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준모의 미술동네 설설>깨끗·정직함 담아낸 풍죽도… 장관후보들은 어떻게 그릴까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5만 원 권 지폐 뒷면, 어몽룡이 그린 매화나무의 배경처럼 어슴푸레하게 표현된 이정의 ‘풍죽도’. 간송미술관 소장

서울 한복판서 만난 푸른나무
청문회대신 竹圖 그리게 하고
마음 자세와 됨됨이 본다면…

요즘 절개, 지조 따위의 단어를 말하면 ‘꼰대’라는 덤터기를 쓰기 십상이다. ‘지금이 조선 시대냐’고 힐난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말을 입에 올리는 것은 우연히 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 다음 날 서울 한복판의 절집 마당에서 대나무 숲을 만난 때문이다. 밀가루를 뿌린 듯한 미세먼지에도 푸르름은 빛났고, 예기치 않게 몰아치는 바람에도 꼿꼿함을 잃지 않았다. 다만 잠시 후 색과 향기로 유혹할 꽃 때문에 자신이 가려질 것을 예감한 듯 ‘세상을 똑바로 보라’고 최선을 다해 초록을 뿜어내고 있었다.

문인들은 고결한 군자를 닮은 매화, 난초, 국화 그리고 대나무를 사군자라 하고 이를 즐겨 그렸는데 그중 대나무를 으뜸으로 여겼다. 대나무의 변함없는 푸르름과 깨끗하고 맑은 자태는 많은 시인 묵객의 사랑을 받았다. 이들은 대나무를 보고, 그림으로 그리고, 그 그림을 감상하며 푸르고 곧고 강인한 대나무를 삶과 행동으로 배우고 따르고자 했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정준모 큐레이터·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사군자는 산수나 인물과 달리 서예의 원리와 기법을 응용해 쉽게 그릴 수 있어 직업 화가들은 물론 문인 사대부들도 즐겨 그렸다. 쓴 사람의 인품, 즉 사람 됨됨이가 글씨에 나타난다는 서예처럼 기법이 유사한 사군자도 같은 대접을 받았다. 사군자는 대체로 당나라 때 시작해 북송에 들어 크게 유행했다. 이 중 대나무는 북송 시대의 소식(1037~1101), 즉 소동파와 문동(文同·1018~1079)에 의해 사군자의 하나로 자리 잡았는데 문동은 소위 ‘흉중성죽’의 자세, 즉 “이미 붓을 들기 전에 마음속에 대나무가 완성”될 만큼 마음속으로 구도와 형태를 분명히 잡고 작품에 임했다. 이는 후일 그림을 그리기 전 갖춰야 할 기본이 됐다. 고려 시대에 송과 원의 영향으로 문인들이 대나무와 매화를 즐겨 그렸다는 기록이 있지만 현존하는 작품은 아쉽게도 없다. 조선 시대에 들어 그림을 그리는 이면 누구나 사군자를 그렸다. 특히 청화나 진사, 철사백자 같은 도자기에도 그려졌다. 이렇게 사군자는 일반적인 화제로 자리 잡았는데, 대나무는 상징성 때문에 좀 더 특별하게 다뤄졌다. 조선 초에는 이수문(李秀文·1403~?)이나 박팽년(1417~1456), 신사임당(1504~1551)의 대나무 그림이 매우 귀히 전한다. 결국 조선 후기에 들어 ‘서화일치’ 정신이 반영된 대나무 그림이 성했고 이들을 통해 그 미학적·양식적 가치를 따져 볼 수 있다.

특히 조선의 3대 묵죽화가라 칭하는 탄은 이정(1554~1626), 수운 유덕장(1675~1756), 자하 신위(1769~1847)가 대표적이다. 요즘 수표를 대신한다는 5만 원 권 뒷면에 세종의 고손 이정의 ‘풍죽도’와 함께 곧게 뻗은 어몽룡(1566~?)의 대나무 같은 매화 그림 ‘월매도’를 넣은 것도 깨끗하고 정직하게 돈을 쓰라는 뜻일 게다. 사실 5만 원 권 뒷면을 자세히 보면 월매도 이면에 풍죽도가 흐리게 보이고, 다시 유심히 보면 짙은 먹으로 그린 대나무 뒤로 묽은 담묵으로 그린 3그루의 대나무가 중첩돼 있다. 이는 대나무의 숨어 있는 속뜻을 헤아리라는 의미는 아닐까.

이 외에도 추사 김정희, 우봉 조희룡 등도 대나무 그림에 출중했다. 그 후 해강 김규진(1868~1933)이나 그를 사사한 독립운동가로 건국동맹에서 활약했던 금강산인 김진우(金振宇·1883~1950), 이병직(1896~1973) 등이 뒤를 이었다. 또 석촌 윤용구(1853~1939), 차강 박기정(1874~1949), 벽산 정대기(1886~1953) 같은 이들은 마치 죽창 같은 잎을 지닌 대나무 그림을 그리며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남쪽에만 자라던 대나무가 지구온난화 현상으로 서울 이북에서도 잘 자라건만 대쪽같은 사람은 찾아볼 수 없고, 판서 자리에 눈이 멀어 “한 입으로 두 말”하는 사람만 가득한 요즘 유독 대나무 보기가 부끄러운 것은 필자뿐일까. 차라리 장관 후보들에게 청문회 대신 대나무를 그려보게 해 그 됨됨이를 살펴보는 것은 어떨까.

큐레이터·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