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멸망·흑사병 부른건 ‘한알의 씨앗’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씨앗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씨앗을 널리 퍼뜨리기 위해 노동하는 충실한 하인이다. 오른쪽 사진은 1723년 프랑스 해군 장교가 항해 중 커피나무를 키우는 모습. 에이도스 제공

씨앗의 승리 / 소어 핸슨 지음, 하윤숙 옮김 / 에이도스

유난히 길고 지루했던 지난 여름, 열대야에 지친 밤이면 시원한 수박 생각이 간절했다. 아내는 수박씨가 피부 미용에 좋다며 씹어 먹었지만 나는 줄곧 씨를 정성스럽게(?) 발라냈다. 나름 번잡스러운 일을 지금도 이어오는 건 아마도 ‘배 속에서 수박씨가 자라면 어떡하지?’라고 생각했던 어릴 적 걱정 아닌 걱정 때문일 게다. 아직까지 전 세계 어디에서도 배 속에서 수박이 자랐다는 보도는 없는 걸 보면 기우임에 틀림없지만 말이다.

배 속에 들어간 씨앗이 자랄 리 만무하지만, 세상 도처에 뿌려지는 씨앗은 자연은 물론 인간 삶의 환경을 변화시킨다. 우리가 먹는 과일이며 일용할 양식은 모두 씨앗의 결과물 아니던가. 어디 그뿐인가. 일상에서 쉽게 접하는 수풀과 나무 등은 작은 씨앗 하나에 빚을 지고 있다. 그 단순한 진리를 요령 있게 알려주는 책이 보존생물학자 소어 핸슨의 ‘씨앗의 승리’다. 핸슨은 이미 ‘깃털’로 어지간한 과학책 마니아들의 뇌리에 깊숙이 각인된 인물. 깃털의 기원과 역할, 쓰임새 등을 소상히 설명한 ‘깃털’에 무릎을 쳤던 독자라면 ‘씨앗의 승리’에서는 고개를 주억거릴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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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과정 시절 거대한 열대우림에서 씨앗의 확산과 포식에 관해 연구했던 저자는 자연 세계에 얼마나 널리 씨앗이 퍼져 있는지 단순명쾌하게 정의한다. “요컨대 숲 이름도 그곳에 자라는 나무 이름을 따라 짓지, 그곳을 뛰어다니는 원숭이나 날개를 퍼덕거리고 다니는 새 이름을 따라 짓지 않는다. 세렝게티를 풀밭이라고 부르게 되지, 어느 누구도 풀이 자라는 제브러밭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고 자연계의 토대를 면밀히 살펴보면 “씨앗과 그 씨앗을 지닌 식물들이 자연계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작은 씨앗 하나가 자연계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씨앗이 (영양분을) 공급하고, 맺어주고, 견디고, 방어하고 이동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씨앗은 어린 식물체가 섭취할 최초의 영양분을 미리 갖고 있는데, 이것이 발생 초기의 뿌리와 순, 잎이 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 씨앗 이전의 식물은 번식이 어려웠지만, 씨앗이 생기면서 독창적인 방식인 꽃가루가 세포를 퍼뜨리며 맺어주는 역할을 한다. “추운 기간을 거치거나 불을 통과하거나 심지어는 동물의 내장을 통과해서 나와야 하는 경우”까지 견디면서 싹을 틔운다. 단단한 껍질과 뾰족한 침, 화합물 심지어 독까지 머금고 스스로의 생명을 방어하기도 한다. 바람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이동하면서 생태계의 다양성마저 확보해 주었다. 이쯤 되면 책 제목을 ‘씨앗의 승리’라고 한 건 ‘옳고도 아름다운’ 일이라 하겠다.

책의 미덕은 단지 씨앗의 과학적 사실을 조곤조곤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씨앗과 연관된 인간 삶의 역사를, 마치 역사서처럼 엮어나간 점이다. 로마 공화정의 몰락을 앞당긴 것이 곡물 부족에서 왔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이야기부터 14세기 아시아와 유럽의 흑사병 원인이 쥐벼룩이었다는, 좀 더 깊이 있는 주장도 펼친다. 쥐의 털 속에 있는 벼룩은 일 년 이상 살고, 이 벼룩의 유충은 곡물도 먹을 줄 알았다. 하여 전염병에 감염된 쥐가 장거리 항해 동안 바다에서 죽더라도 벼룩은 살아남아 정박하는 항구도시마다 병을 옮겼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현대인의 공식 음료가 된 커피와 인간의 상호의존적 역사를 훑어가면서 카페인에 얼마나 무서운 독성이 있는지도 알려준다. 저자에 따르면 카페인은 ‘천연 살충제’로 딱정벌레 유충을 죽이고 달팽이를 말라 죽게 만든다. 또한 부근에 있는 다른 식물 뿌리의 성장을 억제하는데, 발아 자체를 막기도 한다. 혼자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게 커피의 이러한 성분 때문은 아닐까 하는, 실없는 생각까지 든다. 제2차세계대전 당시 히틀러가 러시아에서 유일하게 탐낸 것은 러시아의 식물육종학자 니콜라이 바빌로프가 만든 씨앗들이었다는 이면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인류의 최대 관심사인 ‘먹고 입는’ 일이라면 전적으로 씨앗이 관여되어 있다. 목화가 사람들의 입성을 바꾸었고, 산업혁명의 결정적 배경이었다는 점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과일을 먹을 때면 번거롭게만 여겨졌던, 어쩌면 우리 주변에서 가장 보잘것없어 보이는 씨앗의 반전인 셈이다. ‘씨앗의 승리’는 과학적 사실을 비교적 쉽고 정확하게, 역사적 사실을 접목할 때는 과감한 해석을 덧붙이고 있어 읽음직한 책이다. 누군가 “씨앗은 그 자체가 하나의 우주”라고 했는데, 그 여실한 증명이 바로 ‘씨앗의 승리’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장동석 출판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