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모의 세종이 펼친 ‘진짜 정치’>“신하들이 이토록 반대하니 하지 않겠다”…양보로 대치국면 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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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을 즐기는(樂於討論) 임금’. 신하들이 세종에게 붙인 별명이다. 말끝마다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물으며 인재들을 대화의 장에 초대하는 임금, 대화 중에 좋은 의견이 나오면 혹여라도 그것이 땅에 떨어져 버려질까 두려워 시행에 급급했던 왕이라는 뜻이다. 그런 세종에게도 토론거리에서 제외되는 주제가 있었다. 불교나 종친 문제처럼 민생과 무관해 보이는 사안이 그랬다.

세종은 언관들이 양녕대군이나 효령대군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면 아예 무시하곤 했다. 내용이 진부하다면서 되돌려보내기도 했다. 재위 9년째인 1427년에 사헌부 관리들은 양녕의 장남 이개에게 ‘순성군’이라는 작위를 내린 것을 취소하라고 요구했다. 아버지가 죄인으로 유배 가 있는데 그 아들에게 벼슬을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사헌부에 이어 사간원 관리까지 합세해 연명으로 작위 취소 상소를 올리자 세종은 “경들이 이처럼 강하게 그르다고 하니 이개를 도성문 밖으로 내보내겠다”며 한발 물러섰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박현모 여주대 세종리더십연구소장

하지만 세종은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게다가 경기 이천에 유배 가 있는 양녕을 서울로 불러올렸다. 곧 있을 세자 혼례를 위해 집안 어른들이 모여야 한다는 게 그 이유였다. 언관들은 자기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번에는 왕의 측근 신하들을 공격했다. 형조판서 신개와 우의정 맹사성이 그 대상이었다. 왕의 잘못을 바로잡을 책임이 있는 대신들인데도 한 마디의 간언(諫言)도 하지 않은 그들은 자격이 없다는 주장이었다. 그럼에도 왕의 침묵이 계속되자 이번에는 사헌부 관리들이 아예 관청의 문을 닫아걸고 전원 사직 상소를 올렸다. 사사로운 은정을 끊든지 아니면 자신들을 파직시키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하라는 압력이었다.

‘양녕정국’이 군신 간의 기 싸움으로 변질되고 자칫 국정 마비로 이어질 조짐이 보이자 세종은 “내 다시 생각해 보겠다(予更思之)”며 신하들을 편전으로 불렀다. 그 자리에서 신하들은 태종의 유훈, 즉 ‘양녕 문제는 조짐이 자라기 전에 차단하라’는 말을 들어 빨리 유배지로 되돌려보낼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세종은 “경들이 아무리 불가하다고 해도 나는 따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신하들은 “이 일은 관계되는 바가 지극히 중대하므로 반드시 허락을 받은 뒤에야 그만둘 것”이라고 버텼다.

대결국면이 좀처럼 풀릴 것 같지 않자 마침내 왕이 타협안을 제시했다. “내 맘 같아서는 형(양녕)을 매일 만나고 싶지만 경들이 이렇게 반대하니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자주 만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만약 만날 일이 생기면 “반드시 먼저 경들에게 알리겠노라”는 약속도 했다. 그러자 신하들은 한목소리로 “그 말씀은 지금까지 듣지 못했던 분부”라고 화답했다. 궁궐문 앞에 엎드려 있던 여러 대간도 이 소식을 듣고 “성상의 뜻이 이처럼 간절하고 지극하니, 신 등도 물러가서 생각해 보겠습니다”라고 말하며 물러갔다.

5개월간 계속된 세종과 신하들의 대치 국면을 읽으면서 느낀 게 있다. 그 하나는 매듭 묶은 사람이 먼저 푸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結者解之)는 점이다. 이유야 어떻든 간에 왕의 조처(양녕을 불러들인 것)로 인해 야기된 대립이었다. 따라서 왕이 “다시 생각해 보겠다”며 말문을 연 것은 매우 적절했다. 다른 하나는 자기주장을 내려놓는 용기다. “경들에게 먼저 알리겠다”고 왕이 약속을 하고 “신 등도 물러가서 생각해 보겠습니다”라고 신하들이 화답하는 모습은 우리 역사에서 좀처럼 발견하기 힘든 진기한 장면이다. 실록 읽기야말로 비관적인 세계관에 대한 가장 강력한 해독제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 순간이기도 했다.

여주대 세종리더십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