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毒 든 사과’는 베어 물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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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학용 논설위원

환자를 살리기 위해 굉음을 내며 달리는 앰뷸런스의 ‘사이렌’. 역설적이게도 이 어원은 달콤한 노래로 인간을 홀려 죽음에 이르게 하는 그리스신화 속의 요물 ‘세이렌’(seiren)이다. 그녀는 다디단 노랫가락으로 항해 중인 선원들을 꼬드긴다. 그 소리에 넋 놓고 있는 사이 배는 바위에 부딪혀 난파된다. 호머의 오디세이에 나오는 오디세우스의 ‘세이렌 떨쳐내기’는 그래서 더 눈물겹다. ‘트로이전쟁을 마치고 귀향길에 오른 그는 배가 ‘세이렌섬’을 지날 때 부하들에게 밀랍으로 귀를 틀어막으라고 지시했다. 자신도 돛대 기둥에 꽁꽁 묶도록 했다.’

매년 1월 말 스위스의 작은 마을에서 열리는 다보스포럼. ‘허영의 사교집단’이라는 비난도 있지만 우리에게 늘 가야 할 길을 안내하는 나침반이다. 지난해 4차 산업혁명의 중요성을 일깨워준 이 포럼이 올해는 포퓰리즘 광풍을 강력 경고했다. 영국의 옥스퍼드 이코노믹스도 2∼3년 안에 20대 경제 대국 중 11개 국가에 포퓰리즘 정권이 등장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국을 ‘세이렌의 유혹’에 넘어갈 공산이 큰 4번째 국가로 꼽았다.

아니나 다를까. 대한민국 대선판에 요즘 ‘세이렌의 아리아’가 울려 퍼진다. 진보·보수 주자 가릴 것 없이 ‘좌클릭·퍼주기’ 공약들을 토해낸다. 복지를 넘어 국방, 교육, 선거연령, 육아휴직 등 오만 분야가 표심의 미끼다. 일자리·소득 확대와 재벌개혁 약속은 입이 벌어질 정도다. 국토보유세 신설로 걷은 세금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전 국민에게 30만 원씩 주겠다는 언약은 백미다.

정치에 기생하는 포퓰리즘은 정치학의 숙제다. 민주주의 국가 지도자는 마땅히 유권자를 대변해야 한다. 하지만 그들에게 끌려만 간다면 대중추수(追隨)주의다. 포퓰리즘은 독이 든 사과다. 덜컥 베어 물었다간 생명을 잃는다. 직접 희생자는 미래 세대다. 과거에는 전쟁으로 나라가 망했지만 지금은 부채로 망한다. 정치권의 과도한 포퓰리즘 경쟁은 재정 파탄을 불러온다. 노동자를 등에 업은 페론 정권의 아르헨티나나 ‘국민이 원하면 뭐든지 해 주라’는 구호로 장기집권을 한 파판드레우 일가의 그리스가 단적인 예다.

문제는 광폭(狂暴)의 포퓰리즘 뇌관이 우리에게도 본격 작동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촉발제는 두 가지다. 하나는 글로벌 불황과 우리의 구조적 난제로 인한 추세적 저성장이다. 한국은 최근 30여 년간 세계사에서 독보적인 고성장을 이뤘다. 이 기간 동안 우리의 실질 GDP는 36.3배 급증했다. 반면 세계 GDP는 7.1배 증가에 그쳤다. 고도성장 땐 나눠 먹을 게 많아 분배는 ‘자연 치유’됐다. 하지만 파이가 적어진 저성장 땐 상대적 박탈감을 지닌 경제적 약자들의 정책적 요구가 폭발하기 마련이다. 저성장의 고착화가 ‘포퓰리즘의 고착화’를 낳는 셈이다. 탄핵정국발 조기 대선 국면도 포퓰리즘 화력(火力)에 기름을 부었다. 다급해진 대선 주자들이 각기 다른 정치철학과 이념, 정치 공학적 이해관계 등을 구겨 넣은 백가쟁명식 공약을 불쑥불쑥 쏟아낸다.

포퓰리즘 득세를 숙명으로만 돌려선 안 된다. 뭐든지 해주겠다는 ‘메시아 공약’은 국민을 상대로 한 일종의 사기극이기 때문이다. 3가지만 당부한다. 우선, 이번 대선 잠룡들은 한국 경제의 엄중한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소비, 투자, 수출 모두 상처투성이다. 사실상 국가부채도 GDP의 100%를 넘어섰다. 이런 때 책임 있는 지도자라면 표를 잃을 각오로 용기 있게 나서서 국민에게 허리띠를 바짝 졸라매 달라고 설득해야 한다. 그래야 구조조정과 구조개혁이 잘 이뤄져 경제도 살아난다. 소득 양극화·일자리 대책을 내놓는 일도 정치인의 책무다. 그러나 ‘어떻게’는 없이 혈세로만 이를 해결하겠다는 주장은 선동이다. ‘통 큰’ 공약을 발표할 경우 지속 가능한 설계도와 재원조달 방안을 반드시 제시해야 한다.

둘째, 시민사회·연구기관·언론도 공약 검증에 적극 나서야 한다. 각 후보의 핵심 공약과 재정계획의 문제점을 따지는 매뉴얼 개발도 검토해봄 직하다. 끝으로, 이번 대선에선 유권자의 이성적 선택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표심에 알랑대는 포퓰리스트를 눈을 부릅뜨고 걸러내야 한다. 투표로 깨어 있는 국민의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

“나쁜 정책은 미래 세대를 핵전쟁보다 더 큰 위험에 빠뜨린다.” 한 전직 장관의 일침이 한겨울 칼바람처럼 귓전을 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