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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명작의 공간 게재 일자 : 2019년 04월 19일(金)
단순해서 더 아름다운 자연美… 삶·작품 품어낸 ‘제2의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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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각가 김종영에게 ‘제2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서울 성북구 삼선교 일대 동네 풍경. 작품 ‘세한도’에 등장하는 라일락 나무가 왼쪽에 보인다. 아래 사진은 김종영이 1963년부터 거주하며 작업했던 삼선교의 집으로 확장 신축하기 이전 모습이다. 김낙중 기자 sanjoong@

조각가 故 김종영 교수의 삼선교 집

큰길에서 멀찍한 언덕위의 집
이웃에 돌깎는 소음 피해 안줘
마당은 작업실, 방은 서예 공간
마루는 쉼터이자 작품보관 장소

학교·집 왕복하는 단순한 생활
자성·명상 벗삼아 구도의 자세
‘자각상’‘전설’ 등 작품이 분신

유일하게 스승으로 섬긴 추사
그가 쉰아홉에 그린 세한도따라
소나무 대신 마당 라일락 그려


김종영 선생은 한국 추상 조각의 선구자로 ‘선비 조각가’라 일컬어진다. 그는 1963년부터 1982년 타계할 때까지 서울 성북구 삼선교 집에서 작업했다. 선생이 이 집에 이사 오게 된 것은 1963년 종로3가 탑골 공원에 건립된 ‘삼일독립선언탑’의 제작을 맡은 후 약간의 여유가 생긴 덕이었다. 이 삼선교 집은 버스가 다니는 큰길에서 한성대 쪽으로 언덕을 20분 정도 걸어서 올라가는 곳에 있다. 그런 위치를 선택한 이유는 주위에 집이 많지 않아 조각할 때 들리는 소음에 불평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집은 규모가 작았다. 작은 집에서 마당은 조각하는 작업실이었고, 방은 서예와 그림 그리고 독서와 글 쓰는 공간이었으며, 마루는 쉼터이자 작품 보관 장소였다. 그러니 온 가족이 생활하기에는 매우 비좁았다. 선생이 별도의 작업장을 갖게 된 것은 20년 후인 1982년, 즉 서울대 미술대학 조소과 교수 정년퇴직 후 작업에 전념하고자 좁은 집을 허물고 현대식 양옥으로 확장 신축했을 때였다.

선생은 1982년 새집에 입주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은 동년 12월 15일 지병으로 유명을 달리하였다. 그런데 단순히 지병만을 사인으로 여길 수 없는 사건이 있었다. 앞서 언급한 ‘삼일독립선언탑’은 온 국민의 성금을 재원으로 건립되었으며 아울러 선생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 공공 조각 작품이었다. 그런 작품이 1979년 무단으로 철거된 후 삼청공원에 덮개로 싸여 방치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얼마 후 그 일을 알게 된 선생은 큰 정신적 충격을 받아 지병이 악화되었던 것이다. 향년 예순여덟이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덧붙이면 이 기념탑은 철거된 기념조형물 중 유일하게 복원되어 지금은 서대문 독립공원에 있다.

선생의 삶은 매우 단순했다. 하지만 그것은 예술가로서의 삶 바로 그것이었으며 평생 일관되었다. 정년 퇴임 후 한 신문과의 인터뷰를 보자.

“오전 5시쯤이면 잠을 깹니다. 작은 마당이지만 거닐기도 하고 매만질 ‘내 것들’을 매만지면서 계획하지 않은 사색을 합니다. 대개 7시경이면 몇 년 전부터 습관화된 커피와 빵으로 아침 식사하고는 다시 관찰하고 생각하고, 그러다가 간혹 잡서(雜書)를 읽기도 하고 글씨를 써보기도 하지요. 그러다가 마음 내키면 언제고 습작을 해보기도 합니다. 작가는 제작하는 시간이 바로 휴식시간입니다. 손을 쉬는 시간은 온갖 잡생각과 투쟁하고, 생활을 고민해야 하는 괴로운 시간일 겁니다. 세속을 떨쳐야 할 텐데 요즈음은 전혀 안정되지 않는군요. 사색하고 독서를 좀 하자고 해도 이젠 앰프에서 나오게 만들어 놓은 교회의 소음과 온갖 문명의 잡음들이 이를 방해합니다.”

이 같은 일상을 살던 선생은 자신이 유일하게 스승으로 섬긴 추사 김정희가 우리 나이 쉰아홉에 그린 ‘세한도’를 추사와 같은 나이가 되던 1973년 정초에 같은 제목으로 그렸다. 삼선교 집 주위 풍경이었다. 추사가 세한도를 그린 이유는 공자가 겨울이 되어서야 소나무나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듯이, 제주에 유배된 스승을 잊지 않고 챙기는 제자 이상적의 일편단심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선생이 그린 세한도에는 소나무 대신 선생 집 마당에 있던 낙엽 진 라일락 한 그루가 있다. 선생은 급한 경사의 언덕 위에 있는 작은 집에서 한겨울 앙상한 가지만 남은 라일락을 바라보며 계절의 여왕 5월에 만개하여 온 동네를 진동케 할 꽃향기를 고대했던 것 같다.

▲  김종영의 작품 ‘세한도’(1973·위 사진)와 ‘자각상’(1964·아래). 김종영미술관 제공
아무튼 바로 그즈음부터 선생은 자신의 호를 ‘조각하며 삶의 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의 ‘각도인(刻道人)’에서 ‘깎지 않음을 통해 삶의 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의 ‘불각도인(不刻道人)’으로 바꿨다. 그리고 작업실 이름을 ‘불각재 (不刻齋)’로 정하고 붓글씨로 여러 점 썼다. 그러니 ‘불각도인’이 ‘불각재’에서 ‘세한도’를 그린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겸재 정선의 ‘금강산 만폭동도’를 따라 그렸는데 그것은 이후 조각 작품의 모티브가 되었다. 만년에는 콜라주 작업에 심취하였는데, 몇몇 작품은 1950년대 관심을 가지고 연구했던 마티스와 아르프의 작품과 매우 비슷하다. 얼핏 노 대가의 작업이라고 하기에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 면이 있다. 왜 그랬을까?

힌트는 선생의 일기에서 찾을 수 있다. 삼선교 집에 이사 와서 맞는 첫 번째 새해 첫날인 1964년 1월 1일, 우리나라 나이로 50세가 된 선생은 일기에 “지금까지의 작품제작 생활은 실험과정이었다”라고 하면서 “이제부터는 조형의 본질, 형체의 의미 등 그동안의 실험을 종합해 나아갈 것”이라고 다짐한다. 이런 새로운 다짐과 함께 그해 처음으로 자신의 얼굴을 나무로 깎아 만들었다. ‘일기’와 ‘자각상(自刻像)’을 함께 살펴보면 그 각오가 참으로 남달랐음이 느껴진다.

그렇다면 선생은 이전에 어떤 실험을 했을까? 삼선교는 경남 창원이 고향인 김종영 선생에게 제2의 고향이라 할 수 있다. 선생은 1948년 서울대 미술대학 조소과 교수로 부임하며 서울에 왔다. 지금의 대학로에 미술대학이 있어 돈암동(지금은 동소문동) 성북천 옆 한옥에 거처를 마련하였다. 6·25전쟁 발발 후 1·4 후퇴 때 창원으로 피란 갔으나 휴전 후 돈암동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돈암동 집이 6·25 직전 친구 빚보증으로 압류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대학 합동관사에서 생활해야 했다. 작업실을 따로 마련할 수 없어 방학 중 빈 실기실에서 학생들과 같이 작업하였다. 1948년부터 서울대 조소과 교수로 재직해 32년간 무수히 많은 1세대 조각가를 키워낸다. 광화문의 이순신 동상으로 유명한 김세중(1928∼1986) 전 국립현대미술관장을 비롯해 전뢰진·송영수·최종태·엄태정·윤명로·심문섭 등 쟁쟁한 조각가가 모두 그의 제자다.

선생은 학생들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외국 작가 작품집을 펼쳐 놓고 진중하게 따라 그리고 제작하였다. 더불어 대학노트에 서양 추상미술의 기원과 전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정리하고 몇몇 작가에 대한 정보와 평을 적었다. 이는 앞서 살핀 바와 같이 선생이 겸재 정선의 그림을 따라 그리고, 마티스와 아르프의 콜라주와 유사한 작품을 만든 것과 마찬가지다. 이 모두가 어려서부터 익힌 서예 공부법, 즉 ‘임서(臨書)’에서 비롯됐다.

이런 과정에서 1953년 한국 최초의 추상 조각 작품 ‘새’를 거쳐 1958년 선생의 걸작 중 하나인 ‘전설’이 탄생하였다. 1959년 선생은 여덟 점의 조각 작품과 몇 점의 드로잉 작품으로 중앙공보관에서 월전 장우성 선생과 2인전을 열었다. 그동안의 실험 작품들을 정리하여 전시한 것이다.

선생은 남들과 어울리기를 즐기지 않았다. 학교와 집을 왕복하는 생활은 극도로 단순하였다. 선생은 집에서도 독서와 사색, 글쓰기와 서예 그리고 드로잉과 조각 작품 제작에 전념하며 조금도 허투루 보내는 시간이 없었다. 낮에 하던 작업이 맘에 걸리면 밤에 마당에 나가 작품을 살피곤 하였다. 그런 선생은 시대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을까?

“무지와 교활이 범람하고 있는 이 사회에서 진리를 논하고 엄한 원칙을 따지는 것은 피하고 있다. 주위에 이러한 말을 주고받을 교우도 거의 없어졌거니와 때와 곳을 얻지 못한 고담준론이 일에 방해가 되고 신변을 고독하게만 만드는 것 같다. 차라리 자성과 명상을 벗 삼아 일에 몰두하는 편이 나으리라. 대체로 예술가를 훈련시키는 것은 제작과 반성으로 족하다. 겸양과 용기와 사랑의 미덕을 길러 주는 것은 오직 제작의 길뿐이다.”

구도자와 같은 자세로 작업에 임한 선생은 작품제작 시 일절 남의 손을 빌리지 않았기에 작품 하나하나를 자신의 분신과 같이 대했다. 그래서 만년 작품 몇 점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품 안에 쏙 들어오는 크기다.

선생은 비좁은 삼선교 집에 살던 시기에 전 생애에서 가장 많은 작품을 제작하며, ‘불각(不刻)의 미’를 성취하였다. ‘불각의 미’는 간단히 말해서 그리는 이의 뜻을 중시한 문인화 전통과 서양미술의 추상화를 동격으로 살펴 작가의 뜻을 중히 하면서도 소박함과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미학이다.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 1971년에 제작한 ‘자각상’이다.

선생은 자녀들에게 “사람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무지(無知)다”라고 했다. 실제 선생은 폭넓은 독서와 사색을 즐겼다. 이는 선생이 창원 피란 시절 돈암동 집에 두고 온 책이 잘 있는지 궁금해서 위험을 무릅쓰고 다녀온 일화와 유품으로 남아있는 책과 노트로 짐작할 수 있다. 그 노트에는 독서와 사색으로 떠올린 단상들이 일기체 형식으로 정리되어 있다. 그리고 이 글들은 사후 일주기에 출간된 유고 선집 ‘초월과 창조를 향하여’를 통해 세상에 처음 알려졌다. 선집에 실린 글 중 최고의 옥고(玉稿)라 할 수 있는 ‘유희삼매’ ‘완당과 세잔느’ ‘불각의 미’ 같은 글들이 바로 삼선교 집에서 쓴 것이다.

한편 엄하기만 할 것 같은 선생이지만 가족들의 기억에는 화초 가꾸기, 꽃꽂이, 요리 등 아기자기한 취미와 소박한 낭만을 즐기던 아버지였다. 선생은 작업하는 틈틈이 화초를 가꿔 마당 한구석에는 예쁜 수련과 선인장이 있었고, 돌조각을 하다가 남은 자투리로 수반을 만들어 장미와 안개꽃을 꽂아 즐기기도 했다. 또한, 선생은 러시안 수프와 과일 잼을 잘 만들었고, 음악을 늘 들었다.

당시 교수 처우가 열악했음에도 선생은 작가와 교육자로서 본연의 임무에 충실했으며, 명문 사대부 집안 장손으로 그리고 한 집안 가장으로서 그 소임에 한치의 소홀함이 없고자 최선을 다하였다. 또한, 과욕을 부리지 않고 정도를 걷고자 경계하고 또 조심하였다. 이를테면 선생은 수많은 입시지도 청탁을 거절하였고, 조각가로서 치부할 수 있었던 애국선열 동상제작 의뢰도 거절하였다. 선생은 종종 “환경을 탓하고 소재를 탓하는 예술가는 모자라는 예술가다. 나는 어떤 여건에서 어떤 소재를 가지고도 내 작품을 제작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절제와 검약 그리고 치열한 예술 정신이 충만했던 선생의 유지를 기리고 작품을 연구 보존하기 위해 가족들은 2002년 20주기를 맞아 평창동에 김종영미술관을 개관했다. 동 미술관은 선생의 수많은 조각 작품을 비롯하여 드로잉, 서예 작품, 자필 원고, 유품을 감상하고 살필 수 있는 귀한 장소다. 작금의 예술 경향을 바라볼 때, 선생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빛을 발하는 작가임을 깨닫게 된다. 미술관을 방문하여 잠깐 일람하는 것만으로도 불각도인 조각가 김종영의 향취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박춘호 김종영미술관 학예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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