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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이 푸른 별에서 너와 나는 게재 일자 : 2019년 05월 22일(水)
덧없는 인간사 목격한 山이 낮게 말했다… “내게 오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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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의규·구자명 부부 작가의 미니픽션 - (24) 외치(Oetzi), 산에 오르다

5300년전 오스트리아 알프스
키 165㎝에 힘도 약한 ‘외치’
사냥대신 나무·돌 다듬기 즐겨
그런 그를 30년 사랑해준 엘렌

어느 날 다른 남자와 짐싼 그녀
뒤따라가 머리채 움켜잡은 순간
곰 넓적다리뼈 도끼가 옆구리에
흐릿한 시야로 달아나는 ‘한쌍’

눈폭풍·추위 막아준 큰바위밑
엘렌의 젖무덤보다 더 푸근해
행복한 잠이 끝없이 밀려왔다


“엘렌, 네가 나한테 그럴 수는 없는 거야. 네가 날 버리고 후치를 따라가면 안 되는 거야. 너 없이 나는 어떡하라고…….”

외치는 숨 쉴 때마다 쿡쿡 결리는 오른쪽 옆구리를 매만지며 갈다 만 화살촉과 부싯돌, 손도끼 등을 가죽부대에 넣으면서 중얼거렸다. 언제부터인가 엘렌과 후치가 서로 주고받는 눈길이 이상하고 불안하다고 느꼈던 예감이 오늘 아침 현실로 드러났다. 움막 밖에서 날카로운 휘파람소리가 들리자 엘렌은 외치가 공들여 만들어 준 목걸이와 팔찌 그리고 부드럽고 멋진 가죽옷을 말아 안고 살그머니 나갔다. 수상한 낌새를 눈치챈 외치가 뒤따라 나가며 엘렌의 긴 머리채를 움켜잡는 순간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곰의 넓적다리 뼈로 만든 도끼가 외치의 옆구리로 날아들었고 외치는 쓰러졌다. 그리고 그의 흐릿한 시야에는 달아나는 엘렌과 후치의 뒷모습이 흔들리며 보였다. 손에는 한 움큼 엘렌의 아름다운 금발만 남았다. 외치는 어쩌면 다시는 그녀를 볼 수 없을 것이란 생각과 함께 엘렌의 머리카락을 코에 갖다 대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녀의 독특한 비린내가 향긋했다.



후치는 덩치도 크고 힘도 세어 누구도 그에게 덤비질 않았다. 후치는 사냥도 잘했는데 사냥감을 모두 여자들에게 나누어 주어 여자들에게는 인기가 좋았다. 또한 그는 여러 여자에게서 얻은 많은 자식이 있었다. 세월이 지나면 세상은 온통 후치의 후손들밖에 없을지 모른다고 많은 남자들이 생각했다. 190㎝의 후치에 비해 외치는 165㎝의 작은 키에 힘도 약했다. 그는 사냥보다 나무를 깎아 조각상을 만들거나 색돌을 다듬고 꿰어 목걸이 따위를 만드는 일이 더 좋았다. 그런 그를 어릴 때부터 엘렌은 좋아했다. 덩치만 크고 예의가 없다며 후치를 싫어했던 그녀였다. 그렇게 외치와 함께 산 지 30년이나 된 그녀가 이제 와서 후치를 따라간 것이다.



외치는 아무리 생각을 해도 그녀의 맘을 이해할 수 없었다. 배신감도 배신감이었지만 무엇보다도 눈앞의 살아있는 모든 것과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에조차도 아무런 실감이 나질 않았다. 모든 게 무의미하고 자신은 무력함의 끝도 없는 구렁으로 한없이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문득 무거워진 눈꺼풀을 비집고 무언가 하얗게 빛나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만년설을 머리에 이고 햇빛을 되비치는 알프스 산이었다. 그 산은 지난 30년간 자식도 없이 오직 엘렌만을 사랑하는 자신의 사랑을 보아왔고 또 오늘 아침 그 덧없는 인간사를 목격했다. 그러나 산은 보기만 할 뿐 아무 말이 없다. 처음부터 거기 그 자리에서 장엄한 자태로 세상을 굽어볼 따름이었다. 대신 침묵으로 말을 했다. 그런 산이 들릴 듯 말 듯한 낮은 소리로 말했다. “내게 오렴.”

산을 오르기엔 좀 늦은 시간이었지만 그건 아무 문제가 아니었다. 이런저런 생각은 지금 다 거추장스러울 뿐이었다. 오직 산만 오를 뿐이었다. 아침에 후치의 뼈도끼에 맞은 옆구리가 몹시 아파 오자 외치는 잠시 쉴 곳을 찾았다. 해발 3200m 산중턱, 거북등같이 둥글고 매머드만큼 큰 바위 밑에서 쉬기로 했다. 그곳에 산 것이라곤 자신을 빼면 아무것도 없었다. 가끔씩 ‘우웅’ ‘우웅’ 하며 산이 숨 쉬는 소리만 들렸다. 흰 눈이 너무 눈부셔 눈을 자꾸 감게 되었다. 눈폭풍과 추위를 막아주는 큰 바위 밑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늑하고 따뜻했다. 엘렌의 젖무덤에 얼굴을 묻었을 때보다 더 푸근했다. 생각해 보니 이 느낌이 처음이 아니었다. 어릴 때 엄마의 젖을 빨 때와 같은 것이었다. 어쩌면 자신이 알프스 산의 젖가슴에 와있는 것이라고 외치는 생각했다. 행복한 잠이 끝없이 밀려왔다.



1991년 9월 알프스 만년설의 끝자락에서 눈 위로 드러난 그는 산악인들에게 발견되었다. 5300년 만에 그는 다시 사람들과 만난 것이다. 그러나 외치는 눈을 뜨지 않고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사람들이 엘렌의 머리카락을, 그의 화살촉과 부싯돌, 손도끼를 가져가든 말든. 그리고 그들이 자신을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대에 데려가는 것도 상관치 않기로 했다.

이제 그는 산으로 가서 산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누운 채 생각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외치 : Oetzi, 1991년 9월 알프스에서 발견된 5300년 된 냉동 미라. 45세의 남자, 키 165㎝.

발견 당시 그의 가죽부대에서 머리카락 한 움큼, 사냥도구 등이 나옴. 갈비뼈 하나가 부러져 있었으며 지구 온난화로 눈이 녹아 발견됨. 그에게 학자들이 외치(Oetzi)라는 이름을 지어줌.

글·그림 = 김의규

한국미니픽션작가회 초대회장·화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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