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와 시각>자사고 폐지 위한 ‘원님 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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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동 전국부장

전국 시도교육청의 자율형사립고(자사고) 재지정 평가 결과 과정을 보면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생각보다 매우 취약한 기반 위에 서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인 자사고 폐지를 위해 절차적 정당성, 과정의 공정성은 무시해도 된다는 생각을 교육 당국과 상당수 언론, 여권 지지자들이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민주주의가 결과보다 과정과 절차의 정당성이 중요하다는 기본적인 전제를 여권이 망각하고 있으며, 자신들의 이념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어느 정도의 편법과 탈법은 괜찮다는 대단히 위험한 인식을 갖고 있는 듯하다. 우려했던 대로 9일 서울시교육청은 시내 13개 자사고 중 무려 8개교를 탈락시키는 ‘학살’을 감행했다. 앞서 탈락한 전주 상산고, 부산 해운대고, 안산동산고 등을 더하면 올해 재지정 평가를 받는 24개 교 중 11개 교가 존립 위기에 몰렸다.

전주 상산고가 무려 79.61점을 맞고도 전북도교육청이 정한 커트라인 80점에 불과 0.39점 모자라 자사고 존립 위기에 처한 것은 코미디 같은 이번 자사고 사태에서도 단연 압권이다. 교육부와 전국 시도교육감들이 이번 평가를 앞두고 합의한 탈락 기준점수가 기존의 60점에서 10점을 높인 70점이었는데 유독 전북도교육청만 80점으로 올렸다. 사회통합전형 항목에서 상산고는 4점 만점에 1.6점을 받았다. 도교육청은 2019년 상산고 전형요강 승인에서도 3% 이내 선발을 승인해놓고 이번 평가 직전에 갑자기 10% 선발을 의무규정인 양 기준점으로 정하고 이 부분에서 낙제점에 가까운 점수를 줬다.

전북교육청이 왜 이렇게 무리했는지는 상산고 탈락점수 발표 후 공개된 도교육청 내부 회의록에서 드러난다. 지난해 12월 19일 열린 ‘전북 자율학교 등 지정·운영위원회’ 회의에서 자사고 평가 통과점수가 다른 지역과 달리 전북도교육청만 80점인 이유를 묻는 위원들에게 도교육청 관계자는 “기관장의 강한 의지가 반영돼 있다. 교육감은 80점도 만족스럽지 않고, 기본 의도는 자사고 폐지다”라고 말했다. 상산고의 탈락이 얼마나 무리한 결과인지는 지난 1일 강원 횡성군의 민족사관고가 상산고와 비슷한 79.77점을 받고 통과한 것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무슨 연방제 국가도 아닌 터에 같은 점수인데 지역에 따라, 교육감의 정치성향에 따라 생사의 운명이 갈린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이번 자사고 지정 취소의 본질적인 문제는 민주주의의 기본전제인 절차적 정의, 평가의 예측 가능성이 무시되거나 훼손됐다는 데 있다. 자사고 폐지를 정해놓고, 평가를 거기에 맞춰 진행한 느낌을 많은 사람이 받고 있다. 이런 식이면 왕이 정적을 죽이기로 결정해 놓고, 거기에 맞는 증거를 만들어 내던 봉건시대의 재판과 뭐가 다른가. ‘원님(사또)재판’이라는 비아냥이 나오는 이유다.

이제 공은 교육부로 넘어갔다. 교육청의 지정취소 결정에 교육부가 동의하면 자사고는 생명을 다하고 일반고로 전환된다. 유은혜 교육부 장관은 자신의 결정에 문재인 정부의 신뢰성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미래까지 달려 있다는 경각심을 갖고 절차적 정당성을 잘 따져 판단해야 할 것이다.

sdg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