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효정의 에로틱 시네마>밋밋한 일상에 염증난 작가지망생 유부녀, ‘무일푼’ 작가와 性的 일탈

  • 문화일보
  • 입력 2018-07-31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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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북회귀선’

미국 소설가 헨리 밀러의 ‘북회귀선’(Tropic of Cancer)은 1930년대 프랑스 파리를 배경으로 자신과 주변인들의 일상을 쓴 자전소설이다. 9년간 파리에 머물며 매일 밤 술과 여자를 탐닉했던 밀러의 방탕한 방랑이 소설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적나라한 성 묘사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억압이 문명의 가장 큰 질병이라고 생각했던 밀러의 인류를 위한 선동(煽動)이자 문학을 통한 반기(反旗)였다. 프랑스에서는 1934년에 출판됐지만 정작 그의 고국인 미국에서는 음란하다는 이유로 30년 후인 1964년에 나왔다.

필립 코프먼 감독의 1990년 연출작 ‘북회귀선’(Henry & June·사진)은 밀러의 소설 탄생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두 명의 여성 아나이스(마리아 드 메데이루스)와 준(우마 서먼)의 관계를 통해 소설이 완고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렸다. 1931년 파리. 작가 지망생 아나이스는 성공한 금융가 남편을 둔 덕에 호의호식하며 소설 집필에만 몰두하고 있다. 책은 생각대로 진행되지 않고, 안락하고 밋밋한 자신의 일상에도 염증이 날 무렵 남편은 파리에서 사귄 새 친구들을 소개해 준다. 그중 한 명인 뉴욕 출신의 헨리(프레드 워드)는 돈 한 푼 없이 파리를 전전하는 가난한 작가다. 주변인들의 주머니를 털고 다니며 연명하는 인생이지만 그의 삶은 에너지와 영감으로 가득하다. 아나이스는 그의 문학적인 재능과 자유로운 사고, 무엇보다도 성적인 매력에 반한다. 친절하지만 변화를 두려워하는 남편에게 회의를 품고 있던 아나이스는 헨리와 마주칠 때마다 심장이 뛴다. 그를 향한 욕망이 커가는 것을 모른 채 남편은 틈만 나면 예술가 친구들과 헨리를 불러들여 아나이스가 이들과 가까워지게 부추긴다. 어느 날 집시들의 거처에서 열린 파티에 간 아나이스는 헨리의 부인 준을 만난다. 뉴욕 브루클린 출신인 준은 에펠탑을 적시고도 남을 정도로 빛나는 금발에다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몸을 가졌다. 쉴 새 없이 지껄이는 허풍 섞인 무용담과 천박한 말투에도 아나이스는 준의 아름다움에 매료된다. 파티 내내 깊은 관계를 약속하는 키스를 나눴지만 준은 뉴욕으로 떠나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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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망해진 아나이스의 연소되지 못한 욕정은 이내 헨리에게로 향한다. 수많은 여자를 상대해 온 헨리는 동물적으로 아나이스의 욕망을 감지한다. 욕망의 출처가 무엇이든 돈 많고 권태로운 아나이스는 헨리에게 반가운 존재다. 관능적인 댄서들이 가득한 파리의 한 술집에서 재회한 두 사람은 춤과 음악, 사람들의 취기가 절정에 이를 때 무대 뒤로 숨어든다. 서로 엉겨 붙어 춤을 추고 있는 무희들의 그림자 한가운데서 아나이스와 헨리는 아슬아슬한 정사를 벌인다. 상상만으로 만족해야 했던 금기의 영역으로 자신을 내던진 아나이스는 쾌락과 자유의 절정을 느낀다. 준을 상상하며 헨리의 몸을 받아들일 때 쾌감은 배가된다. 준의 금발 머리가 가슴을 스치고, 그의 길고 매끈한 다리가 자신의 다리와 감기는 상상을 하며 아나이스는 집요하고 말초적인 쾌락에 밀착한다.

남편과 관계할 때 아나이스는 헨리를 생각한다. 그의 거친 손길과 대범함을 기억으로부터 소환한다. 아나이스의 몸은 자신의 작품을 위한 예술적 채널이다. 섹스하고 있는 상대를 비(非)체화시키고, 욕망의 대상을 몰래 상상하며 쾌감을 증가시키는 아나이스의 의식은 그가 책을 쓰기 위한 훈련이다. 아나이스는 준을 향한 사랑을, 헨리를 향한 욕망을 담고 있는 인물들을 창조해 결국 그의 첫 책을 완성한다. 그러나 폭력적이고 이기적인 헨리를 참지 못한 아나이스는 결국 그를 떠나고, 헨리는 오랜 시간에 걸쳐 쓴 ‘북회귀선’을 탈고한다.

이 영화는 금기와 제도에 도전함으로써 근대 문학의 진보에 기여했던 소설 ‘북회귀선’의 탄생을 회고하지만 영화의 중점은 아나이스의 성적 일탈에만 맞춰져 있다는 약점이 두드러진다. 그러나 아카데미 촬영상에 노미네이트될 정도로 아름다운 영상은 문학에선 불가한 영화만의 고유한 강점이기도 하다.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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