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카페>경험이 만드는 ‘무의식적 학습’… 인류 생존의 필수적 능력

■ 인지심리학

김민식의 과학으로 본 마음 - ⑤ 스스로 알 수 없는 마음

‘빛’이란 단어만 봐도 동공 작아지고… 특정 패턴 반복되면 의식 안해도 학습능력 향상
‘자극에 대한 반응’‘행동에 따른 결과’ 반복 통해 나도 모르는 사이 내 몸이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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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는 스스로 알 수 없는 마음이 있다. 분명히 자신의 마음, 생각, 감정이지만, 어떻게 생겨나고,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알지 못하는 마음 말이다. 심지어 그런 마음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가령,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벌레를 무서워하는 사람의 마음을 살펴보자. 바퀴벌레를 보고 기겁하며 피하는 사람에게 왜 무서워하냐고 물어보면, 대부분 이런 식으로 대답한다. “징그럽고, 더럽고, 나한테 달려들 것 같아서요.” 하지만 이러한 (의식적)생각은 사실이 아니다. 본인이 느끼는 그 공포의 마음은 사실, 과거 어렸을 때 학습돼 저장된 무의식적 마음 때문이다. 그 무의식적 마음이 생겨난 기전은 다음과 같다. 우선, 모든 인간은 본능적으로(선천적으로) 갑자기 큰 소리가 나면 깜짝 놀라게 돼 있다. 아무리 강심장을 가진 어른이라도 조용한 방에서 옆에 있는 누군가가 갑자기 크게 소리를 지른다면 순간적으로 놀랄 수밖에 없고, 이러한 반응은 갑작스러운 외부 환경 변화에 우리 몸이 경계 시스템을 발동해 생존에 도움이 되도록 만드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세상에 호기심이 많은 한두 살 아이들에게 처음으로 바퀴벌레를 보여주는 상황을 생각해보자. 일반적으로 처음 바퀴벌레를 보는 아이들은 이 벌레를 무서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벌레가 도망가지 않는다면 손으로 잡으려 할지도 모른다. 문제는, 주변에 어른(부모나 혹은 형제자매)이 바퀴벌레를 보고 있는 아이 옆에서 갑자기 큰 소리를 지르는 일이 발생하는 상황이다. 갑자기 큰 소리가 나면 어른도 놀라는데 아이는 말해 무엇하겠는가! 아이가 이런 경험(벌레를 볼 때 누군가가 소리를 질러 깜짝 놀라는 경험)을 수차례 하게 되면 아이의 뇌 회로는 벌레라는 자극에 대해 공포 반응이 자동적으로 나오게 된다. 이러한 자극과 자극 간의 연합은 반복적 경험에 의해 자동적으로 형성되고, 우리의 의식과는 상관없이 작동하는 대표적인 무의식적 마음이다.

조건형성(conditioning)이라고 부르는 이러한 과정은 러시아의 생리학자이자 심리학자인 이반 파블로프(Ivan Pavlov)에 의해 100여 년 전에 최초로 연구됐는데, 최초의 조건형성은 개에게 음식을 줄 때 특정한 소리를 함께 들려주는 실험을 통해 증명됐다. 음식을 먹을 때 개는 타액을 분비한다. 갑자기 큰 소리를 들으면 깜짝 놀라는 것이 자동적이고 선천적인 것처럼, 개들이 음식을 먹을 때 침을 흘리는 것 역시 선천적이고 자동적인 생리 반응이다. 하지만 음식과 특정한 소리를 함께 짝지어 제시하면, 나중에는 음식 없이 특정한 소리만 들어도 개들은 침을 흘리게 된다. 마치 바퀴벌레와 함께 나타난 큰 소리에 깜짝 놀라던 아이가 바퀴벌레와 큰 소리가 연합된 후에는 바퀴벌레만으로도 깜짝 놀라게 되는 것처럼, 파블로프의 개는 음식과 함께 제시됐던 특정한 소리만 들어도 침을 흘리게 되는 것이다.

혹자는, 개가 소리에 대해 타액을 분비하는 것이 도대체 인간의 마음이나 행동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는 질문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심리학자들이 인간의 마음과 행동을 연구할수록 결국 인간의 마음이나 동물의 마음이 같은 토대 위에 있고, 인간 마음의 작동 기전이 동물과 크게 다를 바 없음을 깨닫게 된다.

타액 분비를 촉진하거나 억제하는 것은 우리의 교감 및 부교감신경계로 이뤄진 자율신경계가 관장하는데, 자율신경계는 말 그대로 우리의 의지나 마음먹은 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무의식적 마음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학습되고 저장됐다가 특정 상황이나 환경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최근 네덜란드 흐로닝언대의 실험심리학자들이 한 학술지(Psychological Science)에 게재한 논문에서, 밝기와 관련된 단어를 듣거나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 눈의 동공 크기가 변화한다는 것을 보고했다. 즉, ‘어둠’ ‘밤’ 같은 단어를 들으면 동공이 커지고 ‘조명’이나 ‘낮’과 같이 밝은 단어를 들으면 동공이 작아지는 것을 관찰한 것이다. 동공이 확장되거나 수축되는 것 역시 자율신경계가 담당하는 것으로, 동공은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두운 곳에서는 빛을 많이 받아들이기 위해 자동으로 확장되고, 반대로 밝은 곳에서는 눈이 부시는 것을 막기 위해 저절로 축소된다. 이러한 자율적 조정이 그동안 우리가 접해온 단어의 의미가 활성화되는 것만으로도 일어난다는 것은 마음의 작동 방식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우리가 경험한 모든 것들이 결국 우리 마음을 구성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몸(뇌)과 행동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알레르기 반응이나 면역체계 역시 과거 경험에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예를 들면, 특정한 화학 분자에 의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만일 특정한 화학 성분과 중립적인 자극이 반복적으로 연합된 경험을 한다면 나중에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그 특정한 화학 성분 없이 중립적인 자극만으로도 알레르기 반응이 나타날 수 있다. 가령 장미 꽃가루에 알레르기가 있으면 꽃가루에만 노출되는 것이 아니라 그 꽃을 함께 보는 경험이 반복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나중에는 꽃가루가 없는 인조 장미에 대해서도 꽃가루 알레르기 반응을 보일 수 있는 것이다. 또 다른 예로, 항암 주사를 맞는 암 환자의 경우 항암 주사로 인해 면역력이 떨어질 수 있는데, 이렇게 면역력을 떨어뜨리는 항암 주사와 병원이라는 환경이 연합되면 나중에 항암 주사를 더 이상 맞지 않는 상황에서도 병원만 오면 면역력이 떨어질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을 역으로 이용해 면역력을 높이는 약이나 주사를 맞을 때마다 특정한 음악을 듣는다면, 이후 그 음악을 들을 때마다 면역력이 좋아질 수도 있다. 큰 소리와 벌레, 음식과 벨소리, 꽃가루와 꽃 모양, 항암 주사와 병원, 이렇게 하나(전자)는 선천적으로 특정 반응을 일으키는 자극이고 다른 하나(후자)는 특정 반응과는 무관한 중립적인 자극으로 전자와 함께 제시된 것뿐인데, 이 둘을 함께 경험함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의식이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새로운 마음과 행동을 형성하게 된다.

지금까지 설명한 단순한 자극과 자극의 연합을 통한 무의식의 형성 말고도 우리는 어떤 반응을 먼저하고 나서 그 반응에 대한 결과를 연합하는 새로운 종류의 조건형성도 한다. 어떤 행동을 하면 그 행동의 결과로 일어나는 일을 우리는 늘 경험하며 살아간다. 방으로 들어가기 위해 방문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연다. 문손잡이를 돌리면 문을 열 수 있는 상태가 되고 문을 당기면 문이 열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게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다. 자신이 어떤 행동(예, 문을 여는 행동)을 하고 나면 환경이 바뀌는 일(예, 문이 열리는 상황)을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번, 수백 번 경험하며 살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 욕실 문을 열고 들어가 치약 튜브 뚜껑을 당기면 뚜껑이 열리고, 튜브를 누르면 치약이 나오고, 샴푸 통 펌프를 누르면 샴푸가 나오는 경험들…. 이 모든 과정이 바로 어떤 행동과 그 행동의 결과 간의 연합을 학습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어떤 행동을 하고 나서 자신이 원하는 결과가 나오면 그 행동은 강화되고, 그렇지 않으면 그 행동은 줄어들거나 사라진다. 당연한 이야기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질문은, 우리가 이렇게 어떤 행동을 더 하게 되거나 덜 하게 되는 이유가 우리가 의식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냐는 점이다.

만일 어떤 행동과 그 행동의 결과가 일관되게 일어나는 상황이지만 행동하는 사람이 자신의 행동과 그 결과 간의 관계를 전혀 의식할 수 없는 경우라도 그 관계를 (무의식적으로) 학습할 수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많은 행동(앞서 언급한 문을 열고, 치약을 짜는 등의 행동들)이 의식적 사고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님을 추론할 수 있다. 이를 알아보기 위해 수년 전 필자의 연구실에서 일련의 실험을 수행했고 그 결과를 학술지(Psychonomic Bulletin & Review)에 발표한 적이 있다.

실험에서, 연구 참가자인 대학생들은 컴퓨터 화면 앞에 앉아 두 개의 과제를 연속적으로 하도록 지시받았다. 첫 번째 과제는 빈 화면 중앙에 동그라미가 나타나면 컴퓨터 자판의 특정 키를 신속하게 누르는 것이었고, 이어서 두 번째 과제는 동그라미가 사라진 화면에 여러 복잡한 문자 자극이 나타나고 그 문자 중 특정한 표적 자극(예, 알파벳 T)을 찾아 빠르게 반응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두 개의 과제(화면에 동그라미가 나오면 자판을 누르고, 그다음에는 여러 문자 가운데 ‘T’를 찾는 일)를 참가자들은 약 1시간 가까이 반복해 수행했다. 그런데 이 실험에는 숨겨진 법칙이 있었다. 참가자들이 동그라미에 반응할 때 그 반응하는 속도에 따라서 두 번째 과제의 표적 자극이 나타나는 위치가 결정되도록 설계한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참가자가 동그라미 자극에 비교적 천천히 반응하면 표적 자극을 화면 오른쪽 상단에 나타나게 하고, 동그라미에 빨리 반응하면 표적 자극이 화면 왼쪽 하단에 나타나게 하는 식이었다. 즉, 모든 참가자에게 동그라미 자극에 대한 각자의 반응 속도에 따라 두 번째 과제에서 표적의 위치가 결정되도록 한 것이다. 이러한 경험을 계속 했을 때, 과연 참가자들은 자신의 반응 속도에 따라 결정되는 표적의 위치를 예상하며 표적을 찾는 시간이 점점 더 빨라지는지를 알아본 것이다. 실험 결과, 놀랍게도 참가자들은 자신의 행동(동그라미에 대해 얼마나 신속하게 행동했는지 여부)과 그 결과(표적이 나타나는 위치)를 학습해 시행을 거듭할수록 점점 더 빨리 표적을 찾는 것을 확인했다. 물론, 모든 참가자는 자신의 행동과 그 결과 간의 관계를 전혀 알지 못했다. 즉, 의식적 자각 없이도 자신의 행동과 그 결과 간의 관계를 학습하고 이용함을 증명한 것이다.

무엇인가를 배운다는 것, 즉 학습한다는 것은 ‘경험을 통해 일어나는 비교적 영속적인 행동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경험 없이 목소리가 변하는 것(예, 변성기 때 일어나는 변화)을 우리는 학습이라고 하지 않는다. 일시적인 변화도 학습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진화’가 세대와 세대를 거쳐 변화하는 환경에서 생존하는 데 필요한 것이라면, ‘학습’은 현재 살아가고 있는 개체가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고 생존하는 데 필수적인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처럼 중요한 능력은 인간뿐 아니라 수많은 동물이 소유하고 있는 능력이며 앞서 언급한 자극과 자극의 연합, 행동과 그 결과 간의 연합 학습 능력은 의식적 생각이 거의 없을 것으로 추정되는 하등동물, 수많은 벌레에게도 있다. 이들이 현생인류보다도 지구상에서 오래 생존해 올 수 있었던 요인에는 분명 이들의 학습능력이 포함돼 있고, 이러한 학습 과정에 의식은 필수적인 요소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결국, 중요한 것은 경험이다. 그것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경험을 통해 우리는 배우고 생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


■ 용어설명

조건형성(conditioning) : 우리가 의식적으로 알고 깨닫는 과정과는 무관하다. 우리의 고차적 사고 과정도 필요 없고 우리가 의식적으로 알고 있든, 혹은 전혀 모르고 있든 상관 없다. 빛이 비치는 쪽으로 물고기가 모이고 바퀴벌레가 보이면 정서를 담당하는 뇌 부위가 활성화되는 것뿐이다. 인간의 뇌도 우리가 의식할 수 있는 영역은 그리 많지 않다. 모든 행동이나 그 행동을 하게 만드는 법칙 등을 의식적으로 모니터링할 만한 여유가 우리의 뇌에는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