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푸른 별에서 너와 나는>“자기도 못 알아보네” … 뒤통수 맞은 듯 정신 얼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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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의규·구자명 부부 작가의 미니픽션 (4) 망량 (罔兩)

공원에 늙수그레한 사내 보여
“여기 자주 오슈?” 대꾸 없다

아이가 무엇인가 꺼내 나눠줘
“고마워라… 할애비 주는거니?”
또 다른 영감 “가짜네” 돌려줘

“너, 나 몰라?”… 그러고 보니
그 사내 어쩐지 낯설지 않았다

희노랑 빛깔로 꽃망울을 틔운 산수유가 더욱 단단한 진노랑 빛깔을 두른 것은 엊저녁에 파슬파슬 부서지며 내린 봄비 때문이라고 김 영감은 생각했다. 공원 야트막한 언덕 기스락 응달에도 연분홍빛 진달래가 아기의 철 이른 봄옷으로 서둘러 피었지만 아직은 춥다. 봄볕에 기대어 늘씬하게 서 있는 목련들의 가지 위로 어느 솜씨 좋은 화가가 비어서 성긴 곳만을 찾아 붓끝으로 툭툭 찍어 바른 듯한 목련송이가 상아 빛깔로 둥둥 떠 있다. 봄이 드는 길목에서 김 영감은 눈을 가늘게 뜨고 황홀한 눈빛으로 보이는 모든 것을 하나씩 어르며 본다. 그들을 쓰다듬고 손을 잡아주듯 본다. 겨울을 갓 벗어난 봄은 아기처럼 모든 것이 서툴다며 김 영감이 중얼거린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손주 걸음마를 돕는 마음으로 덜 무르익은 새봄을 지켜 맞이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성급한 벚꽃이 흰 불꽃으로 피어오르다 봄비에 다 꺼졌다. 땅바닥과 공원 의자에 곱게 말라붙어 웃다 만 하얀 웃음이 가슴 아팠다.

어제 산책길 위에 개미가 별로 보이지 않았다. 잠깐 공원에 들렀다가 개천가를 걸어 집으로 오는데 소소리바람 속에 비릿한 물 냄새가 달콤한 꽃내음과 섞여 불어왔다. 개천에 물놀이가 일어나며 물비늘이 햇빛에 반짝인다. 붕어들이 몸을 거세게 뒤채며 튀어 오르기도 한다. 그 조짐들로 곧 보슬비가 올 것을 안 김 영감은 가로수로 심긴 벚꽃나무 꽃들이 성급하게 다 피어난 것이 못내 안타까웠다. 빗방울 하나가 벚꽃잎을 달고 김 영감의 이마에 떨어져 비꽃이 피었다. 김 영감은 문득 그 저녁 문득 비빔냉면이 몹시 먹고 싶었다. 살짝 한기가 든 몸에 가벼운 몸살기가 돌아 냉면을 삼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전기장판의 불을 높이고 저녁밥도 거른 채 일찍 잠자리에 든 김 영감은 이튿날 아침까지 다디단 잠을 오래도록 잤다.

아침에 일어나 쪽마루에 걸터앉은 채 묽게 탄 커피를 마시니 미처 잠이 덜 깬 몸 구석구석이 모두 깨며 일어나는 것 같았다. 두 팔을 크게 뻗쳐 기지개를 켜는 순간 어지럼을 느껴 다시 쪽마루에 살그머니 앉으며 매끄러운 마룻바닥을 살살 손바닥으로 비볐다. 이것은 김 영감이 쓸데없이 개힘을 내었다가 너누룩해진 제 꼴이 민망할 때 변명처럼 하는 손버릇이다. 마치 잘못을 알고 빌기나 하는 것처럼. 그래서인지 김 영감은 파리를 싫어한다. 그가 밥을 먹을 때면 어느새 밥상머리로 날아와 두 손을 모아 싹싹 비는 꼴이 보기 싫은 것이다. 운동화를 잘 펴서 신은 김 영감이 뒷짐을 지고 공원 쪽으로 허정허정 걸어간다. 하늘은 맑고 따스한 봄바람에 온갖 꽃냄새와 새의 노랫소리가 묻어 있다. 휘휘 휘파람이라도 불며 걷고 싶었지만 이젠 입이 뾰족하게 잘 모이지 않는다. 빈속이라 그런지 묽은 커피 한 잔일 뿐인데 속이 좀 쓰린 김 영감이 갑자기 생각이 난 듯 동네 구멍가게 앞에 섰다. 엊저녁 비빔냉면에 대한 아쉬움이 아직 혀 밑에 고여 있기 때문이다. 즉석 비빔냉면을 하나 사려고 가게 문을 열려는 때 까치가 깍깍 짖어대는 통에 설핏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땅의 입김이 채 마르지 않은 하늘 빛깔과 따뜻한 공기는 꽃냄새를 품고 보얗다. 김 영감은 입맛이 갑자기 바뀌었다. 비빔냉면 말고 짜장면 맛이 더 입안에 돌았다. 결국 망설인 끝에 봉지 짜장면을 하나 집어 들고 가게를 나와 늘 다니는 길에 디디는 제 발자국을 가늠하며 마을 공원으로 걸었다.

공원 안으로 난 길에 늙수그레한 사내가 보인다. 그는 마치 김 영감의 발자국을 헤집어 되짚으며 오는 듯 땅을 굽어보며 느릿느릿 걸어온다. 김 영감이 앉은 등의자 끝 가에 말없이 털썩 주저앉는다. 곁눈으로 살피니 어딘지 낯익은 얼추 비슷한 나이의 사내인데 차림새가 좋고 얼굴빛도 기름지다. 조심스럽게 살피는 김 영감과는 달리 그는 김 영감을 단숨에 힐끗 보고는 멀리 공원 밖으로 눈길을 던졌다. 김 영감은 어쩐지 무시당하는 것만 같아서 기분이 언짢았으나 그런 그의 무례함을 멸시하기로 하자,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 김 영감이 너울가지로 말을 건넸다. “여기 자주 오슈?” 대꾸가 없다. 김 영감은 기분이 몹시 상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 사람이 벌써 귀가 먹었나?’ 그러자 그가 김 영감을 힐끔 보고는 고개를 도로 돌린다. 김 영감은 괜스레 입이 말랐다. 마른침을 억지로 몇 번 삼키니 헛기침이 올랐다.

멋쩍어진 마음에 자리를 털고 일어설까 하는데 어린이집에나 있어야 할 대여섯 살쯤 된 아이가 다가와 두 사람 사이에 앉는다. 아이가 두 영감을 번갈아 보더니 주머니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하나씩 나눠 준다. 김 영감은 입이 헤벌어지며 “아이고, 고마워라. 이거 할애비 주는 거니?” 하고 묻는다.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또 다른 영감이 아이가 준 것을 이리저리 뒤집어보다가 말한다. “가짜잖아”라며 귀찮다는 듯 아이에게 돌려줬다. 그것은 장난감 금화였다. 아이는 돌려받은 금화의 금박껍질을 까서 안에 든 초콜릿을 오물거리며 먹는다. 아이가 일어서자 김 영감은 아이에게 받은 금화 초콜릿을 웃옷 가슴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곤 자꾸 삐져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얼굴이 다 벌게졌다. 그래도 웃음이 차올라 이빨 새, 입 새로 ‘시익 시익’ 소리를 내며 웃음이 삐져나온다. 한바탕 크게 웃으면 좋으련만 있는 힘을 다해 참으니 진땀이 다 났다. 이를 악물고 참는데, 숨이 다 가쁘다.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김 영감의 얼굴은 하회탈이 됐고 ‘희엑 희엑’ 하는 괴상한 소리를 내며 터질듯한 폭소를 삭여낸다.

“미친놈!” 하는 소리에 김 영감은 더는 못 참겠다며 웃음을 터뜨리려는데 또 다른 말을 듣고는 웃음이 싹 가셨다. “너, 나 몰라? 너잖아.” “누구?” 그는 벌떡 일어나 가면서 중얼거린다. “미친놈, 자기도 못 알아보네.” 김 영감은 마치 뒤통수를 맞은 듯 정신이 얼얼했다. 그러고 보니 그 사내가 어쩐지 낯설지 않았고 금화 초콜릿을 주고 간 아이도 낯이 익었다. 웃다 만 김 영감의 콧잔등에 분홍빛 꽃잎 한 장이 내려와 앉는다. 김 영감은 문득 물냉면이 먹고 싶어졌다.

※망량(罔兩) : 장자 제물론 31;그림자 가장자리에 생기는 엷은 그림자.

글·그림=김의규 한국미니픽션작가회 초대회장·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