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 본래 자유분방… 호기심·장난기 많았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울진봉평비(524년·국보 242호)에 새겨진 지(智)자. 이 비석에는 지자가 30회 나오는데 크기나 기울기, 모양이 모두 제각각이다. 저자는 이것이 자유분방한 한민족 고유의 특성을 가장 잘 드러낸 글씨체라고 말한다. 김영사 제공

어린아이 한국인 / 구본진 지음 / 김영사

저자 구본진(50) 씨는 글씨만으로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확신하는 이다. 현재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는 그는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법무연수원 연구위원이었던 부장검사. 21년간 검찰청에 몸담으며 서울중앙지검 첨단범죄수사부장으로 근무하는 등 검사생활 대부분을 강력부에서 보냈다. 조직폭력, 마약, 살인 등을 저지른 강력범죄자를 상대하면서 그가 내린 결론은 ‘글씨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흉악범들의 글씨는 하나같이 속도가 느리고 각이 많고 마지막 부분이 흐려지며 필압(筆壓)이 무겁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저자는 15년 이상 수많은 글씨를 수집하면서 글씨가 사람의 내면을 가장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열쇠라는 생각을 굳혔다. 2009년에는 ‘필적은 말한다’를 펴냈다. 항일운동가 400여 명의 글 600여 점과 친일파 150여 명의 글 400여 점을 분석해 글씨만으로 항일운동가와 친일파를 정확히 구분해낼 수 있다는 주장을 담았다. 글씨를 통해 사회적 성공 여부도 확인할 수 있다고 했다. 글씨체가 사람의 성정과 기질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는 생각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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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6년 만의 신작 ‘어린아이 한국인’에서 더 과거로 떠난다. 책의 부제(글씨에서 찾은 한국인의 DNA)에도 나타나듯 글씨 하나로 한민족의 정체성, 실체, 의식, 문화원형을 풀어보겠다는 담대한 계획이다. 이를 위해 고대 유물의 필적을 찾아다니고, 필적학은 물론 역사학·고고학·문자학·인류학·진화생물학을 공부했다. 자신의 작업엔 ‘필적고고학(Grapho-Archeology)’이란 이름을 붙였다.

작업은 한민족 고유 글씨체를 찾는 것부터 시작했다. 고조선 시기의 글씨는 현재 남아 있지 않다. ‘반구대암각화’ ‘천전리각석’ 등이 고조선의 것으로 주장되지만 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있다. 대신 저자는 6세기 초 이전의 신라가 고조선의 특징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다고 봤다. 고조선의 유민들이 내려와 신라를 건국했고, 이때까지 중국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국식 호칭인 ‘왕’의 사용(503년), 중국식 연호 사용(541년), 불교 공인(528년) 등은 6세기에 벌어진 일이다.

6세기 초 이전 신라의 대표 글씨는 이사지왕 고리자루 큰칼(5세기 중반∼6세기 초), 포항중성리신라비(501년·보물 1758호), 영일냉수리신라비(443년 또는 503년·국보 264호), 울진봉평비(524년·국보 242호) 등에 남아 있다. 글씨들은 형태가 반듯하지 않고, 좌우 균형이 이뤄지지 않았다. 자유분방하고 즉흥적이며, 필획과 자형이 예측 불가능하다. 둥글둥글한 곡선의 형태로, 마치 어린아이가 써놓은 것 같다. 저자에 따르면 이는 고대 한민족의 전형적인 글씨체다.

그는 글씨체를 통해 한민족은 본래 매우 성격이 밝고 온화하며 개방적이고 꾸밈이 없으면서 유연한 성정을 가졌다고 말한다. 또 자유분방하고 순박하며 진취적이다. 한민족은 ‘한(恨)을 가진 민족’이란 말이 많지만, 그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오히려 자유분방한 한민족이 중국의 영향으로 경직된 문화 속에서 살게 된 것이 ‘한’의 원인이 됐을 것이라고 한다. 이런 글씨체를 가진 이는 따뜻함, 충동성, 활발함, 창의성을 지니지만 균형감각 부족, 변덕스러움, 의지 약함, 주위 산만, 방향성 부족 등 단점이 있다.

저자는 한민족의 특성을 가장 잘 나타내는 단어를 ‘네오테니(neoteny)’로 규정한다. ‘네오테니’는 인간이 신체, 정신, 감정, 행동 등 모든 측면에서 어린아이 같은 특성이 줄지 않고 오히려 두드러지는 쪽으로 성장하고 발달하는 것을 이른다. 사랑, 낙천성, 웃음, 노래와 춤, 호기심, 장난기 등이 특징이다. 반면 글씨체가 규격화돼 있고 자른 듯이 바르고 가지런한 중국은 완고하고 강인하며 인내심이 많은 특성을 지닌다. 융통성이 없고 비타협적이기 때문에 고지식한 면이 있다.

저자는 삼국시대, 고려, 조선, 일제강점기 등을 지나면서 글씨체의 변화를 살핀다. 중국의 영향을 받아 규칙성이 생기고, 일제강점기에 ‘역사상 가장 특이한 글씨체’가 나오게 되지만 비정형 글씨체의 특성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설명이다.

기원전 4700∼기원전 2900년쯤 중국 네이멍구(內蒙古)자치구 등지에서 형성된 홍산문화와 고대 한민족의 연관성도 넌지시 던진다. 그는 홍산문화의 유물에서 발견된 글씨체가 중국의 것과는 구별되고, 오히려 한민족의 글씨와 유사한 특징을 보인다고 말한다.

유민환 기자 yoogiza@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