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락한 왕의 간택女, 조선 최고 명문가에 시집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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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역사를 지켜온 왕실 여성 / 신명호 외 9명 지음 / 글항아리

조선의 역사를 다룬 작품에서 여성은 대부분 조연이다. 왕과 사대부, 중인, 무사, 상인, 심지어 노비를 다룰 때도 주인공은 남성의 몫이었다. 당시 남존여비(男尊女卑) 사상이 팽배했기 때문에 여성의 역할은 한정될 수밖에 없고, 여성의 삶을 담은 역사적 기록도 많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신간 ‘조선의 역사를 지켜온 왕실 여성’은 첫 장부터 끝 장까지 여성이 주인공이다. 신명호(사학) 부경대 교수를 비롯한 10명의 역사학자들이 조선의 왕비, 후궁, 공주, 옹주, 궁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왕실 여성의 생활문화와 역할을 깊이 있게 파고든다. 시기적으로는 왕실의 여성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관통한다. 국립고궁박물관 왕실문화 기획총서의 6번째 작품으로, 지난해 박물관에서 연 ‘왕실문화 심층 탐구’ 교양강좌의 내용을 다듬고 각종 사진 자료를 풍성하게 담아 구성했다.

일반 사가의 평범한 여성이 왕비나 왕세자빈에 오르는 첫 관문은 간택이었다. 왕을 비롯한 왕실의 어른들이 후보자들을 궐 내에 모아놓고 직접 보고 선발하는 절차다. 이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높았지만 간택 절차는 조선 말기까지 지속됐다. 간택은 ‘금혼령(禁婚令)’을 선포하는 일에서 시작됐다. 왕실 구성원의 혼처를 구하기 위해 사대부가의 10세 안팎 규수들의 혼인은 금지한다는 명령을 내리는 것이다. 금혼령이 내려지면 사대부 집안에서는 조정에 왕실에서 제시한 기준에 충족하는 자제에 대한 정보를 담은 처자단자(處子單子)를 제출해야 했다. 대상자가 없으면 그 이유를 보고하는 단자를 따로 제출해야 할 만큼 절차가 엄격했다. 이 시기에는 양반은 물론 서민도 결혼할 수 없었다.

왕실과의 혼사를 위해 많은 사대부들이 간택에 달려들었을 것으로 예상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당시 양반 가문들은 왕실과의 혼사에 대해 상당한 거부반응을 보였다. 복장, 가마 등을 마련하는 데 적지 않은 돈이 들었고 설혹 간택을 거쳐 외척이 되더라도 권력의 중심부에서 상당한 정치적 부담이 따랐다. 사대부들은 딸을 왕실에 시집 보내지 않기 위해 금혼령이 내려지기 전 서둘러 결혼을 시켰다. 인현왕후 가례 때는 3일이 지났음에도 처자단자가 7장밖에 올라오지 않자 숙종은 기강이 해이해졌다면서 단자를 하나도 올리지 않은 지역의 수령이나 한성부의 관련 업무자를 파직시키는 일도 있었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순정효황후(가운데)가 대신의 부인들, 내명부의 품계를 받은 궁녀 등과 함께 친잠례(親蠶禮) 후 찍은 기념사진. 친잠례는 백성에게 양잠을 장려하기 위해 왕비가 만물이 소생하는 3월에 내외명부 여성들을 거느리고 직접 뽕잎을 따고 누에를 치는 왕실의 중요한 의식이었다. ‘일본지조선(日本之朝鮮)’(1911)에 수록된 사진으로, 창덕궁의 서향각 앞에서 찍은 것으로 추정된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왕의 여자’는 초간택, 재간택, 삼간택으로 세 번의 심사과정을 거쳐 탄생했다. 30명 안팎이 초간택 후보에 오르고, 최종적으로 3명이 추려진 뒤 ‘마지막 1인’이 정해졌다. 그 기간은 매번 달랐지만 석 달 이상이 소요되는 때도 있었다. 이 엄격한 절차를 거쳐 최종 3인에는 선발됐지만, 낙마한 이들은 어떻게 될까. 이들 또한 ‘왕의 여자’로 여겨져 다른 집안으로 시집갈 수 없어 평생 수절하고 살아야 한다거나 대개는 왕이나 세자의 후궁으로 들어갔다고 본 것이 일반적 견해다. 하지만 실제 이들은 모두 명문가 최고 엘리트 계층의 남자와 결혼했다고 한다. ‘간택 처자’였다는 타이틀은 아무런 결격 사유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간택이 사대부 처자들의 ‘왕실행 완행 티켓’쯤이라면, 왕으로부터 ‘승은’을 입는 것은 궁녀들의 초고속 신분상승의 도구이자 최대 욕망이었다. 궁녀는 빠르면 4∼6세에도 입궁을 하는데, 대개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궁궐 내 의식주부터 각종 의례까지 그들의 손길이 미쳤다. 궁녀 출신으로 왕의 어머니까지 된 희빈 장 씨 같은 인물도 있지만, 왕의 승은을 입는 일은 궁녀 수에 비해 대단히 드문 일이었다. 하지만 이들에게 남녀 간의 사랑이 허용되는 것은 오직 그 대상이 왕이나 왕세자일 때뿐, 이외의 성생활은 철저히 금지됐다. ‘궁녀가 간통하면 즉시 참수하라’는 규정이 있었기에 사랑을 나누려면 궁녀뿐 아니라 남자도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다. 이 때문에 궁녀들 사이에서는 종종 동성애가 일어났다.

책은 왕실 여성의 탄생을 시작으로 임신과 출산, 재산과 경제생활, 복식과 미용 등을 총망라한다. 발을 드리우고 행한 수렴청정의 진실, 공주와 옹주의 혼인 과정을 살피고 혜경궁 홍 씨의 ‘한중록’을 중심으로 왕실 여성의 문학도 훑는다. 왕실 여성의 삶을 이해하는 데, 이 책 한 권이면 충분하다.

유민환 기자 yoogiza@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