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들에게 “비밀통장 만드세요”…사립유치원 ‘관행이 된 비리’

시간연장반 등 허위 신고한 뒤
교사에 지급된 돈 원장이 관리
감사 받아도 꼼수 발견 어려워

“이번엔 선생님이 통장 만들 차례예요.”

서울의 한 사립유치원에 5년째 근무 중인 교사 A 씨는 올해 초 유치원장으로부터 교사 본인 명의로 도장을 만들고 통장도 개설해 오라는 얘기를 들었다. 통장·계좌 비밀번호도 원장이 알려준 번호로 설정해야 했다. A 씨가 개설해 가져온 통장은 원장이 직접 보관했다. 이후 따로 본 적도 없었다. A 씨는 나중에야 동료 교사로부터 “선배 교사들도 그랬는데 선생님이 만든 통장은 정부로부터 ‘시간연장반’ 지원금을 받는 용도로 사용된다”고 들었다. 알고 보니 A 씨는 사실 유치원에서 운영 중이지 않아도 허위로 신고한 시간연장반 담당 교사로 이름이 등록돼 있었다. 담당 교사에게 지급하는 정부 지원금은 원장이 인출해 관리했다. 사용처는 알 수 없었다. 후에 온라인으로 계좌 내역을 조회한 A 씨는 매달 50만 원가량의 돈이 들어오고 있음을 알게 됐다. 이 유치원에 A 씨와 같이 통장을 만들어 제출한 동료 교사는 A 씨 외 2명이다.

23일 문화일보 취재 결과, 일부 사립 유치원 원장이 유치원 교사들을 상대로 돌아가며 ‘차명 비밀통장’ 개설을 요구해온 것으로 밝혀져 비리 의혹이 증폭되고 있다. 직접 정부의 지원금을 받았는데도 사용처는 전혀 알 수 없는 눈먼 돈으로 전락했던 셈이다.

지방의 한 사립유치원 교사 B 씨도 2015년 교사로 채용되자마자 개설한 통장을 유치원에 반납해야 했다. 비밀번호는 알지도 못한 채 원장이 요구한 번호로 설정됐다. 정부 지원금은 다시 원장의 계좌로 송금되고 있음을 최근 알게 됐다. 경기도 한 사립유치원 교사 C 씨는 “채용을 대가로 용도도 알 수 없는 통장을 반납해야 하는 건 물론, 유치원 측에서도 근로계약서는 한참이 지나고서 쓰자고 했다”며 “유치원 교사 커뮤니티에서도 수년째 가장 큰 비리로 꼽히던 유치원 교사 지원금 유용 등 사례도 이제야 드러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사립유치원의 이런 관행은 지원금을 주로 현금으로 찾아 사용하면서 발생하는데, 사용 내역을 알기 힘들다. 차명계좌 이용 등은 금융거래법 위반에도 해당될 수 있다. 이동규 변호사는 “명의자와 다르게 사용자가 다른 점은 물론 불법적으로 자금을 유용하는 점을 볼 때 금융실명거래법 위반, 유아교육법 위반 등에도 속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상황이 이런데도 적발은 쉽지 않은 실정이다. 3년에 한 번꼴로 시·도 교육청 감사가 진행되는 데다, 회계장부를 보여주고 이상이 없는지 검사받는 수박 겉핥기 식 감사에 그치기 때문이다. 교육청의 감사 인력에는 국·공립 유치원 출신 인력이 많아 사립유치원의 이 같은 회계 시스템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 한 지방교육청 유아교육과 관계자는 “특히 종합감사가 아니라 교육과정, 회계, 운영 등 제각각 감사가 이뤄지는 경우엔, 특정 비리 사안을 숨기는 건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김기윤 기자 cesc30@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