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칠수와 만수’ 촬영지 강남귀금속타운
장기복역자 아들과 양공주 아들
벅찬 노동 견뎌내도 비루한 인생
원망 섞인 욕 시원하게 뱉었지만
냉혹한 사회에선 범죄자 낙인만
상가옥상에 女가슴 그림 세우자
신반포 아파트 주민들 거센 항의
주인공들이 광고판 그리던 건물
이젠 강남귀금속타운으로 변신
사람들은 대개(물론 다는 아니지만) 가난한 곳에서 먹고 자고 가난하지 않은 곳으로 일을 하러 다니며 산다. 도시 근교나 외곽, 혹은 영세한 동네에서 살면서 일은 도심이나 가장 번화한 곳으로 하러 나간다. 달동네에서 부자 동네를 오가는 셈이다. 사람들은 그렇게 어렵게 노동하지만 쉽게 부를 가지지는 못한다. 이른바 노동의 소외(疎外)다. 가난은 그래서,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이라고 하고 그게 늘 더 큰 문제를 야기 한다. 내가 만드는 재화(財貨)를 내가 소유하지 못한다는 것이야말로 정치·사회적 문제의 진정한 원천이다.
1988년에 개봉해 희대의 문제작으로 평가받은 박광수 감독의 ‘칠수와 만수’에서 형 박만수(안성기)와 동생 장칠수(박중훈)가 처한 상황이 딱 그런 경우다. 이들은 늘 열심히 일(하고 싶어)하지만 그 벅찬 노동이 이들의 비루하고 빈궁한 삶을 해소하지 못한다. 그럴 기미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만수는 사상범으로 30년째 장기수로 살아가는 아버지를 두고 있어 막노동 외에는 할 일을 찾을 수가 없는 인물이다. 칠수는 이른바 ‘동두천’의 자식이다. 모든 사람이 입에 담기를 꺼리며 언제나 가장 심한 욕설의 대명사였던 ‘양갈보’의 아들이다. 그는 어디서 내로라할 만한 교육을 받지 못했으며 천부적인 그림 실력이 있을지언정 극장 간판을 그려가며 하루하루를 때우듯 살아갈 뿐인 인생이다. 당연히 만수와 칠수, 칠수와 만수는 친형제는 아니다.
이 둘이 사는 곳은 지금의 성동구 옥수동이다. 동호대교 교각 밑에서부터 이어지는 달동네다. 둘은 천막집 비슷한 곳에서 기거하면서 2인용 자전거를 타고 일을 하러 다니는데 일터 대부분은 강 건너 강남인 경우가 많다. 1988년은 서울올림픽이 열린 해고, 서울 특히 강남에는 속속 대형 건물과 고급 아파트들의 막판 건설이 이뤄지고 있던 때였다. 둘의 생계가 대체로 고층에 밧줄을 걸고 아파트 외벽에 페인트칠을 하는 일이었던 건 그 때문이다.
영화 마지막에 이들이 천신만고 끝에 일을 얻은 곳도 지금의 강남 센트럴시티 옆 청록회관이다. 지금은 강남귀금속타운으로 바뀌었다. 그 건물은 이름을 바꾸고 나서도 한참 동안 전두환 전 대통령의 동생, 전경환의 소유인 것으로 소문이 자자했었다. 영화에서 만수와 칠수는 이 건물 옥상 빌보드 광고판에 외국 여인이 상반신을 드러낸 위스키 광고의 페인트칠을 하게 된다. 그리고 결국 그 과정에서 사달이 일어난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영화 ‘칠수와 만수’의 촬영지인 서울 서초구 강남귀금속타운(오른쪽 겨자색 건물). 영화에서는 주변이 휑한 공터로 나오지만, 지금은 백화점과 호텔 등이 빽빽이 들어서 있다. 김낙중 기자 sanjoong@
옥수동에서 살고 강남터미널로 일을 다니게 된다는 설정이야말로 이 영화의 핵심적인 공간 설정이다. 일단 옥수동부터가 그렇다. 옥수동은 조금 확대해서 들여다보면 상단 우측에 금호동, 좌측에 약수동을 끼고 그 건너 중구 신당동과 퇴계로 입구인 광희문(光熙門)까지 이어진다. 하단 좌측은 한남동, 우측으로는 한강과 만난다. 그러니까 옛날식으로 말하면 도성에서 동남쪽 방향으로 한강 나루터까지 이어지는 신당-금호-약수-한남 길의 중간쯤이 옥수동인 것이다. 1970년 이후 강남 개발이 시작되면서부터는 그곳으로 넘어가는 주요 길목이 됐다. 옥정수(玉井水)로 불릴 만큼 맑은 우물이 있었고 동쪽 한강 물과 북쪽 중랑천이 뒤섞이는 데라 해서 ‘두무개’라 불릴 만큼 물이 좋은 곳이었지만 최근 10년 사이에 대대적인 재개발 붐이 일기 전까지 수십 년간 한남동 산동네 지대와 함께 한강 변 최대 달동네로 꼽혔던 곳이다.
그렇게 된 데에는 사연이 좀 길다. 그건 광희문과 관련이 있다. 또 다른 이름으로는 수구문(水口門)이라고 불렸던, 한양의 사소문(四小門) 중 하나인 이 광희문은 ‘시정잡배’들 사이에서는 시구문(屍軀門)이라 불렸다. 시체가 나가는 곳이라는 의미다. 이곳은 대개 사헌부 관가에서 모질게 매를 맞으며 추국(推鞫)을 받다가 죽거나 역병이 돌아 갑자기 죽은 사람들 등등 억울하고 비참하게 죽은 사람들이 바깥으로 내버려지던 통로로 쓰였다. 자연히 시구문, 곧 광희문 바깥에서는 자신들의 남편 혹은 아버지 혹은 아들이나 딸의 시체를 찾아 가족들이 모이기 시작했고, 원혼이라도 달래 줄 요량으로 여기저기서 굿을 벌이기 시작했다. 무당들이 많이 모여들기 시작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또 그러다 보니 곳곳에 신당(神堂)이 생기기 시작했다. 지금의 신당동(新堂洞)의 ‘신당’이 그 ‘신당’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는 대목이다.
억울한 사연을 지닌 시체의 가족들일수록 대부분 집과 재산을 잃은 경우가 많다. 신분이 격하된 상태로 하루하루를 연명해 나가야 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점점 퍼져 나가 빈민가의 형태를 이루기 시작했으며 그것이 지금의 금호·옥수동 전역으로 확산 된 것이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6·25전쟁 후 피란민들이 집단으로 모여 살던 곳이 됐고, 1960년대에서 1980년대까지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들 대부분이 처음에는 이곳에 머물렀다고 할 정도로 시대적으로 죽 최대 달동네의 하나였지만 2009년 대대적인 재개발 이후에는 고급의 고층 아파트가 들어선 지역이 됐다. 이제는 중산층이 모여 사는 곳으로 유명해졌다.
‘칠수와 만수’는 옥수동의 움막집과 1980년대의 반짝 경기 호황으로 디스코텍 미러볼 조명처럼 요란해지기 시작한 강남을 오가며 한국의 사회가 얼마나 위험한 경계선 위를 걸어가고 있는지를 보여 주려 한다. 6·10 항쟁으로 세상은 조금 열려 가는 척했지만, 아직도 많은 것들이 감시와 통제, 억압의 분위기 속에 놓여 있던 시대였다. 만수는 사상범 아버지로 인한 연좌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칠수 역시 세상이 둘러쳐 놓은 ‘도덕의 연좌제’ 구렁에 빠져 있는 상태다. 동두천의 아들은 어디서든 일을 얻지 못한다.
이 영화는 한국의 사회가 군부(軍部) 치하에서 ‘21세기 자본주의’, 곧 아무리 어찌해도 벗어나지 못하는 신분과 계급의 세습주의로 넘어가는 길목에 접어들고 있음을 눈치채고 그것을 대중에게 갈파하려 했던 작품이다. 만수는 공장일을 하면서 사는 여동생이 양심수 석방을 돕는 변호사나 사회단체에 아버지의 석방 문제와 관련해 도움을 청하자는 얘기에 “다 쓸데없는 일”이라고 소리 지른다. “다 있는 놈들만 좋으라고 하는 짓이 될 뿐”이라고 호통친다. 동생에게는 요즘 노조니 뭐니 다니면서 똑똑해진 척하는 거냐고 비아냥거리기도 한다. 칠수는 칠수대로 어릴 때부터 자신의 신분을 세탁하고 싶은 욕망이 늘 거짓말 시리즈를 만드는 꼴을 겪게 한다. 그는 미국 마이애미에서 친형이 초청할 거라지만 정작 그곳에 형은 살지 않는다. 아니 아예 그에게는 형이 없다. 칠수는 당시 막 한국에 들어온 프랜차이즈점인 ‘버거킹’을 드나들며 그곳에서 일하는 여대생 지나(배종옥)에게 수작을 건다. 하지만 신분을 뛰어넘는 사랑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지나는 집에서 권하는 남자와 약혼을 하겠다며 칠수의 손길을 끝끝내 거부한다.
이들이 터미널 주변 고층 상가의 빌보드 광고판 위에 올라 소동을 벌이게 되는 것은 영화 속에서 보면 한 편의 촌극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그들이 그렇게 되기까지 영화는 두 사람을 차곡차곡 필연의 계산대 위에 올려놓는다. 칠수와 만수는 결국 사고를 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거기다 한국사회는 이 둘을 오만 가지의 편견을 가지고 결국 전혀 뜻밖의 왜곡된 인물로 바꿔 내는데, 그렇게 되는 데는 이 사회에 오래전부터 잘못된 시스템이 뿌리부터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둘은 광고판 위에서 아무도 듣는 사람이 없을 거라고 생각해서 속 시원하게 세상을 향해 욕을 좀 해 볼 요량으로 아래를 향해 소리를 지른다. 근데 그런 둘을 ‘밑에 있는 사람들=세상’이 볼 때는 투신 항의시위를 벌이는 것으로 간주 된다. 경찰차가 몰려들고 언론사의 취재 경쟁이 시작되며 하늘에는 헬기까지 동원된다. 종종 사회가 범죄적일 때 범죄적 인물들이 양산된다. 칠수와 만수는 그렇게 사회 소요(騷擾) 범죄자가 된다.
이 유명한 터미널 엔딩 장면을 찍기 위해 박 감독과 그의 스태프들은 우여곡절을 많이 겪어야 했다. 무엇보다 촬영 자체가 목숨을 건 행군이었다. 주연배우인 안성기, 박중훈과 스태프 모두 생명줄이나 안전 그물망의 보호 없이 고공 촬영을 감행해야 했는데 그건 지금 봐도 참 아찔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30년 전의 촬영장에서 가능했을 일이다.
오래전 영화치고 과감한 촬영기법이 눈에 많이 띄는 것은 이 영화가 한국영화의 신르네상스, 이른바 뉴코리안시네마 시대의 신호탄 격 작품이었음을 증명해 보이는 것이기도 하다. 1억4000만 원의 제작비로 헬기 촬영, 동시 녹음 등 현대적 기술을 사용했다.
비록 그림이라 하더라도 여성 모델 젖가슴을 드러내는 입간판은 촬영에 들어가자마자 건너편 신반포 아파트 주민들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아야만 했다. 당시로서는 그 정도만으로도 외설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결국 입간판 전체와 거기에 올라간 칠수와 만수를 한꺼번에 보여주는 풀 샷(full shot)은 하루 이틀 만에 다 찍어야 했다. 미디엄 투 샷(medium two shot)을 포함해 클로즈업, 건물 아래의 군중 몹 신(mob scene) 등은 이 입간판을 철거한 후에 따로 찍어 편집에서 붙여야만 했다.
이 영화에 대해 이렇게 반포동 주민들의 검열이 있긴 했지만 군부독재 시절이 연장되던 시대였던 것치고는 영화의 내용에 대해 별다른 제재는 가해지지 않은 것으로도 유명했던 작품이다. 한마디로 운이 좋았던 것인데 88올림픽이 잠깐이나마 모든 걸 풀어 놓는 기이한 기회로 작동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극단 차이무의 대표이자 연출가인 이상우의 동명 연극을 영화로 만든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실제 원작은 대만 작가 황춘밍(黃春明)의 단편소설집 ‘사요나라 짜이젠’에 수록돼 있는 ‘두 페인트공’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연극은 1978년 이 소설을 오정우가 희곡으로 옮겼을 때부터 시작된 것이니 그 유래가 꽤나 깊은 셈이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오동진 영화평론가
오동진 영화평론가
박광수 감독은
영화史에 남을 작품 많아
교수 생활하며 신작 ‘방아쇠’ 준비 중
박광수(사진) 감독은 데뷔작 ‘칠수와 만수’ 이후 1999년까지 약 10년간 ‘그들도 우리처럼’ ‘베를린 리포트’ ‘그 섬에 가고 싶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이재수의 난’ 등 한국 현대영화사에 길이 남는 굵직한 작품을 내놨다.
‘칠수와 만수’는 파리 유학을 하고 돌아오는 비행기 상공에서 강남을 처음 보면서 구상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교도소가 엔딩 장면이었으나 결국 그건 지금의 영화에서 살리지 못했고, 여전히 그 점이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이재수의 난’의 흥행 실패 후 박광수는 몇 편의 영화를 더 만든 후 지금까지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로 일해 왔다. 그 사이 부산국제영화제, 부산영상위원회 등에서 부위원장이나 운영위원장 등 비중 있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현재는 오랜 공백을 접고 다시 충무로로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다. 신작 ‘방아쇠’를 준비 중이다. 휴전선에서 벌어지는 얘기여서 남·북·미 핵협상 정치 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55년생. 서울대에서 조소를 전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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