 최초 한국 대표다. 타이틀만 보면 어렸을 때부터 와인에 정통해 ‘특수 전문 교육’을 받은 사람처럼 느껴질 수도 있으나, 실상 이 대표는 1999년 연세대 사회학과를 졸업해 ‘갈 곳을 잃은’ 외환위기 시대 많은 젊은이 중 하나였다.
“아무 데도 취직이 안 됐죠. 저와 제 또래 친구들은 그때 지구가 망하는 줄 알았어요. 어머니께서는 농사를 짓자고 권유하실 정도였죠.”
현재의 취업난보다도 엄혹했던 시절이었다. 대다수 기업이 신규 채용을 하지 않았다. “그때 연세대 조한혜정 교수께서 같이 프로젝트를 하나 하자고 하시더라고요. 그게 하자센터였습니다. 하자센터 초기 멤버로 참여해 웹 기획자 겸 웹 마스터로 일하게 됐죠. 사회학과 졸업생이지만, 대학 다닐 때 봉사활동으로 환경운동연합 전산실에서 일했던 적이 있었거든요. 그때 일하며 배웠던 지식으로 참여하게 됐고, 결국 2000년 5월 하자센터에서 일했던 사람들과 같이 정보기술(IT) 벤처회사 창업까지 하게 됐죠.”
이 대표는 문화콘텐츠를 활용하는 벤처 회사를 시작하게 됐다. 소설가 김주영 씨 등이 이 대표를 지원해줬고, 문화콘텐츠와 인터넷을 접목한 여러 사업 아이템을 구상했다. 하지만 이 대표 마음속에 있는 답답함이 해소되지 않았다. “창업을 하고 보면 항상 갈등이라는 게 생길 수밖에 없겠지만, 사장과 대주주가 원하는 길이 저하고는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또 원래 IT 출신이 아닌 제가 현장에서 일하며 부딪히는 어려움도 있었죠. 하지만 무엇보다도 저 스스로 일에 대한 열정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이 일을 평생 할 수 있을까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도 들고요.”
결국 창업한 지 약 4년이 채 지나지 않은 지난 2004년 1월, 이 대표는 회사를 그만두고 훌쩍 프랑스로 떠나게 됐다. 와인을 배우고 싶어서가 아니라 와인을 ‘마시기’ 위해서였다. “프랑스어를 전혀 못 했던 저는 그저 1년만 머리를 식히고 오자는 생각뿐이었어요. 와인에 대한 관심은 있었지만 공부하겠다는 생각은 없었죠. 당시 우리나라에 피터 현이라고, 뉴욕타임스 등에 와인 칼럼을 쓰는 유명한 와인 전문가가 왔었는데, 우연히 알게 돼 저를 프랑스로 인도했죠. 그분께서 프랑스 부르고뉴에 자신의 성을 갖고 있어요. 그래서 그곳에서 1년 동안 생활하게 됐죠. 정말 그때까지만 해도 1년만 있다가 올 생각이었어요.”
하지만 이 대표는 결국 프랑스에 3년간 머물렀고, 예상과 달리 와인 공부도 하게 됐다. 와이너리(와인 양조장)에서 직접 와인을 제작하는 사람들과 살면서 “나도 와인을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기 때문이다. 이 대표는 프랑스를 돌아다니며 만났던 마을 중 가장 아름다웠던 생테밀리옹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고는 조르고 또 졸라 와인전문학교에 입학했다.
“생테밀리옹의 와인전문학교는 중·고등학교와 전문학교 과정이 다 합쳐져 있는 곳이에요. 학교의 목적 자체가 동네 사람들, 동네에서 작은 와이너리를 운영하는 주민들의 아이들이 와인 만드는 것도 배우고, 경영하는 방법도 익히는 그런 곳이었죠. 저는 이 학교의 첫 번째 아시아 졸업생이었어요. 그리고 물론 당시 가장 나이 많은 학생이었고요. 원래 맨 처음에 학교에 연락했을 때는 양조 자격증도 없고, 난생처음 보는 아시아 학생을 받아주려 하지 않았죠. 일주일 넘게 매일 전화하고, 편지를 써서 입학을 졸랐어요. 9월 1일이 입학이었거든요. 그런데 2일에 전화가 왔어요. 낙담하고 한국으로 돌아가려는데, 지금이라도 올 생각이 있으면 오라고 하더라고요.”
현지에서 와인을 직접 만드는 사람들과 호흡하고 싶다는 이 대표의 바람은 생테밀리옹에서 실현됐다. 학생은 물론 선생님마저도 이 대표보다 어린 사람이 많았지만 ‘만학도’로서 이 대표는 더 많은 것을 흡수하기 위해 노력했다. “미래의 프랑스 와인 제작자들이 모인 곳이잖아요. 이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해볼 수 있다는 게 좋았어요. 물론 ‘우리 집에 가면 너만 한 삼촌이 있다’고 말하는 친구들이 많았지만요. 창피한 일이지만 저는 제가 졸업한 대학이 좋은 학교라고 생각해, 더 이상의 학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 때문에 외환위기 시절 취직이 안 된 경험은 충격이었죠. 학력에 대해 상당히 비관적인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래서 생테밀리옹 와인 학교에서도 졸업장을 따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죠. 주변의 와인 제작자들을 많이 만나고 다녔어요. 학교 다닐 때도 그렇고, 3년간 정말 많은 사람을 만났죠. 제일 좋았던 것은 프랑스 와이너리 주인들은 제가 좋은 질문을 많이 준비해가면 아무리 유명한 사람이라도 다 직접 만날 수 있다는 거였어요. 학생 신분으로 재밌는 질문거리를 가져가면, 그 사람들은 직접 나와 진지하게 이야기해 줬어요. 우리나라에서는 그러기가 쉽지 않죠.”
프랑스의 와이너리를 돌아다니면서 이 대표는 자연히 그들의 생활에 대해서도 이해하게 됐다. 시간을 바라보는 관점도 이때 배웠다. “이곳 사람들은 아버지가 와이너리를 운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바로 그 와이너리에 들어가지 못해요. 최소 10년간 남의 집에 가서 경험을 쌓아야 하죠. 그럼 벌써 30살이 넘어요. 그때가 돼서야 자기 집으로 돌아와 자신의 이름으로 와인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최소 10년은 또 시행착오를 겪게 되죠. 이제 좀 내 이름으로 된 와인을 만들 수 있겠다 싶으면 50대가 되어 있어요. 전 이런 게 참 좋았습니다. 이 친구들은 계획을 짤 때 굉장히 긴 시간을 염두에 두고 있어요. 와이너리만 하더라도, 우리나라 같으면 보수 공사를 한다고 할 때 어떻게든 빨리 1년 안에 다 끝마치려고 하겠지만, 이 친구들은 마치 문화재를 수리하듯이 정말 조금씩 수정을 하더라고요. 그런 식으로 항상 시간을 두고 생활하는 것이 부러웠어요. 전통과 전통에 대한 경험을 가진 이 사람들이 부러웠죠.”
졸업장을 딸 생각이 없었지만 “가장 나이 많은 네가 졸업장을 따지 않으면 학급 분위기가 망쳐진다”는 선생님 말을 듣고 졸업 시험까지 본 뒤 이 대표는 2007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한국에서 가장 큰 와인 가맹점 중 하나인 나라셀라의 마케팅본부장으로 입사하게 됐다. “처음 나라셀라에 입사했을 때, 제가 맡은 와인은 미국 와인이었어요. 프랑스에서 공부했는데, 미국 와인을 맡게 돼 깜깜했죠. 당시 저는 토익, 토플 점수도 없었고, 영어는 한마디도 못할 정도였죠.”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당시 미국 와인 중 한 공급사의 부회장이 이 대표를 인터뷰하겠다고 나섰다. 자사의 와인을 제대로 팔 수 있는지 검증하기 위해서였다. “갑자기 연락이 와 3∼4일 후에 영어로 면접을 볼 것이라고 했죠. 그래서 면접 날까지 예상 질문 100개를 만들고, 모범 답안을 아예 외워버렸어요. 질문 10개 중 7개는 여기서 나오더라고요. 나머지 세 개는 그쪽에서 뭐라고 말하든 그냥 제가 준비한 답변을 했습니다. 다행히 맞아떨어진 것 같더라고요.”
5년 정도 나라셀라에서 일한 뒤 이 대표는 2012년 1월 1일 샤토 라피트 로칠드 대표로 임명됐다. 한국 시장을 눈여겨보던 샤토 라피트 로칠드사가 자사를 대표할 한국 내 사람으로 이 대표를 선정한 것이다. “2년마다 갱신되거든요. 제대로 못 하면 잘리죠. 이곳도 매우 치열한 세계입니다. 저는 라피트 로칠드에서 나오는 와인을 판매하고, 또 한국 와인 시장에 맞게 분류하고, 홍보 활동을 하고 있죠. 라피트 로칠드는 아주 고급 와인이에요. 전에 모 은행에서 VIP 대상으로 와인 교육을 부탁했거든요. 가서 라피트 로칠드를 아는가 물어보니 100여 분 중 7분만 아시더라고요. 해외에서 라피트 로칠드는 ‘와인계의 에르메스’로 알려져 있죠.”
하지만 이 대표는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을 묻는 말에 명품 와인이 많이 판매되는 것이 아니라 ‘와인의 대중화’라고 답했다. “와인이 마구 팔린다는 의미의 대중화는 아니에요. 전 와인이 일종의 ‘워크맨’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요. 당시 제 세대의 워크맨은 음악, 예술, 엔터테인먼트를 상징하는 상품이었죠. 단순히 워크맨으로서 기능하는 게 아니라 워크맨을 통한 문화를 만들어 낸 공신이었어요. 전 와인도 그렇게 대중화되길 바랍니다. 와인이 하나의 음식 문화로서 대중화되길 기대하는 것이죠.”
이 대표는 궁극적으로 자기 이름을 딴 와인을 만들고 싶다고 밝혔다. 1년에 100병밖에 만들지 못하더라도 자신의 이름을 딴 와인을 생산하는 게 프랑스 학생 시절부터 가졌던 꿈이었다.
“와인이라는 게 참 재밌어요. 1982년산 와인은 매우 훌륭하죠. 30년이 지났으니. 그런 와인도 좋지만 그건 이미 완성된 와인이라고 볼 수 있어요. 와인 애호가들이 제일 좋아하는 즐거움은 와인의 변화를 느끼는 일이에요. 같은 와인을 12병 사 놓죠. 그리고 매년 한 병씩 마셔보는 거예요. 이 와인이 어떻게 변했는지, 내년에는 어떻게 될지 상상하며 와인을 마시죠. 와인이라는 것은 결과뿐만이 아니라 과정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도 그랬지만, 지금 세대 친구들도 고통스럽고 힘들 거예요. 하지만 이 모든 게 과정이고, 여태까지 아무도 가 보지 않았던 길이기 때문에 어려움도 덤덤하게 하나의 부분으로 받아들였으면 해요. 그리고 그 안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생각해봤으면 좋겠습니다. 완성된 와인만큼이나 완성되는 과정의 와인도 멋진 거니까요.”
이후연 기자 leewho@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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