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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지식카페 게재 일자 : 2018년 07월 24일(火)
폭포 소리·물안개 내음까지 모두 담아… ‘우리의 山水’를 빚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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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선, 박연폭포, 종이에 수묵 담채, 119.4×51.9㎝, 18세기, 개인 소장

■ 전준엽이 만난 한국의 美感 - ⑨ 조선 ‘진경산수화’

겸재가 확립한 ‘眞景山水’
경치 속의 느낌까지 잡아
박연폭포 등 名作 그려내
中 산수화 틀 모방 벗어나

우리 눈으로 본 우리 자연
실제 풍경과는 다른 묘사
현장의 감동 더 실감나게

김홍도 작품 옥순봉 그림
화면에 들어가 바라본 듯
섬세한 느낌 표현 돋보여


풍류에 특별히 관심 없는 사람일지라도 우리 산천이 아름답다고 느낀다. 오밀조밀한 선으로 다듬어진 많은 산이 빚어내는 경치가 조금도 지루하지 않고, 사계절 덕분에 다양한 색채의 풍광을 맛볼 수 있는 것이 우리 자연이다. 조선 후기를 살았던 화가들은 우리 경치를 자랑스럽게 여겨 많은 작품으로 자부심을 담아냈다. 이런 그림을 ‘실경산수화’라고 부른다. 이름을 얻었거나 숨어 있는 절경을 찾아다니며 현장에서 보고 그리는 것이다. 19세기 유럽의 인상주의 화가들이 아름다운 풍경을 좇아 야외 사생했던 태도와 같은 이치다. 그런데 우리 선조 화가들은 단순히 경치의 겉모습만 그리는 데 머무르지 않고 풍경의 근본 모습을 찾으려고 했다. 진짜 경치를 그리려 했던 이런 시도를 ‘진경산수화’라고 한다.

풍경의 본모습인 진짜 경치는 어떤 것일까. 그건 그냥 바라만 보는 풍경이 아니라 경치를 이해하려는 입장이다. 멋진 경치 앞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다. 빼어난 경관은 물론이고 바람의 움직임, 숲이나 나무의 향기, 공기의 신선함과 온몸으로 전해오는 정취. 이처럼 오감으로 경치를 받아들일 때 풍경을 진짜로 느끼게 되는 셈이다. 이런 생각으로 그리는 것이 진경이다.

진정한 우리 그림이라 할 수 있는 ‘진경산수화’는 어떻게 태어났을까.

▲  김홍도, 옥순봉도, 종이에 수묵 담채, 26.7×31.6㎝, 1796년, 리움미술관 소장

조선은 건국부터 중국의 정신을 바탕으로 삼았다. 이를 신줏단지처럼 붙들고 나라를 운영한 세력이 양반 사대부다. 그들에게 중국은 부모였고 스승이었으며, 군주였던 셈이다. 그것은 한족의 나라 ‘명’이었다. 그림에서도 그랬다. 한나라 때 태어나 당, 송을 거쳐 명으로 이어져 발전한 그림을 그대로 따라 그리는 것이 조선 시대 화가의 목표였다. 중국에서 인정하면 조선의 최고 화가로 대접받았다.

그런 그림 중 대다수를 차지하는 것이 중국의 절경을 대상으로 삼은 풍경화였다.

조선의 화가들은 한 번도 보지 못한 중국의 경치를 그렸다. 명으로부터 들여온 채본(중국 산수화를 바탕으로 따라 그릴 수 있도록 만든 일종의 구성 도안 같은 성격의 그림 틀)이라는 걸 보고. 이런 그림을 ‘관념산수화’라 부른다. 눈으로 확인한 풍경이 아니라 머리에 들어 있는 풍경인 셈이다.

그러다가 우리 눈으로 본 우리의 경치를 그리게 되면서 참다운 한국의 풍경을 그림으로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나라에 있는 원본을 부정하는 불손한 그림이 나오게 된 셈이었다. 어떻게 이런 변혁이 가능했을까.

한족의 나라 명이 오랑캐로 불리던 여진족이 세운 청에 망하고 나서부터 이런 기운이 조선에 일어나기 시작했다. 명을 진정한 주인으로 떠받들었던 조선의 지배층은 우리보다 문화적으로 열등한 민족을 중화 문화의 계승자로 인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조선의 양반 사대부는 당시 중화 문화의 바탕을 만든 성리학 이념을 발전적으로 계승한 조선이 명의 계승자라는 명분을 세워 실천하기 시작했다. 이런 명분은 청 태종에게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리는 인조의 치욕을 감당할 정도로 강했다.

‘조선이 곧 중화’라는 사대적 명분인 조선중화주의는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의 주체적 생각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중화 문화의 원본이 조선에 있다는 생각은 문학에서 우리가 만든 한글에 대한 사랑, 미술에서 우리 풍광에 대한 관심으로 나타났다. 서포 김만중(1637∼1692)의 ‘구운몽’ ‘사씨남정기’ 등 한글로 쓴 진정한 의미의 우리 문학이 탄생한 것도 이 덕분이다.

회화에서도 우리 국토의 아름다움을 소재로 한 그림을 그리게 됐는데, 그게 진경산수화다. 우리 눈으로 확인한 우리 경치의 진짜 모습을 그리게 된 것이다.

진경의 정신을 처음 그림으로 확립한 이는 겸재 정선(1676∼1759)이다. 그는 우리 산천의 아름다움을 사생하는 데 꼭 맞는 고유 화법을 창안해 실제 모습을 치밀하게 그렸다. 최근 핫 플레이스로 떠오른 서울의 서촌 부근에서 태어나 그 주변에서 생의 대부분을 보낸 겸재는 서울의 풍광을 많이 남겼다. 인왕산을 비롯, 압구정, 마포나루, 행주나루 등 한강 인근의 풍경은 물론 남산과 북악산 등도 그렸다.

장안연우(長安烟雨-안개비 내리는 서울)라는 서정적 제목의 그림으로 겸재가 보여주는 300여 년 전 서울의 모습을 보자. 가는 비 내리는 봄날 북악산(청와대 뒷산) 서편 중턱쯤에서 내려다본 서울의 모습이다. 그림 속 나무 중 봄버들을 중간중간 그려서 계절감을 보여주고 있다. 남산이 또렷하게 보이고 그 옆으로는 아스라이 관악산, 우면산, 청계산이 보인다. 그림 중간 운무에 싸인 부분은 용산 일대와 후암동, 퇴계로쯤 될 것이다. 그림 오른쪽 산자락은 겸재가 생애 후반부를 보냈던 인왕산 기슭으로 지금의 사직동 일부쯤이다. 숲과 집이 어우러진 그림 중앙은 시청, 광화문 일대 그리고 종로 부근이다.

남산이나 관악산 등의 자연은 지금과 다르지 않다. 사람들이 만든 인공의 흔적으로 300여 년의 공간을 가늠하는 것은 어리석은 비교다. 낭만적인 마을 풍경일 뿐 지금의 서울 중심부는 상상조차 할 수가 없다. 당시 18만 명쯤 살았던 한양 중심부의 진면목을 이 그림으로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  정선, 장안연우, 종이에 수묵 담채, 39.8×30㎝, 18세기, 간송미술관 소장

겸재가 완성한 진경화법은 실제 경치를 사생하는 차원을 넘어서 경치 속에 있는 듯한 느낌까지 잡아낸다. 이런 생각은 그의 대표작 ‘박연폭포’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 그림은 한국회화사에서도 최고 명작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개성 북쪽에 있는 폭포를 직접 보고 그린 것이라 한다. 폭포 위에 바가지처럼 생긴 못이 있다 해서 이름 붙은 박연폭포는 황진이, 서경덕과 함께 ‘송도삼절’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그림은 실제 폭포와는 많이 다르다.

겸재는 현장에서 받은 감동을 더욱 실감 나게 표현하려고 실제 풍경과 다르게 그렸다. 우선 폭포의 길이와 폭이 길고 넓다. 폭포의 시작과 끝부분의 반원 모양 바위도 겸재의 창작품이다. 이 두 개의 검은 점이 폭포의 물줄기를 위아래로 강하게 끌어당기는 시각적 효과를 주기 때문에 폭포의 속도감과 역동성을 느낄 수 있다.

그림 좌우에 짙은 먹색과 거친 붓 터치로 표현한 바위 역시 겸재가 실제 현장에는 없는 경치를 그려 넣은 것이다. 이 덕분에 수직으로 떨어지는 물줄기의 힘찬 느낌이 배가되고 있다. 그리고 폭포 뒤편 절벽은 실제 경치와 똑같이 그렸는데, 옅은 색으로 처리함으로써 폭포 소리가 울려 나오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한다.

거대한 폭포와 마주했을 때 그곳에는 눈을 압도하는 절벽과 함께 소리도 우렁차게 들릴 게다. 그리고 촉촉한 물안개와 신선한 내음이 촉각과 후각을 자극할 것이다. 또 이 모든 감각이 합쳐 느껴지는 청량한 기운이 마음을 깨끗이 씻어준다.

겸재는 이 모든 것을 ‘박연폭포’에 담아냈는데, 단순히 보는 풍경이 아니라 오감으로 체험하는 풍경이 진짜 경치를 감상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겸재와 함께 진경산수화의 거봉으로 꼽히는 단원 김홍도(1745∼?)가 이끄는 옥순봉의 모습을 따라가 보자. 옥순봉은 단양 팔경에 속하는 명승지로, 지금은 충주호 조성 때문에 반쯤은 물속에 있다. 1796년 4월쯤 그린 것으로 보이는 ‘옥순봉도’에는 봄의 정취가 촉촉하게 스며들어 있다.

▲  전준엽 화가·미술저술가
봄의 다사로운 공기 속에 강에서 피어오른 물기운이 병풍처럼 치켜선 옥순봉 발치를 부드럽게 감싸고 있다. 봄 햇살에 녹은 물안개는 뒷산을 화면 깊숙이 밀어내며 공기원근법(가까운 경치는 진하게 먼 경치는 흐리게 그려서 공간을 표현하는 서양화 기법) 효과를 보여준다. 옥순봉의 다섯 봉우리는 점진적으로 낮아지며 묘한 리듬감을 준다. 화면 중심에 그린 가장 높은 봉우리를 기준으로 양쪽의 산세가 같은 기울기를 이루며 화면 전체에 탄탄한 안정감을 준다.

이 그림은 옥순봉을 그냥 바라보는 식으로 그리지 않았다. 카메라의 뷰파인더를 통해 풍경을 바라보는 시점(서양의 풍경화 조형 방식)으로 그린 것이 아니다. 작가가 풍경을 바라보는 시점이 화면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화면 속에 있다.

옥순봉을 바라보는 단원의 위치는 그림 속 오른쪽 아래 배를 타고 있는 사람의 시점이다. 배에서 바라볼 때 가장 가까운 곳은 옥순봉의 오른쪽 아랫부분이다. 옅은 물안개 속에 언뜻 보이는 나무와 바위들은 선명하고 꼼꼼하게 그려놓았다. 배에서 가장 가까운 봉우리도 짙은 먹 선으로 강하게 나타냈다. 또한 옥순봉의 깎아지른 절벽의 느낌을 강조하기 위해 가장 큰 봉우리의 허리 부분을 흐리게, 머리와 발치 부분은 짙게 그렸다. 이는 절벽의 높이와 수직 벽의 힘찬 느낌을 강조하려는 의도적 표현으로 보인다.

먹으로 산세와 사물의 윤곽을 그리고 옅은 채색을 입힌 수묵담채화의 전형적인 기법인데,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기운이 감돈다. 갈색 톤과 청색 톤의 은은한 대비는 봄의 느낌을 불어넣기 위한 장치다. 선의 굵기에 변화가 없어 보이는데 한 가지 붓으로 현장에서 그린 것으로 보인다. 붓의 단조로운 선이 오히려 봄의 부드러운 기운을 표현하는 데 있어 더 효과적으로 보인다.

정선의 진경산수화가 경치의 스펙터클한 느낌에 치중하고 있는 데 비해 김홍도는 경치를 마주했을 때의 섬세한 느낌에 무게를 두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문화일보 6월 26일자 22면 8 회 참조)

전준엽 화가·미술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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