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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지식카페 게재 일자 : 2019년 03월 13일(水)
‘시간의 더께’가 묻은 건축물… 역사와 기억을 소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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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개의 물탱크를 활용해 만들어진 윤동주 문학관. 물탱크 중 하나(왼쪽)는 공간을 최대한 보존해 윤동주 시인이 투옥됐던 감방을 재현했고, 나머지 하나는 지붕을 헐고 개방해 시인이 꿈꾸었던 ‘자유’를 표현했다. 김선규 기자 ufokim@

■ 김광현의 건축으로 읽는 일상 풍경 - ⑭ 과거·현재·미래 다리 놓아주는 두 구조물

- 佛낭트시 ‘노예제 폐지 기념비’
부두밑 좁은 350m 지하공간에
노예선 이름·거래항구 등 적은
2000개의 유리타일 박아 놓아
부끄러운 과거 반성 상징으로

- 종로구 ‘윤동주문학관’
안전점검중 발견한 물탱크 2개
한 개는 지붕헐어 중정 만들어
다른 하나는 폐쇄된 채로 유지
시인의 투옥과 자유 갈망 표현


비인간적이고 획일적이며 무표정한 철근 콘크리트 건축이 도시의 역사를 증언한다. 그리고 집단의 시간을 기록하며 상상을 이끌어 낸다. 프랑스의 가장 중요한 항구 도시 낭트(Nantes)는 대서양을 횡단하던 4000여 개 노예무역선 중 45%가 오가던 곳이다. 이때 배로 실려 간 아프리카 노예는 무려 50만 명. 이렇게 노예를 태운 배는 이들을 서인도 제도 등에 팔았고, 돌아올 때는 그곳에서 생산되는 설탕, 커피, 담배 등을 싣고 왔다. 낭트는 이런 삼각무역으로 큰 부를 누렸다.

그러나 이런 노예제는 1848년에 폐지됐다. 낭트 시는 노예제가 폐지된 지 150년이 되던 1998년 자기들의 부끄러운 과거를 드러내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2012년에 도시 중심부를 지나는 루아르(Loire) 강을 따라 길게 놓여 있던 주차장 자리에 ‘노예제 폐지 기념비’(Memorial de l’abolition de l’esclavage)를 완성했다. 노예선이 출발하던 부두였던 이곳에는 본래 18세기에 세운 방파제가 남아 있었는데, 20세기에는 그 방파제 위에 삼각형 모양으로 보강한 철근 콘크리트 구조물을 강변을 따라 낮고 길게 세웠다. 그러나 4m씩이나 넘쳐 오르는 조수 때문에 그 밑에 있는 공간은 매일 물에 잠겨 있었다.

노예제의 쓰라린 과오를 기억하는 기념비는 새로 크게 지은 건물이 아니라, 이 부두 밑에 있던 좁고 긴 철근 콘크리트 구조물의 공간이었다. 주차장으로 쓰이던 길바닥에는 2000개나 되는 유리 타일을 묻었다. 그중 1710개는 낭트 항을 떠난 노예선의 이름과 날짜가, 나머지 290개에는 노예 거래처와 거래항구 이름이 적혀 있다. 계단을 내려오면 긴 지하통로가 전시 공간이 돼 노예제의 역사를 말해 주고 있다. 통로의 한쪽에는 기둥 사이로 넘실거리는 강이 보이고, 다른 한쪽에는 45도 기울어진 거대한 유리판에 어두운 과거를 증언하는 노예제 폐지 이전의 문서, 노래, 문학, 개인의 기록 등이 적혀 있다.

▲  낭트 시의 ‘노예제 폐지 기념비’. 낮고 길고 좁은 지하 공간은 노예선의 극한의 공간을 은유한다. ⓒPhilippe Ruault

350m나 되는 이 전시장은 부두 밑에 버려진 공간을 시민이 늘 다니는 일상 공간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낮고 길고 좁은 지하 공간은 대양을 항해하는 노예선에 감금된 극한의 공간을 은유하며 도시의 부끄러운 기억을 되살린다. 이 모든 것을 묶어서 역사를 환기하는 것은 강 속에 잠겨 감히 그 속을 걷게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철근 콘크리트 구조체 공간이다. 그러나 이 버려진 구조물이 도시의 기억을 불러낼 수 있었던 것은 과거를 반성하고 미래에 바른 교훈을 전해 주어야겠다는 낭트 시민의 정신이었다.

이런 콘크리트의 기억 공간은 창의문 근처에 있는 ‘윤동주 문학관’(尹東柱 文學館)에 더 잘 나타나 있다. 1974년 지어졌던 청운아파트가 2005년에 없어지면서 그 터에 청운공원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아파트가 사라지면서 고지대에 수돗물이 잘 나오라고 만든 가압장은 2008년에 용도 폐기된 채 초라한 건물로 남아 있었다. 그러던 중 윤동주가 연희전문에 재학하던 시절 종로구 누상동에서 넉 달 하숙하며 그의 대표적인 시들이 지어졌다고 생각한 종로구청과 윤동주문학사상선양회는 청운공원의 한 부분을 ‘윤동주 시인의 언덕’으로 불렀다. 그러다가 이 ‘시인의 언덕’과 함께 그 일대가 윤동주를 기리게 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으나 한양도성과 인접한 곳이라 신축이 불가했으므로 2010년 가압장 건물을 임시 문학관으로 삼았다.

이제는 리모델링되고 상도 많이 타서 유명해진 윤동주 문학관이지만, 임시 문학관이었을 때의 사진을 보면 한쪽 벽에는 학사모를 쓴 윤동주의 얼굴 그림이 조그맣게 붙어 있었고 푸른 셔터 문 위에는 ‘윤동주 문학관’이라 쓰인 허름한 현수막 한 장이 걸려 있는 초라한 건물이었다. 그게 다였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겼다. 2011년 여름 기본설계가 거의 마무리돼 갈 때 당시 집중호우로 우면산 산사태가 크게 일어났던 때라 이런 피해를 입지 않게 대비하기 위해 임시 문학관 일대를 점검하다가 우연히 이상한 옹벽을 발견하고 이 옹벽에 대해 안전진단 조사를 했다. 그런데 그 벽은 옹벽이 아니라 청운공원을 조성할 때 묻힌 콘크리트 물탱크의 벽면이었음을 알게 됐고, 더구나 그것에 면해 똑같이 생긴 물탱크가 하나 더 붙어 있음을 발견하게 됐다.

두 개의 물탱크는 원래 크기와 높이가 똑같았다. 그러나 건축가는 한 개는 지붕을 헐어 중정으로 바꾸었고, 다른 하나는 공간을 최대한 보존해 시인이 투옥됐던 감방으로 표현했다. 지붕을 헐어 개방된 물탱크는 하늘이 올려다보이는 자유를, 폐쇄된 또 다른 물탱크는 형무소 감방의 공포를 효과적으로 드러냈다. 오랜 시간에 걸쳐 물때가 두껍게 끼어 있는 벽면은 윤동주의 감금과 투옥, 시간, 고문, 고통을 나타내는 데 적격이었다. 폐쇄된 물탱크에는 위쪽으로 작은 구멍 하나가 뚫려 있다. 작업자가 드나들던 이 구멍은 어둑한 공간을 비추는 한 줄기의 채광창이었다. 건축가는 그 구멍을 오르내리던 사다리를 잘라내고 흔적만 남겨둠으로써, 환한 자유를 갈망했지만 어두운 감옥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시인의 질곡을 표현해 주었다.

지붕을 털어낸 물탱크의 벽 위로는 그 전부터 그 자리에서 자라고 있던 팥배나무가 하늘과 함께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수법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새로 계획한 건축물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는 풍경이다. 그런데도 이곳을 ‘열린 우물’이라 이름 지어 부르자 윤동주의 시 ‘자화상’(自畵像)에 나오는 ‘우물’이라는 시어를 투사한다. 푸른 하늘은 올려다보는 우물이 되고 벽면의 오래된 물때는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로 홀로 찾아간” 깊은 우물을 그대로 연상시킨다.

윤동주가 누구인가? 일본 유학 중 항일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 투옥됐고, 28세의 나이에 옥중에서 요절한 민족 시인이다. 기록으로는 뇌일혈로 돼 있지만 실제로는 생체실험으로 사망했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윤동주라는 이름에는 민족 모두의 애절함이 고스란히 스며 들어가 있다. 그래서 그의 죽음은 이 민족의 죽음을 대신한 것이었다.

그러나 엄밀하게 보아 가압장과 물탱크는 시인 윤동주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것은 모두 감정이입이고 서로 다른 물질이 주는 의미의 인위적인 연결이다. 그런데도 어떻게 우리 모두가 이 공간이 주는 의미와 감정에 동의할 수 있으며, 윤동주를 기리는 문학관이 될 수 있는가? 그것은 회화도, 조각도, 영화도 그 어떤 장르의 예술도 이런 물체의 의미를 결코 만들 수 없지만, 오랜 시간 누렇게 물때가 묻는 무기적인 콘크리트 구조물에 생기를 넣은 건축만이 이런 감정을 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건축만이 견고한 물체와 공간이 빛과 시간을 통해 윤동주를 불러내고 윤동주를 기리는 시가 될 수 있었다. 이것이 건축의 힘이다.

건축은 새로움만을 향해 앞으로만 나가는 물체가 아니다. 건축은 뒤를 돌아보는 물체다. 그래서 사람들은 실제로 공간, 장소, 나무나 사물 속에서 ‘저기에 학교가 있었는데, 거기 아주머니가 어땠는데…’라는 기억을 누적해 간다. 사람이란 늘 많이 보던 사람이나 늘 대하던 사물을 보면서 이야기하고 살게 돼 있다. 이런 공간, 장소, 나무, 사물 속에 누적된 모든 것을 합한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집이다. 그래서 집은 변하지 않는 지속적인 가치를 생각하게 하고 깊이를 더한다.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 말을 바꾸어 보면 “집은 존재의 언어”가 된다. 그래서 윤동주 문학관이라는 집은 “윤동주라는 존재를 말하는 언어”다.

독일 철학자 알라이다 아스만(Aleida Assmann)이 말했듯이 역사는 무엇이나 관심을 가지고 모든 것이 똑같이 중요해서 기억의 소유자가 없어진 문건을 보관하는 장소다. 역사는 이전을 기억하는 한 가지 방식이지만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에게서 우러나온 기억이 아니다. 그리고 어떤 부분은 생각이 나지만 어떤 부분은 잊어버리며 선택한다. 그러나 ‘집단 기억’은 개인이나 공동체가 실제로 경험한 것이며 그들에게 귀속한다. 집단 기억은 과거, 현재, 미래에 다리를 놓아주고, 개인이나 공동체의 정체성을 가져다준다. 집단 기억은 개인과 강한 관계가 있으며 이것을 이야기로 만든 것이다. 개인의 기억이 공동체에 결부되기도 하는 기억이다. 따라서 윤동주는 역사가 아니다. 우리 모두의 집단 기억이다.

▲  김광현 서울대 건축학과 명예교수
용도가 폐기됐다가 오랫동안 땅속에 묻혀 버린 가압장과 물탱크는 이미 사라진 것들이므로 요약된 과거다. 그런데 이것이 또 다른 과거인 윤동주를 만나 우리 모두에게 숙고의 공간으로 나타났다. 물탱크를 보고 보물이 될 거라고 직감한 구청장이나, 물탱크를 처음 보고 울림이나 한 줄기의 빛과 물때의 가치를 알아본 주무관에게도 구조물은 시로 나타났다. 전시할 물건도 없는 문학관. 그런 제약을 알면서도 억지스럽게 이야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어색함을 알아차린 공원녹지과 과장은 윤동주 시인의 조카인 윤인석 교수에게 전화를 걸어 친필 원고 하나만이라도 기증해 달라고 간청했다. 종로구청이 시인을 상품화한다고 생각하고 있던 윤 교수는 이 말과 함께 전시관의 진정성을 감지하고 연세대에 기증하기로 한 친필 원고의 영인본을 다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이렇게 아무 관계도 없는 물탱크의 과거는 만드는 사람, 기획하는 사람의 진정성을 통해 살아날 윤동주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압장과 물탱크는 윤동주의 실제 삶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장소이고 건물이다. 그런데도 가압장의 공간적 특질은 윤동주의 일생과 시의 세계를 표상할 수 있다. 그러나 정작 기념비와 기념관이 되는 것은 건물 그 자체에 있지 않고 사건과 장소를 기리며 기념하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 일상에서 기억하고자 하는 사회 전체의 공통적인 의도에 있다.

책상 앞에서 글을 쓰다가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라 서가에 있는 어떤 책을 참고하면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한참 있다가 서가 쪽으로 몸을 옮겼는데 조금 전 내가 무슨 책을 떠올렸는지 생각이 나지 않을 때가 간혹 있다. 그러면 다시 앉았던 자리로 돌아와 만지던 물건에 손을 대는 등 그 전에 했던 행동을 다시 해보면 내가 찾던 책이 어떤 것이었는지 기억 날 때가 있다. 이렇게 기억은 본래 자리에 묶여 있다. 낭트 시의 ‘노예제 폐지 기념비’나 ‘윤동주 문학관’이라는 장소와 구조체는 개인과 공동체의 기억을 되살려준다.

우리에게 윤동주의 유해는 없다. 그러나 그를 기억한다는 것은 곧 나의 정체성을 찾는 것이다. 그가 누구였고 어떻게 살았는지를 몸으로 기억하고 싶을 때 ‘윤동주 문학관’을 가라. 그러면 물탱크였던 철근 콘크리트 구조물이 탁월한 설계를 통해 다시 살아나 희미하게나마 그를 기억하게 해 준다. 역사와 기억이란 종이에만 쓰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돌과 나무에, 그리고 콘크리트에 훨씬 더 잘 기록된다. 그래서 존 러스킨(John Ruskin)은 ‘건축의 일곱 등불’(1849)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간의 망각을 거부하는 강한 정복자는 시와 건축, 오로지 둘뿐이다.”(문화일보 2월20일자 23면 13회 참조)

서울대 건축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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