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푸른 별에서 너와 나는>“이북 고향에 홀로 남으신 어머니, 예까지 오셔서 기다리신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그림 = 김의규 화백

구자명·김의규 부부 작가의 미니픽션 - (13) 비 내리는 고모역¹

단신 越南한 실향민 시아버지
동란중 어머니·여동생과 이별
이산가족 상봉 1차부터 신청

아흔 두 살 생애 마감 며칠 전
아들 불러 다시 상봉신청 부탁

빛바랜 수첩속 누런 詩 한편
큰아들·시누이 숙연한 경청
“어머니가 그리웠던 할아버지
핑생 가심에 비가 내？던기라”

“우와, 할아버지 살아계셨으면 우리도 저거 맛보는 건데, 쩝.”

식혜를 벌컥벌컥 들이켜던 막내가 TV 뉴스를 일별하더니 말했다. 간밤에 늦게 내려와서는 집안 남정네들 틈에 끼어 겁 없이 가양주를 마셔대더니 부석부석해진 얼굴이 티를 냈다.

경산댁은 마흔이 낼모레인 딸년이 철딱서니라곤 도통 없이 시들어 가는 게 참 딱했지만, 마루에 나가 담배를 피우고 있는 영감이 행여 들을까 나직이 대꾸했다.

“와 아이라, 니 아부지가 할부지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그 일로 관에 들락거？다 아이가. 이래 일찍 그기 다시 시작될 줄 누가 알았노.”

시아버지가 원산서 부르주아 반동 지식인으로 찍혀 동란이 터지기 얼마 전 홀어머니를 두고 단신 월남한 실향민이란 건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는 전쟁 중에 미군 통역이 돼 종군하는 동안 서울 수복 직후 어머니를 모셔올 기회가 있었는데 신중을 기하느라 머뭇대다 때를 놓쳐버렸다고 들었다. 2대 독자였던 그는 집을 떠날 당시 여학교를 갓 졸업한 어린 처녀였던 동생이라도 찾고픈 생각에 이산가족 상봉을 1차 때부터 계속 신청했으나 북측의 반동자 명단에 들어 있었는지 번번이 좌절되고 말았다. 지난봄, 그는 앞서간 아내의 10주기 즈음 아흔두 살의 생애를 마감하기 며칠 전에 아들을 병실로 불러 지시했다. 적십자사에 이산가족 상봉 신청을 새로 하라고 이르고는 귓속말로 때가 머지않았어, 하며 미소 지었다던 시아버지. 그의 예견은 신기하게도 들어맞아 이산가족 상봉은 3년 만에 재개됐다. 추석 전 남북정상회담을 마치고 돌아온 대통령이 그쪽에서 선물 받은 송이버섯 2t을 미상봉 이산가족에게 나눠 보낸다는 뉴스가 추석 며칠 전부터 화제가 된 터였다. 방금 막내가 보고 침을 삼키며 부러워한 것은 어느 90대 할머니가 버섯을 받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었다. 흐으유, 아부지가 쪼매만 더 사？더라믄…. 그러잖아도 이른 아침부터 한숨을 푸지게 섞어 중얼거리던 영감이 경산댁은 마음에 걸렸다.

“그기 뭐 방사능으로 떡칠한 버섯이라 카더라. 주산지가 칠보산이라꼬, 바로 옆에가 핵실험장이라 카대…. 갸들은 묵지도 않는 거를 받아와 가꼬 저 난린 기라 마. 웃기제, 조카.”

차례를 마치기 바쁘게 떠나려는 큰아들 내외를 붙잡아 앉힌 시누이 남편이 제주를 한 사발 그득히 따라 내밀며 따리를 붙였다. 간밤에 모여 앉아 한잔들 하는 중에 미국서 사느라 이번 명절에도 못 온 작은 아들네의 전화를 받고 나서 트럼프 얘기가 나왔고 자연스레 남북문제로 화제가 옮겨 가 설왕설래하던 끝에 ‘좌우’ 충돌이 좀 있었다. 하지만 내내 묵묵히 듣고만 있던 철의 속내는 누구도 분명하게 알기 어려웠다. 경산댁은 신혼 때부터 남편의 연년생 누나가 미혼모로 낳은 그 아들을 머리 굵도록 키웠기에 그래도 그 성질을 좀 알았다. 철이 말을 아끼면 상대방에게 동화되지 않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의 처가 눈치를 채고 시고숙을 만류했다.

“어둡기 전에 부여 어머니께 가려면 곧 떠나야 하는데 이 사람 그거 마시면 운전 못 해요.”

“자네가 하믄 되잖아?”

“저, 장롱면허예요, 고모부. 하하.”

스스로도 운전을 곧잘 하고 다니는 걸로 아는 며느리가 시치미를 뗐다. 막내가 제 올케를 거들고 나섰다. 큰오빠에게 낳아준 부모가 따로 있다는 걸 알게 된 이후로 왠지 더 잘했다.

“고모부, 고모부는 고모 운전면허도 못 따게 하시고선 뭘. 에고 언제나 우리 집안에 남녀 대동세상이 구현되려나?”

시누이는 그 틈을 타 제 남편에게 눈치를 주어 술잔을 놓게 만들고는 마루에 걸터앉아 기척 없는 오라비를 불렀다. 경산댁이 곁눈질로 보니 그는 아까부터 차례상에 놓인 부모님 신위를 향해 간간이 눈길을 돌리는 것 말고는 무릎 위에 놓인 뭔가에 온통 정신이 팔린 듯했다.

“오빠, 내도 곧 가야 하는데 대구서 뭐 시킬 일 없어요? 인자 우리 이름으로 상봉 신청 해보믄 어떠까예? 우리라도 북의 고모 만나게 되마 하늘에서 아부지가 좋아하실 낀데….”

경산댁은 누이가 불러도 묵묵부답인 영감이 걱정돼 슬그머니 뒤로 다가갔다. 그는 낡은 수첩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기억하건대 대구에서 미군 부대 군속으로 오래 일한 시아버지가 은퇴할 즈음부터 지니고 있던 수첩이었다. 국방색 가죽 표지에 은빛 돋을새김 활자로 ‘Memoirs’라고 적혀 있었다. 언젠가 미국서 다니러 온 아들에게 물어보니 ‘회고록’ 같은 거라고 했다. 영감의 시선을 붙들고 있는 것은 그 수첩의 표지 안쪽에 붙여놓은 누르스름한 신문 쪼가리였다. 무슨 시 같은 것을 소개한 기사처럼 보였다.

“보소, 정이 아부지. 그기 뭐요?”

경산댁은 데려온 아들, 낳은 아들을 분별하는 마음을 경계해 딸이 태어나고부터는 그 호칭으로 남편을 불러왔다. 영감이 그제야 정신이 드는 듯 고개를 드는데 눈가가 흥건히 젖어 있었다. 제 이름이 들렸는지 막내가 쭈르르 달려오더니 수첩을 들어 올려 읽기 시작했다.

고모역을 지나칠 양이면 / 어머니가 기다리신다. / 이제는 아내보다도 별로 안 늙으신 / 그제 그 모습으로 / 38선 넘던 그날 바래주시듯 / 행길까지 나오셔 기다리신다.²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구자명 소설가

막내가 낭송을 이어가는 동안 시누이 내외와 큰아들 내외도 마루로 나와 숙연한 표정으로 경청했다. 달라진 좌중의 분위기가 어색했는지 막내가 씨익 웃으며 눙쳤다. “얼래, 이 동네 비 오게 생겼네.” 그러자 영감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니 말이 맞다. 할아부지는 핑생 가심에서 비가 내？던 기라…!” 딸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시를 마저 읽었다.

이북 고향에 홀로 남으신 채 / 그 생사조차 모르는 어머니가 / 예까지 오셔서 기다리신다.³

구자명 소설가

한국미니픽션작가회 창립위원장

* 주(註)1은 대구-경산 사이에 위치한 고모령에 인접한 폐역.
2와 3은 각각 구상의 시 ‘고모역(顧母驛)’의 첫 연(聯)과 마지막 연에 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