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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명작의 공간 게재 일자 : 2018년 03월 02일(金)
새보다 땅 밟는 시간 적은… 고층빌딩엔 여전히 ‘사무원’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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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중구 을지로6가의 두산타워. 바로 앞에 있던 동대문운동장(현 DDP)과 함께 동대문 지역의 랜드마크로 통한다. 김기택 시인은 1989년 등단 이후로도 10여 년간 대기업에서 근무했다. 시집 ‘사무원’은 그때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서정시 판 ‘미생’ 같은 작품이다. 김낙중 기자 sanjoong@

김기택 詩集 ‘사무원’ 배경 동대문역사문화공원 주변

19년전 회사원으로 일하던 시절
야구장·축구장·驛이름도 사라져
이젠 기하학적 곡선 건물 들어서

복개도로 걷힌 곳엔 인공 개울물
낡은 가게 밀려난 곳 대형쇼핑몰
드나들던 고층건물, 입구 바뀌어

회사에서 詩 쓰려 마음먹었다가
야근 탓, 회식 탓 실패했던 시절
길 위의 詩쓰기 되레 자연스러워
혼잡한 전철·버스서 상상력 발동

의자에 붙어사는 불쌍한 人生들
우스꽝스러운 과장이 공감 불러

내게 붙어다닌 ‘사무원’ 꼬리표
넥타이 맨 ‘詩人같지 않은 詩人’


세 번째 시집 ‘사무원’(1999)을 낼 무렵, 나는 15년 차의 회사원으로 두산 외식사업부서에서 일하고 있었다. 사무실이 두산타워 빌딩으로 옮긴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다. 두산타워 사무실에서 내려다보면 동대문운동장 축구장과 야구장, 청계천 냇물을 덮고 있던 복개도로와 고가도로가 보였다. 평화시장과 동대문운동장 사이의 전통시장에는 포장마차와 차량, 행인과 오토바이가 뒤얽힌 좁은 길들이 구불거리고 있었다. 넥타이를 매고 오갔던 두산타워 주변 거리를 오랜만에 어슬렁거려 본다. 동대문운동장이 사라진 자리에는 걸을 때마다 기하학적인 곡선이 움직이는 동대문디자인플라자 건물이 들어서 있고 복개도로와 고가도로를 걷어낸 자리에는 인공 개울물이 흐르고 있다. 옷이며 액세서리며 봉제 부자재 등을 파는 낡고 작은 가게들을 밀어낸 자리에는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대형 쇼핑몰이 들어서 있다.

사람 드나들 자리만 겨우 남기고 헌책들이 벽처럼 높이 쌓인 헌책방들, 원단이나 단추, 실 등 온갖 봉제 부자재를 파는 가게들이 좁은 어깨를 맞댄 전통시장은 세련된 대형 상가 빌딩들과 기묘하게 뒤섞여 있다. 동대문운동장에서 동대문역사공원역으로 이름이 바뀐 지하철역은 길과 풍경과 시간까지 바꿔 놓아서, 나는 19년 전의 기억을 찾느라 주변을 계속 두리번거린다. 내가 출퇴근하며 드나들던 두산타워 정문은 면세점으로 바뀌어 있고, 회사원들이 드나드는 통로는 건물 옆구리로 옮겨 가 있다.

내가 시인으로 활동한 기간은 대부분 회사원 생활과 겹친다. 회사 다니면서 신춘문예에 당선됐고 네 권의 시집을 냈다. 직장생활이 4년을 넘을 무렵 등단했는데, 시 쓰기를 직장생활과 병행하는 일은 생각했던 것보다 힘들었다. 쓰든 안 쓰든 시가 오냐 오냐 다 받아주던, 쓰고 싶으면 쓰고 내키지 않으면 안 써도 되는 아마추어 시절의 게으르고 행복한 시 쓰기는 끝났다.

눈 밝은 이들 앞에 내 시가 벗은 몸 그대로 노출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한 단어 한 문장을 허투루 쓸 수 없었다. 욕심껏 쓰자니 시 쓸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시구가 떠올라서 거칠게 메모해 놓고 밤에 집에서 정리하려 하면 그날 저녁은 어김없이 회식이나 일로 술을 먹어야 했고, 취해서 몇 번 토하고 초주검이 돼 집에 들어가면 시 쓸 생각은 엄두도 나지 않았다. 신바람을 내려 했던 시는 내 지친 눈꺼풀 주변을 어물거리다 날아가 버리곤 했다.

길 위의 시 쓰기는 그런 곤경에서 자연스럽게 나왔다. 일하는 시간에 사무실에서 몇 번인가 시를 써보려고 했다가 실패한 후로 나는 직장에서는 절대로 시를 쓰지 않는다는 원칙을 정해놓고 있었다. 사무실에서는 늘 보이지 않는 눈이 날 지켜보는 것 같았고, 조금이라도 뒷골이 땅기면 시적 상상력은 바로 움츠러들었기 때문이다. 부자유스럽거나 불편한 기미가 보이면 시는 내 속에 갇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시적 상상력이 활동할 수 없는 곳에서 시가 주변의 눈치를 보며 주눅 든 채 나오는 것을 보는 일은 견딜 수 없었다. 사무실이라는 공간은 시가 제멋대로 놀게 놔두는 곳이 아니었다.

출퇴근하거나 외출할 때, 길 위에 있을 때, 사방이 확 펼쳐져 있을 때, 눈에 보이는 사람들이나 사물들이나 소음이 활발하게 움직이며 나를 자극할 때, 시적 상상력은 슬그머니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주변이 아무리 복잡하고 시끄러워도, 사람들과 차량이 붐벼도, 나는 산사에 홀로 있는 듯 고요하고 편안하고 자유로웠다. 시가 나에게 요구한 공간은 조용하고 고즈넉한 장소가 아니라 시끄럽든 복잡하든 의식의 자유로움과 익명성의 편리함이 있는 곳이었다. 혼잡한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서도, 호객을 하거나 다투거나 떠들어대는 거리에서도 시적 상상력은 스스로 조용한 공간을 만들어 왕성하게 활동했다. 처음에는 펜도 종이도 준비되지 않은 길 위에서 시가 갑자기 쏟아져 나와 당황했고 놓쳐버린 시를 잡으려 헛되이 버둥거렸으나 그 변덕스러운 목소리를 받아쓸 준비를 한 후로는 길 위에서 시 쓰는 게 버릇이 됐다.

▲  김기택 시인이 퇴근길에 들렀던 청계천의 헌책방 거리. 자료사진

길은 소음과 혼잡으로 시를 방해하기보다는 시 쓰기를 자극한다. 길 위에 있을 때 내 주변은 내가 움직이는 데 따라서 움직인다. 내 시각이 움직이는 데 따라서 대상들도 움직인다. 길은 활기차다. 그 활기가 내 감각과 정서를 자극하고 상상력의 활동을 돕는다. 방 안이 폐쇄적인 공간인 데 반해 길은 열린 공간이다. ‘사무원’의 소재는 회사생활에서 온 것이지만, 시가 쓰인 곳은 길이다. 상계동의 집에서 동대문의 회사로, 회사에서 거래처로 걷거나 지하철과 버스로 오갔던 길이다. 회사를 떠난 지 1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시는 책상의 백지를 기웃거리지 않고 여전히 길에서 활보한다. 시집 ‘사무원’에는 길이나 지하철에서 관찰한 일상이 자주 나온다.



아침마다 만원 지하철은 조용하다./ 피곤한 팔다리들은 얕은 잠에 취해 있고/ 그 위로 무뚝뚝한 얼굴이 가득 돋아 있다.// 저녁이 되면 지하철은 시끄러워진다./ 얼굴들은 발그레해지고 표정 넘치도록 깔깔거리고/ 술 먹으러 가는 팔다리들처럼 활기차다. (‘출퇴근길 풍경’ 중에서)



드디어 전동차 문이 폭발하듯 열리고/ 파편처럼 승객들이 퉁겨나간다./ 승객들이 미처 다 밀려 나가기도 전에/ 한 떼의 사람들이 또 밀려 들어온다./ 빈틈, 퉁겨져나간 사람들 뒤에 생긴/ 저 좁디좁은 빈틈을 향하여/ 머리와 팔다리들과 구두들이 밀려온다. (‘우리나라 전동차의 놀라운 적재효율’ 중에서)



소음 속에서 음악 소리가 들린다./ 어느 거리에선가 시위대가 외치는 노래일는지 모른다./ 고층 유리창에 부딪쳐 흩어진 소음의 바람에다/ 내 마음이 멋대로 붙인 곡인지도 모른다./ (……)/ 집중하여 들어보면 그 소리는/ 고속 엔진이나 바퀴 소리들이 내는 화음 같기도 하고/ 경적 소리와 급정거 소리와 비명이 서로 뒤엉켜 울다가/ 공기 속에서 정화되어 은은하게 퍼져가는 소리 같기도 하다. (‘기이한 은총’ 중에서)



‘사무원’에 묘사된 인물에는 나를 비롯해 여러 회사원의 모습이 결합돼 있다. 영리를 목적으로 모인 조직인 회사는 모든 것이 계획되고 해야 할 일이 명확하게 정해져 있으며, 모든 조직 구성원에게 하나의 목표와 생각과 행동을 요구한다. 회의를 하고 업무 보고와 실적 분석을 하다 보면 회사의 목표와 계획과 업무가 내 머리가 되고 손발이 돼 있었다. 몸과 마음은 회사에 최적화돼 있어서 아침에 문밖을 나서면 발이 알아서 출근시켜 주었고 생각을 하지 않아도 해야 할 일들이 척척 손에 붙어서 업무를 해주곤 했다.



그의 책상 아래에는 다리가 여섯이었고

둘은 그의 다리 넷은 의자 다리였지만

어느 둘이 그의 다리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고 한다.



‘사무원’에는 사람 다리와 의자 다리가 뒤섞여 어느 것이 의자 것이고 어느 것이 사람 것인지 모를 정도로 의자와 한몸이 돼 버린 회사원이 등장한다. ‘의자고행’은 회계와 경리를 담당하는 동료 직원들의 모습에서 그 이미지를 빌려왔다. 나는 구매 업무를 담당하고 있어서 외근할 일이 자주 있었지만, 회계와 경리 업무를 하는 직원은 화장실 갈 때와 점심시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책상과 PC에 붙어 있었고, 거의 매일 야근을 했으며, 퇴근도 가장 늦었다. 그들의 대화 내용은 거의 매출이나 영업이익, 자금현황, 손익관리, 자금관리, 매출원가, 재고자산 등이었으며, 그들의 말은 수많은 자료에 수치와 그래프로 나타나 있었고 그 수치는 잉크 냄새가 나는 신문처럼 매일 아침 바뀌었다.

일상에서 겪는 괴로움을 고행으로 합리화시키느라 우스꽝스럽게 과장돼 있는 이 인물에는 회사생활에 적응하느라 필요한 사고 기능만 발달하고 감성이나 호기심, 상상력은 마비돼가는 내 모습이 투영돼 있다. 사무원을 책상과 일체가 돼버린 신체적인 불구로 변형시킨 것을 보면, 이 시는 생각과 행동을 습관에 맡긴 채 책상과 업무 속으로 숨으려는 나를 한껏 조롱하고 싶었던 것 같다. 자잘한 걱정거리를 크게 부풀려 자신을 마음껏 괴롭히거나 앞으로 일어날 것 같은 불길한 일들을 앞당겨와 미리 스트레스를 받는 내 소심한 성격도 의자고행의 비유에 한몫했을 것이다.

예전에 문학행사마다 나타나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문인들 사진을 찍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내 얼굴도 여러 번 봤지만 한 번도 카메라를 들이댄 적은 없었다. 몇 번 마주치니 궁금해졌는지 한 번은 나에게 문인이냐고 물었다. 사무원이라고 대답해 주었더니 그는 잠시 갸우뚱거리다가 곧 렌즈를 다른 사람에게로 돌렸다. 얼마 전에 한 문학평론가를 오랜만에 만났는데, 그는 늘 넥타이를 매고 8대 2 가르마를 타고 가방을 들고 다니던 모습으로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외모도 외모려니와 사소한 행동이며 말투며 표정에서 사무원이라는 표지가 나에게 선명하게 붙어 있는 게 분명하다.

겉모습이야 사무원이면 어떻고 시인이면 어떠랴. 두려운 것은 “습관이 모든 행동과 사고”를 대신할 만큼 의식과 감성이 굳어버려 다시는 시를 쓸 수 없는 불구가 되는 것이었으리라. “그동안 나는 여러 번 넘어졌는지 모른다/ 지금은 쓰러져 있는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제자리만 맴돌고 있거나/ 인력(引力)에 끌려 어느 주위를 공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주인’ 중에서)고 그 당시에 나는 썼다. 내 발이 땅에 닿아 있는지 허공에 떠 있는지, 서 있는지 쓰러져 있는지 모른 채 허우적거리는 내가 이 시에 보인다.

동대문 거리에서 가장 높은 두산타워 건물의 한 창문을 올려다본다. 거기에 창문으로 거리를 내다보고 있는, 흰 셔츠에 넥타이를 맨, 한 사무원이 보일 것 같다. “그는 온종일 현기증도 없이 20층의 하늘에 떠 있다./ 전화와 이메일로 쉴 새 없이 지저귀느라/ 한순간도 땅에 내려앉을 틈이 없다.” (‘그는 새보다도 적게 땅을 밟는다’ 중에서)

김기택 시인
e-mail 김낙중 기자 / 사진부 / 부장 김낙중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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