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지난 1일 인천 서구 청라국제도시 호수공원에서 청라카누클럽 회원들이 각자의 배(카약)를 하나로 이어 붙인 뒤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왼쪽부터 박종필, 이준권, 이대연, 김동철, 이광영, 김경락, 배정환, 박인창, 김영환 씨. 인천 = 김호웅 기자 diverkim@
인천청라카누클럽
길이 4~5m에 폭 40~50㎝
자신의 근육만으로 노 젓는 배
환경 정화 위해 시작된 모임
회원 30명 안팎 동호회로 성장
둘레 4.5㎞ 호수공원 오가며
생태계 지키는 ‘보안관’ 역할
100㎞ 넘는 바닷길 함께 도전
서로 배 잡아주며 동료애 키워
최초의 바다를 정복한 항해자의 배는 카누였다. 동력을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근육만으로 노를 저어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카누는 지금도 미지의 세계를 꿈꾸는 항해자에겐 최고의 배다. 길이 4∼5m, 폭 40∼50㎝ 카누의 매력에 푹 빠져 ‘인생 2막’을 즐기는 이들이 있다. 마치 원시로 돌아가 새로운 세상의 정복자라도 된 양 의기양양한 이들은 인천청라카누클럽 회원들이다. 30명 안팎의 회원 대부분이 나이 쉰을 훌쩍 넘긴 중년의 시니어다. 이들은 인생을 조금은 알 나이가 돼서 카누의 매력에 빠질 수 있었다고 말한다. 때론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에 나오는 주인공이 돼 인생을 논하고, 때론 소설 ‘노인과 바다’의 산티아고처럼 파도와 정면으로 맞선 무용담을 늘어놓기도 한다.
지난 1일, 주말 이른 아침 인천 서구 청라국제도시 호수공원에 청라카누클럽 회원들이 하나둘 모였다. 구릿빛 굵은 팔뚝과 긴 패들을 둘러멘 탄탄한 어깨가 마치 전장에 나서는 장수 같다.
“호수 주변에 수초가 많이 자라 패들(노)에 감길 수 있으니 가능한 한 호수 중심으로 이동하세요. 바람이 좀 있으니 중심을 잃지 않도록 조심하시고요.”
청라카누클럽의 창립 멤버인 김경락(63) 씨는 이날도 가장 먼저 호수공원 계류장에 나와 회원들의 안전을 챙겼다. 마치 사관학교 조교처럼 회원들이 구명조끼를 올바로 착용했는지, 장비는 제대로 점검했는지 등을 꼼꼼히 체크했다. 그는 한때 클럽의 모태인 청라카누순찰대의 대원이기도 했다. 2015년 창립한 청라카누순찰대는 이곳 호수공원을 깨끗이 가꾸기 위해 만들어진 주민 자치조직이다. 지금은 동호회 성격의 클럽으로 명칭을 변경했지만 그는 여전히 호수공원 지킴이와 회원들의 안전을 챙기는 군기반장을 자처한다.
“단순히 카누를 즐기기 위한 모임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는 동네의 호수공원을 깨끗이 가꾸고 지키는 데서 더 큰 보람을 찾습니다.”
김 씨처럼 클럽 회원 모두는 자신이 사는 동네에 누구나 부러워하는 호수공원이 있다는 데 큰 자부심을 느낀다. 바다를 매립해 조성된 청라국제도시에 처음 정착한 이들은 이 국제도시의 1세대 주민이다. 이들은 매일 아침 산책하듯 호수공원을 돌며 밤사이 누군가 몰래 버린 쓰레기를 치우고, 지난여름 방사한 물고기와 오리의 건강 상태 등을 챙긴다.
이곳 클럽의 유일한 ‘홍일점’인 박수옥(55) 씨도 5년 전 이곳에 이사 와 호수공원 주변 쓰레기를 줍는 자원봉사 활동을 하다 우연한 계기로 클럽에 가입했다.
“어렸을 땐 물이 무서워 가까이 가지도 않았는데, 동네에 있는 호수공원은 마치 내 집 앞마당처럼 편안함을 주네요.”
처음 이사 와 낯설게만 느껴지던 동네가 이제는 사촌보다 정겨운 이웃까지 생겨 친정이 있는 고향보다 정겹다는 박 씨는 이곳 클럽의 총무를 맡아 궂은일도 마다치 않는다.
이곳 호수공원 예찬자는 박 씨 말고도 또 있다. 얼음이 얼었을 때를 빼고 매일같이 배를 띄워 호수에 비친 바깥세상 사진을 찍는 김동철(68) 씨다.
“투명하고 잔잔한 호수에 비친 세상은 언제나 평화롭고 아름답습니다.”
4년 전 정년 퇴임한 뒤 교단에서 내려와 줄곧 이곳 호수공원의 풍경을 카메라에 담은 그는 누군가의 눈에 비친 자신의 삶도 이처럼 아름다웠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또 호수공원에 서식하는 물고기와 오리를 지키는 생태환경 보안관 역할도 한다. 겨우내 얼었던 호수를 건너 섬에 들어갔다 갇힌 들고양이를 구출한 것도 그다. 청라국제도시 중심에 위치한 호수공원은 4.5㎞ 둘레에 최고 수심 2m, 3개의 인공섬을 갖추고 있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지난 1일 인천 서구 청라국제도시 호수공원에서 청라카누클럽 회원들이 카약을 타고 대열을 지어 패들링을 하고 있다. 김호웅 기자
카누를 타고 이곳 호수공원을 매일 3바퀴 이상 운동 삼아 돈다는 배정환(58) 씨도 나름의 ‘인생 철학’을 얘기했다. 배 씨는 지난해 자신이 경영하는 회사 인근 공장에서 발생한 불로 평생 일궈온 삶의 터전을 한순간에 잃었다. 배 씨는 그날도 이곳 호수에서 미친 듯 패들링(카누에서 노를 젓는 일)을 했다.
“배를 타다 보면 잔잔한 호수와 굽이쳐 흐르는 강, 사나운 바다의 파도도 만날 수 있는 것 아니겠어요. 그래도 이처럼 노를 저을 힘이 남아 있다는 게 다행이죠.”
삶을 긴 항해에 비유한 그는 낙천적인 자신이 소설 속 ‘그리스인 조르바’를 닮은 것 같다고 했다.
클럽 회원 중에는 이곳 호수를 벗어나 극한의 환경에 도전하는 이들도 있다. 카누를 탄 지 2년도 채 안 되는 이준권(61) 씨는 지난해 인천 영종도에서 굴업도까지 왕복 100㎞의 바닷길 항해에 도전했다. 당시 만 60세가 된 이 씨의 도전에 베테랑급 클럽 회원 8명이 동행했다. 안전을 위해 출항 전 해양경찰에 행선지를 알리고 만일의 사고에 대비해 엔진을 단 구명정(고무보트) 한 척도 선단에 합류토록 했다. 짙은 해무와 높은 파도로 몇 차례 위험한 상황도 있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항해가 길어져 역조류를 만나 조난 위기도 경험했다.
“나이 60에 남들은 제2의 인생을 시작한다고 하지만 그 무게감이 컸습니다. 두 팔에 의지해 바다를 항해하고 나서 이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카누를 시작하기 전 허리 디스크 수술을 2번이나 받았다는 이 씨는 굴업도 항해를 통해 무엇보다 삶에 대한 자신감을 회복한 것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그리고 역조류를 만나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서로의 배를 잡아주고 함께 버티며 끈끈한 동료애를 느낄 수 있었다고 그는 말했다.
매일 카누를 탈 수 있는 호수공원이 있어 직장을 따라 이사 가는 것도 포기했다는 박인창(59) 씨도 지난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큰 모험을 했다. 남한강 상류 도담삼봉(충북 단양)에서 출발해 한강 하구 경인아라뱃길을 거쳐 서해까지 4박 5일간 230㎞의 국토 횡단의 대장정을 마쳤다. 옆으로 큰 배가 지날 때면 너울에 못 이겨 전복되기를 수차례 반복했지만 그때마다 그는 오뚝이처럼 카누를 뒤집어 다시 노를 저었다.
카누 경력 4년 차에 웬만한 아마추어 선수 못지않은 실력을 뽐내는 회원도 있다. 이곳 클럽 초창기 멤버이기도 한 박종필(59) 씨는 생활체육 동호인들 사이에 ‘신의 영역’이라 불리는 K1 카약을 탄다. 폭이 40㎝도 안 돼 일반인은 가만히 떠서 중심 잡기도 어려운 배다. 박 씨는 K1을 타고 지난해 열린 경인아라뱃길 카누대회에서 가장 빠른 기록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이들은 어릴 적 놀이터였던 동네 뒷동산에 대한 추억을 간직해 온 것처럼, 카누를 배우게 된 동네 호수공원도 그렇게 기억될 것이라고 말했다.
인천 = 지건태 기자 jus216@munhwa.com
;){kind=lin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