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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2020 신춘문예 게재 일자 : 2020년 01월 02일(木)
슬픔의 윤리학 - 문학 속 슬픔과 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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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티이미지뱅크
- 평론 당선작 : 임지훈

슬픔의 윤리란 상실의 슬픔과 고통 속에서
부산물처럼 떠오르는 윤리입니다.
그렇기에 슬픔의 윤리는 일상의 혼란과 뒤틀림을 동반합니다.


1. 우리가 마주한 슬픔의 의미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 ‘팔복’의 마지막 구절에서 윤동주는 이렇게 말합니다. 슬픔을 소중한 것이라 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병리적인 것으로 치부하는 일상 속에서, 그의 말은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들립니다. 그 익숙함과 낯섦 사이에 다음과 같은 질문을 놓아봅니다. 당신은 왜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라 말했던 건가요? 당신이 말하는 슬픔은 대체 무엇이었나요? 유독 사건 사고가 많았던 근래의 시간을 회고하자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참 많은 이들을 잃으며 살아가고 있구나. 상실의 경험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슬픔이 되어 차곡차곡 우리의 일상 아래에 쌓여가는구나. 세월호 사건으로부터 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그들의 죽음을 기리는 ‘304 낭독회’나 ‘생일’(감독 이종언)과 같은 사례들을 보자면, 그 생각은 더욱 깊어집니다. 그래서일까요? 슬픔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가운데 상실은 슬픔과 가장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희형의 ‘예습’은 예기치 못한, 그러나 빈번하게 일어나는 상실의 풍경을 어린 화자를 통해 그려냅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상실의 풍경과 달리, 여기에서 화자는 시종일관 담담함을 유지합니다. 하지만 그 사이에서 약간씩 드러나는 화자의 제스처들(누군가 도와주던 일을 혼자서 하게 되는 어려움이나, 죽은 아버지의 시신을 마지막으로 흔들어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 등)은 그 담담함 이면에 자리 잡고 있는 슬픔의 정서를 보여줍니다.



근조 화환은 나보다 더 키가 컸다 열을 맞춰 천천히 시들어갔다 상주보다 더 상주 같았다// 혼자서 가운을 여미는 것은 나에겐 벅찬 일이었다 넥타이를 잘 매지 못해서 장례식장에서 삼천 원짜리/ 자동 넥타이를 샀다 얼마 안 돼서 실밥이 다 터져 나와서 부끄러웠다// 친구들은 모두 목을 잘 동여매고 있었고 모두가 검정색 양복 한 벌을 가지고 있었다 마치 누가 죽을 것을 어디서 배워온 것처럼// 복도마다 가지런한 영정 사진/ 다들 너무 늙었고 너무 젊다/ 빈소엔 죽은 사람들과 산사람들이 함께 웃고/ 나는 이제 잠이 온다// 미동하지 않는 것들의 어깨를 흔들어도 될까 지금이라도 아버지를 한번 흔들어볼까// 늘어진 화환은 형들의 목매달았던 나무와 무척 닮았다// 떨어져 있는 꽃잎을 보면 죽은 친구들이 생각났다// 국화는 시들어도/ 정말 하?다// 나는 키가 작아서 죽지 못했어, 작은 형이 이 말을 하고 일 년 뒤 죽어버렸을 때 나는 죽기에는 너무 늦었구나/ 생각했다 역시 형들은 뭐든 나보다 잘했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필사적으로 걸었다// 걷다 보면 저기/ 나의 나무가 보였다// 그곳은 어땠니?/ 사람이 많이 왔니?



-이희형, ‘예습’ 전문



‘근조 화환’보다 작고, ‘혼자서 가운을 여미는’ 것조차 벅차하는 화자에게 장례식은 아직 생소한 일처럼 보입니다. 옷을 잘 갖춰 입은 친구들과의 비교 속에서, 화자의 생소함은 더욱 부각됩니다. ‘가지런한 영정 사진’들 앞에서 화자는 아버지의 시신을 바라보며 그를 마지막으로 한번 흔들어볼까 고민합니다. 이러한 묘사는 화자에게 죽음이 예기치 못한 사건임을, 그 속에서 느끼는 황망함과 슬픔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단지 ‘아버지’의 장례식장 풍경이라기에는 복수형이 너무 자주 등장합니다. ‘목매단 형들’과 ‘죽은 친구들’, 빈소의 ‘죽은 사람들’ ‘복도마다 가지런한 영정 사진/ 다들 너무 늙었고 너무 젊다’ 그리고 ‘미동하지 않는 것들’에 이르기까지. 화자의 진술은 이러한 복수형의 활용을 통해 평범한 장례식 풍경을 넘어 우리 사회의 사건들을 연상시키게 만듭니다. 살아남고자 올라간 옥탑에서, 수학여행을 떠나던 배에서, 스크린 도어를 고치던 지하철역에서, 과도한 경쟁 속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학생들에 이르기까지, 화자가 호명하는 ‘아버지’와 ‘형들’ ‘친구들’은 구조적 폭력에 의해 죽어간 타자들의 이름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러한 풍경 속에서 화자는 자신의 죽음을 내다봅니다. 마치, 자신 또한 언제든 그러한 죽음에 연루될 수 있다는 듯이. 자신의 미래를 ‘예습’하듯이.

어쩌면 이것이 우리가 마주한 슬픔의 풍경이 아닐까 싶습니다. 나 자신도 언제든 참사의 희생자가 될 수 있다는 자각과 함께 참사의 희생자들을 기억하기 위해 상실의 슬픔을 상기하는 것. ‘304 낭독회’나 ‘생일’이 그러하듯이, 이희형의 시 또한 그 슬픔의 풍경을 그려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속에서 슬픔은 다음과 같은 윤리적 의미를 포함합니다. 슬픔은 죽은 타자를 보전하는 그릇이면서, 우리의 죽음을 내다보게 만드는 정서적 계기라고.

그러나 이곳 어디에도 ‘복’이 자리할 곳은 없어 보입니다. 비록 슬픔이 윤리적인 의미를 지닐지라도, 그렇기에 슬픔은 복이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 손쉬운 해답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니 질문을 좀 더 파고들어서 보고자 합니다. 슬픔이 가질 수 있는 의미에 대해, 윤동주가 말한 ‘복’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문학으로부터 그 해답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2. 슬픔의 고통과 윤리의 산출

슬픔이 죽은 타자를 보전하는 그릇이자 우리의 죽음을 내다보게 하는 계기라면, 슬픔과 함께하는 우리의 삶이란 참 연약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의 일상이란 그 슬픔 위에 떠 있는 살얼음 같은 것일 테니 말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종종 떠나간 이를 앓으며, 우리의 걸음을 멈추고 맙니다. 어쩌면 우리의 삶에서 ‘슬픔’이란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한 벌인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내면에 슬픔이라는 형식으로 죽은 타자를 간직함으로써, 우리의 유한함과 상실의 고통을 기억하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슬픔은 복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을 끝없이 괴롭히는, 해소할 수 없는 고통인 것은 아닐까요? 그럼에도 우리는 자주 슬픔의 고통을 외면하고, 그 윤리적인 의미만을 강조하는 것 같습니다.



당신들을 잃은 뒤, 우리들의 시간은 저녁이 되었습니다.

우리들의 집과 거리가 저녁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어두워지지도, 다시 밝아지지도 않는 저녁 속에서 우리들은 밥을 먹고, 걸음을 걷고 잠을 잡니다.



...



당신이 죽은 뒤 장례를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



-한강, ‘소년이 온다’ 中



광주 민주화 운동을 정면으로 다뤘던 한강의 소설에서 화자는 죽은 타자들을 껴안은 채 살아갑니다. 소설에서 나타나듯이 화자는 그들에 대해 적절한 애도의 절차를 행하지 못했기에, 그는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죽은 이를 위한 장소를 사회적 질서가 허락하지 않아 그의 삶이 죽은 이를 위한 시간이자 장소, 슬픔 그 자체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타자를 내면에 간직하고자 자신의 삶을 내어준다는 점에서, 그는 슬픔의 윤리적 의미에 충실한 주체(主體)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그의 삶이 평온하고 행복하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의 삶은 “더 이상 어두워지지도, 다시 밝아지지도 않는 저녁 속에” 영원히 머무르기 때문입니다. 그 고통을, 한강의 화자는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어떤 기억은 아물지 않습니다. 시간이 흘러 기억이 흐릿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기억만 남기고 다른 모든 것이 서서히 마모됩니다. 색 전구가 하나씩 나가듯 세계가 어두워집니다. 나 역시 안전한 사람이 아니란 걸 알고 있습니다.

…… 나는 싸우고 있습니다. 날마다 혼자서 싸웁니다. 살아남았다는, 아직도 살아 있다는 치욕과 싸웁니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웁니다. 오직 죽음만이 그 사실로부터 앞당겨 벗어날 유일한 길이란 생각과 싸웁니다. 선생은, 나와 같은 인간인 선생은 어떤 대답을 나에게 해줄 수 있습니까?



-한강, ‘소년이 온다’ 中



그럼에도 우리는 그 고통스러운 삶을 너무나 쉽게 ‘윤리적’이라고 말하며,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으로 취급하곤 합니다. 그 속에서 개인이 경험하는 고통은 윤리라는 정언(定言) 아래 희석되어 버리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윤리라는 이름 아래 행해지는 전체주의의 한 편린(片鱗)인 건 아닐까요? 대의를 위해 희생하라던 전근대적 발상이 단지 그 틀을 윤리라는 이름으로 바꿨을 뿐이라고 말입니다. 어쩌면 윤리는 우리의 삶을 항상 감시하며 지킬 것을 명령하는 패놉티콘의 형상이 되어버린 것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종종 희생자나 그의 유가족들에 대해 잘못된 접근 경로를 취하곤 합니다. 마땅히 옳은 것을 정립한 후 그것을 행한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춰, 개인의 슬픔과 고통을 윤리를 위해 감내해야 하는 것으로 취급하거나 지워버리곤 합니다. 하지만 윤리는 모든 것에 선행하는 원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한 사람 한 사람의 슬픔이 남긴 부산물에 가깝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소년이 온다’의 의의란, 단순히 광주 민주화 운동과 그 희생자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희생자들과 그들을 기억하는 자들의 슬픔과 고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 있을 것입니다. 이 작품이 특정한 윤리를 직접적으로 제시하려는 시도를 결여하고 있는 것은, 그 슬픔과 고통을 최대한 온전히 담아내기 위한 의도적인 선택이 아닐까 싶습니다.

문학은 이미 존재하는 윤리를 가상적으로 실현하는 매개물이 아니라, 정서적 이미지를 통해 그것을 내파하고 재구성하려는 반복적 시도에 가깝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문학은 슬픔과 윤리의 관계에 대해 어떤 단서를 제공합니다.



…… 검고 하얗고 고요한 너의 윤곽 안으로 한 번도 본 적 없는 무늬들이 가득 찬다. 피부일지도 옷일지도 모를 무늬를 접었다가 펼친다. 태양이 밀려드는 바다. 너는 눈을 감는다. 나는 네가 노래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너의 목소리 속에서 슬프고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발견해 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태양이 밀려드는 바다. 너는 말이 없고 너는 눈을 뜨지 않고 너는 자꾸만 내 주변을 맴돌아 붉게 물들이고 있다. 네가 밀려드는 바다. 그런 바다는 새롭게 쓰여지고 괴로운 역사처럼 거듭되지만



-김이강, ‘태양이 밀려드는 바다’ 中



김이강의 시에서 화자는 태양이 밀려드는 바다의 꿈속에서 타자의 방문을 받습니다. 그것은 사라져버린 누군가일 수도 있고, 혹은 공동체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부재하는 누군가에 의해 촉발된 슬픔이라는 감각 자체일지도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더 이상 ‘말이 없고’ ‘눈을 뜨지 않은’ 채, ‘자꾸만 내 주변을’ 맴돈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이러한 끝없는 맴돎 속에서 ‘바다’라는 기표는 반복해서 등장하며, 종국에는 ‘네가 밀려드는 바다’로, ‘새롭게 쓰여지고 괴로운 역사처럼 거듭’되는 장소로 의미화됩니다. 문학이 제시하는 윤리란 이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직접적인 명제를 통해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김이강의 ‘바다’처럼 슬픔의 반복 속에서 의미화되는 것이라고. 이것을 문학이 제시하는 슬픔의 윤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슬픔의 윤리란 상실의 슬픔과 고통 속에서 부산물처럼 떠오르는 윤리입니다. 그렇기에 슬픔의 윤리는 일상의 혼란과 뒤틀림을 동반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서영채 평론가는 허수경의 해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시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우리에게 가능한 것이 있다면, 시를 읽으며 가슴이 울렁거림을 느끼고, 그것도 울렁거림에 관한 자기 확신의 단계에 도달한 것도 아닌 채로 다만 내가 시를 읽으니 기분이 좀 묘하다, 내 마음이 요새 뭔가 잘못되었던 것이 아닐까, 혹은 시라는 물건이 본디 좀 유해하거나 유독한 것이 아닐까”(‘빌어먹을, 차가운 심장’)라고. 비록 시에 대한 이야기지만, 그 자리에 문학을 넣어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의 말대로 문학이란, 그리고 문학이 제시하는 슬픔의 윤리란 우리의 일상을 위협하는 위험한 물건일 것입니다. 슬픔을 반복한다는 것은 그 고통을 껴안음으로써 스스로 일상을 뒤흔드는 일이니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허수경은, 문학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는 시인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직 아무도 방문해보지 않은 문장의 방문을 문득/ 받는 시인은 얼마나 외로울까,/ 문득 차 안에서/ 문득 신호등을 건너다가/ 문득 아침 커피를 마시려 동전을 기계 속으로 밀어넣다가// 문장의 방문을 받는 시인은 얼마나 황당할까?// 아주 어린 시절 헤어진/ 연인의 뒷덜미를 짧은 골목에서 본 것처럼/ 화장하는 법을 잊어버린 가난한 연인이 절임 반찬을 파는/ 가게 등불 밑에 서서/ 문득, 그 문장의 방문을 받는 시인은/ 얼마나 아릴까?// 가는 고둥의 살을 빼어 먹다가/ 텅 빈 고둥 껍질 속에서 기어나오는/ 철근 마디로만 남은 피난민 거주지/ 다시 솟아오르는 폭탄을 보다가/ 문득, 문장의 방문을 받는 시인은/ 얼마나 쓰라릴까, 혹은// 부드러운 바위를 베고 아이야 잘자라, 라는/ 노래를 하고 있던 고대 샤먼이/ 통곡의 거리로 들어와/ 부패한 영웅의 사진을 들고 걸어가는 것을/ 보면서 옛 노래를 잊어버린 시인이/ 그 문장의 방문을 받을 때/ 세계는 얼마나 속수무책일까?



-허수경, ‘문장의 방문’ 전문



허수경에게 있어 작가란 ‘문장의 방문’을 받는 자입니다. 그것은 새처럼 어느 날 문득 작가에게 찾아옵니다. 창작의 고통은 그런 와중에서도 일상을 살아가야 한다는 점에 있을 것입니다. 신내림을 바라는 무당처럼 완전한 무아지경의 세계도 아닌, 완전히 일상에 충실한 것도 아닌, 절름발이와 같은 상태로 말이지요. 허수경의 시 ‘문장의 방문’은 그 지점을 가리키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문장’은 일상에 밀려 외면하던 것들을 일깨웁니다. 거기에는 헤어진 옛 애인의 가난과 폭격을 당하는 피난민들의 삶과 같이, 우리의 일상에 의해 은폐되어 있던 타자의 고통이 담겨 있습니다. 허수경은 이러한 문장의 방문에 대해 ‘세계는 얼마나 속수무책일까’라고 말하며, 반어적으로 작가의 자세를 정립합니다. 작가란 타자의 슬픔을 받아들이기 위해 일상이 흔들리고 뒤틀리며 균열이 생기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받아들이는 자라고 말입니다.

위에 인용했던 김이강의 시는 다음과 같은 구절로 끝이 납니다.



태양이 밀려드는 바다. 눈을 감으면 밀려들어 온다.

나는 이 꿈에서 탈출하지 않는다.



-김이강, ‘태양이 밀려드는 바다’ 中



“나는 이 꿈에서 탈출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러한 화자의 태도에서 윤리적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의 결을 따라가는 자세가 아닐까 싶습니다. 여기에는 일상이 흔들리고 뒤틀리더라도, 슬픔과 고통의 반복 속에서 당신의 부재를 간직하며 살아가겠다는 마음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예수의 죽음을 기억하고자 스스로의 삶을 바치는 종교적인 자세처럼, 혹은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라던 윤동주의 자세처럼 말입니다.



3. 슬픔의 복, 우리라는 가능성

슬픔과 고통의 반복 속에서 타자를 보전하고자 하는 마음, 그로부터 부산물처럼 떠오르는 것이 슬픔의 윤리라면, 이은규가 다른 시인의 시를 인용하는 까닭도 여기에 맞닿아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다른 시인의 말을 인용한다는 것은 곧 그들의 슬픔, 고통을 내 안에 받아들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바라키 노리코의 ‘내가 가장 예뻤을 때’에 기대어 썼다는 시에서 화자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망루는 와르르 무너지고/ 꿈꾸지 않은 곳에서/ 흰구름 같은 것이 보이곤 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멀리서 가까이서 사람들이 죽었다/ 춥거나 뜨거운 곳에서 이름도 없는 방에서/ 나는 그늘지지 않을 기회를 잃었다



-이은규, ‘내가 가장 예뻤을 때’ 中

이 시는 이바라키 노리코의 시와 마찬가지로 “내가 가장 예뻤을 때”라는 문장으로부터 화자의 풍경을 그리고 있습니다. 구조의 유사성으로 인해, 화자의 개인적 풍경들에는 이바라키 노리코가 그렸던 전쟁의 풍경이 떠오릅니다. 그 위에서 이은규의 화자는 자신이 목격한 타자의 죽음을 덧칠합니다. 이은규의 화자가 입을 여는 것은 이처럼 두 풍경이 조우하는 지점입니다. 그렇기에 화자는 “내가 가장 예뻤을 때”라는 표현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내면으로 깊이 침잠할 것 같았던 지점에서 사회의 이면에 은폐되어 있던 타자의 죽음을 드러냅니다.

어쩌면 이은규 또한 ‘문장의 방문’을 받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비록 자신의 일상이 흔들린다 할지라도, ‘내가 가장 예뻤을 때’의 슬픔과 고통을 상기하고 그것을 말함으로써 타자의 죽음을 기억하고자 노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인용을 통해 이루어지는 이러한 발화의 구조는 자신의 목소리 안에 타자의 자리를 마련하려는 시도라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평온한 일상에 불쑥 찾아드는 문장들을 향해 귀를 기울이고, 슬픔이 초래할 고통을 자신의 몸을 통해 반복하는 것, 그것이 슬퍼하는 자의 자세일 것입니다. 그래서 슬퍼하는 자란, ‘잠들지 않는 귀’와 같습니다. 이은규의 “당신을 듣기 위해 항상 열어두었던 내 귀”(‘청진의 기억’)라는 표현처럼 말입니다.



또 어느 날은 네가 허공에 대고 혼잣말을 하고 있지. 혼자 하는 말은 혼자 하는 생각과 얼마만큼 비슷한 걸까. 나는 말벗이 될 수 없구나. 대신 비밀이 되어줄게. 나는 아무도 모르게 커져서 먼 훗날 너를 품에 안고 고요하게 폭발할게.



-김행숙, ‘잠들지 않는 귀’ 中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온전히 타자를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어쩌면 신조차 타자를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신도 기도를 들어주는 존재가 된 것일지도 모릅니다. 전능하지만 전지(全知)하지 않아 슬퍼하며 인간의 기도에 귀 기울이는 모습으로. 김행숙의 화자 또한 그러합니다. “말벗이 될 수 없구나”라고 말하면서도, “먼 훗날 너를 품에 안고 고요하게 폭발할게”라고 약속합니다. 슬퍼하는 신처럼 타자에게 귀 기울이며, 자신의 삶에 타자의 고통을 받아들이기 위한 자리를 마련합니다.

김행숙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는 아직 죽지 않은 사람으로서/ 죽은 사람들을 많이 가진 사람입니다./ 죽은 사람들이 나를 홀로 21세기에 남겨두고 떠난 게 아니라/ 죽은 친구들을 내가 멀리 떠나온 것같이 느껴집니다./ 오늘은 이 세상 끝까지 떠밀려 온 것같이/ 2014년 4월 16일입니다”(‘1914년 4월 16일’). 타자의 죽음을 기억하기 위해 김행숙은 기꺼이 슬퍼하는 자가 되겠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선언은 슬픔이 가진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자신의 내면으로 침잠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향해 스스로를 개방할 수 있는 가능성 말입니다. 그 가능성 속에서, 슬픔은 슬퍼하는 다른 자에게 손을 내미는 것을 가능하게 만듭니다. 박준의 ‘슬픔은 아직 자랑이 될 수 있다’는 말과 박소란의 ‘한 사람의 닫힌 문을 쾅쾅 두드렸네’라는 말은 이 지점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철봉에 오래 매달리는 일은/ 이제 자랑이 되지 않는다// 폐가 아픈 일도/ 이제 자랑이 되지 않는다// 눈이 작은 일도/ 눈물이 많은 일도/ 자랑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작은 눈에서/ 그 많은 눈물을 흘렸던/ 당신의 슬픔은 아직 자랑이 될 수 있다// 나는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한다//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하는 것은// 땅이 집을 잃어가고/ 집이 사람을 잃어가는 일처럼/ 아득하다// 나는 이제/ 철봉에 매달리지 않아도/ 이를 악물어야 한다// 이를 악물고/ 당신을 오래 생각하면// 비 마중 나오듯/ 서리서리 모여드는// 당신 눈동자의 맺음새가/ 좋기도 하였다



-박준,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 전문



박준의 화자는 많은 것들이 더 이상 자랑이 되지 않는다고 토로합니다. 거기에는 자신의 능력, 신체적 아픔과 성격 따위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것들이 더 이상 자랑이 되지 않는 가운데, 화자는 타자를 향해 “당신의 슬픔은 아직 자랑이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집을 잃고 사람을 잃은 타자를 향해, 화자는 그의 슬픔과 고통에 손을 내밉니다. ‘좋지 않은 세상에서’ 그는 타자의 슬픔을 생각하며, 그를 자신의 마음속에 새기고자 이를 악뭅니다. 이처럼 슬퍼하는 다른 자를 향해 손을 내미는 것, 이것이 슬픔의 가능성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것은 나와 타자 모두가 상실과 결여를 가진 채 살아간다는 것, 타자를 보전하기 위해 그들 또한 반복되는 고통을 경험한다는 것을 이해하려는 시도입니다. 그렇기에 슬픔은 연대의 가능성이기도 합니다. 비록 그것이 아득한 일일지라도, 영원히 가닿을 수 없는 수평선 같은 일일지라도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를 악물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박준의 방식으로 하는, 타자의 슬픔에 충실하겠다는 선언이 아닐까 싶습니다.



슬픔이 왔네/ 실수라는 듯 얼굴을 붉히며/ 가만히 곁을 파고들었네 새하얀 무릎에 고개를 묻고 잠시 울기도 하였네/ 슬픔은 되돌아가지 않았네// 얼마 뒤 자리를 털고 일어나 나는, 그 시무룩한 얼굴을 데리고서/ 한 사람의 닫힌 문을 쾅쾅 두드렸네



-박소란, ‘감상’ 中



‘벽제 화원’이라는 시에서 박소란의 화자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죽은 자를 위하여// 나는 살아요”. 그 말처럼, 박소란의 시에서 타자의 죽음과 슬픔의 정서는 일상적으로 반복됩니다. 많은 경우 그의 시에서 죽음과 슬픔은 정서적 배경으로 음각되어 있으며, 화자는 그것에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박소란의 화자는 슬픔의 고통에 몸부림치며, 때로는 견딜 수 없음을 토로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소란의 시집 ‘한 사람의 닫힌 문’의 화자가 슬픔의 고통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하나의 가능성으로 역전시키고자 노력한다는 점은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시집에서 슬픔이란 언제든 자신의 일상을 파괴할 수 있는 불치병처럼 다뤄지곤 합니다. 그럼에도 그는 ‘감상’이라는 시에서, 슬픔과 함께하는 삶을 그리려 노력하기도 하고, ‘병을 얻다’라는 시에서는 그것을 소중히 다루며 키우려는 자세를 보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박소란의 시에서 ‘슬픔’이란 저항할 수 없는 고통이면서 동시에 정호승의 시구처럼 “사랑보다 소중한”(‘슬픔이 기쁨에게’)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무기력하던 화자를 일으켜 세우고, “한 사람의 닫힌 문을 쾅쾅 두드리게” 만드는 것이 슬픔이라면, 슬픔은 그 자체로 연대를 가능하게 만드는 가능성이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슬픔은 단순한 병이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타자와 함께할 수 있게 만드는 가능성이기도 합니다. 슬픔은 고통스러운 것이되, 스스로를 타자를 향해 개방할 수 있게 만드는 가능성이자 연대를 가능하게 만드는 힘인 것입니다. 윤동주가 말했던 ‘복’이란 이런 슬픔의 역설적인 힘을 가리켜 말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슬퍼하는 자들은 이미 복을 받은 자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복은 슬픔 이후에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견딜 수 없이 아프고 무거운 슬픔 그 자체였으니.



4. 슬픔의 공동체를 위하여

슬픔 그 자체가 바로 복이었다면,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슬픔의 고통을 온전히 받아들일 때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이었다면 우리는 일상을 위해 그 슬픔과 복을 모두 거부한 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다른 사람을 향해 ‘그만 슬퍼하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곤 합니다. 누군가의 슬픔에 공감하는 것보다 사회의 질서와 안녕이라는 미명(美名)에 따라 사고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일상이란 대체 얼마나 값진 것일까요. 슬픔을 꾹 눌러둬야만 유지될 수 있는 것이라면, 타자를 외면해야 가능한 것이라면 우리의 일상이란 너무나 평범한 악에 불과하지 않을까요? 슬퍼하는 자들이란 이런 우리의 일상에 균열을 일으키는 불온한 자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계속해서 슬퍼한다는 것은 미명을 거슬러 타자에게 귀를 기울인다는 신호일 테니 말입니다. 그래서 슬퍼하는 자들의 모습에는 어떤 전복성이 숨어있다고 생각합니다. 김행숙의 선언처럼, 혹은 박소란의 두드림처럼 말입니다. 신용목의 화자가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면,// 내가 돌아보았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지 않아도/ 나는 돌아보았다”(‘모래시계’)라고 말하는 것도 그러한 것일지 모릅니다.



내가 죽은 자의 이름을 써도 되겠습니까? 그가 죽었으니/ 내가 그의 이름을 가져도 되겠습니까? 오늘 또 하나의 이름을 얻었으니/ 나의 이름은 갈수록 늘어나서, 머잖아 죽음의 장부를 다 가지고// 나는 천국과 지옥으로 불릴 수도 있겠습니까?// ……// 죽은 자에게 나의 이름을 주어도 되겠습니까? 그가 죽었으니 그를 내 이름으로 불러도 되겠습니까?



-신용목, ‘공동체’ 中



사회적 질서 안에서 살아가는 일상의 존재들에게, 이름이란 그 자체로 우리가 사회 안에 있음을 나타내는 증거입니다. 이름을 가진 한에서만 우리는 사회적 존재로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그 때문에 이름은 사회적 질서 안에서 우리 자신보다 더욱 우리 자신 같은 무엇입니다. 그런 이름을 두고, 신용목의 화자는 “내가 죽은 자의 이름을 써도 되겠습니까?”라고, 나아가서는 “죽은 자에게 나의 이름을 주어도 되겠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죽은 이를 자신의 이름으로 삼고, 죽은 이에게 자신의 이름을 줌으로써, 신용목의 화자는 자신의 사회적 자리에 부재하는 타자를 위한 자리를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라고 말했던 한강의 화자처럼 말입니다.

어쩌면 신용목은 우리에게 연대에 대한 상상을 좀 더 부추기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연대란, 산 사람과 산 사람만이 아니라,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가운데에서도 가능한 것이라고. 그러한 상상력이 슬픔이 가진 전복적인 힘이라면, 슬픔은 구조적 폭력에 대항할 수 있게 하는 힘인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고등학교 때 물리 선생이 입버릇처럼 하던 말 기억나니? 이해가 안 되면 그냥 외우라고 했잖아. 반쯤 웃으며 인주는 나를 건너다보았다. 그렇게 너를 그냥 외워볼게. 대신 시간을 좀 줘.



-한강, ‘바람이 분다, 가라’ 中



한강은 ‘바람이 분다, 가라’에서 인주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것이 슬픔이라는 용기에 붙여진 설명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하여, 잊거나 모른 척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외워볼” 것. 어쩌면 그것이 타자를 보전하는 방법이자 슬픔의 역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라져 가는 타인들에 대하여, 우리는 때때로 그들의 행동이 자신의 입장에서 이해할 수 없다고, 비합리적이라는 이유로 너무나도 쉽게 외면하곤 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광주를, 용산을, 세월호를 잊고자 노력해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사건들은 그것에 대해 말하기 위해선 충분한 시간을 필요로 할지도 모르는데 말입니다. 슬퍼한다는 것은, 그 시간을 마련하기 위해 타자를 외워보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슬픔을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그 끔찍한 고통을 인내하기 위해 당신의 인생을 희생하라는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없어야 합니다. 엄숙주의는 슬픔의 윤리가 아니라, 우리의 삶을 항상 감시하고 우리에게 지킬 것을 명령하는 패놉티콘의 간수와 같기 때문입니다. 대신 당신의 슬픔을 소중히 여겨달라고, 당신의 슬픔에 손을 내밀고 싶다고 조심스럽게 말해보고 싶습니다. 그 슬픔을 외면하지 말아 달라고, 당신의 슬픔을 함께 나누어 가질 수 있으면 좋겠다고. 죽은 이의 이름을 나누어 가지듯이, 우리가 서로의 이름을 나누어 가지자고 말입니다. 조심스럽게 슬픔에 빠진 사람들의 고통을 헤아리면서, 이해가 가지 않는다면 그것을 외워보려 노력하면서, 슬픔의 공동체가 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슬픔과 함께 머무르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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