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여담>‘폭풍의 화가’ 변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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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호 논설고문

사람들의 가슴을 뒤흔드는 대표적 자연 현상 가운데 하나가 바람이다. 따뜻하든, 차갑든, 부드럽든, 거칠든 마찬가지다. ‘폭풍의 화가’로 일컬어지는 변시지(1926∼2013)에게도 그랬다. “나는 바람을 소재로 한 그림이 유난히 많다. 바람 부는 제주가 내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고독·인내·불안·한(恨)·기다림 등이 그것이다”라던 그는 이런 말도 했다. “태풍이 초가(草家) 마당에 몰아친다. 그 폭풍을 이길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속의 사람은 날아가지 않으려고, 살아남으려고 구부리고 있는 것이다. 내 작품의 폭풍은 독재정권 아래서 마음속 저항도 담았다.”

태어난 제주에서 1931년 가족을 따라 일본으로 이주했던 그는 소학교 2학년 때 씨름대회에서 다쳐 평생 지팡이를 짚게 됐다. 오사카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최고 권위의 공모전에서 역대 최연소 최고상도 받으며 명성을 떨치던 그는 1957년 서울대 총장과 미술대 학장의 간곡한 요청으로 서울대 교수직을 맡아 영구 귀국했다. 그렇게 서울 생활을 시작한 그는 삶의 터전을 1975년 완전히 제주로 옮겨 새로운 화풍을 창출하며, 이런 말도 했다. “아열대 태양 빛의 신선한 농도가 극한에 이르면, 흰빛도 하얗다 못해 누릿한 황톳빛으로 승화된다. 나이 오십에 고향 품에 안기면서 섬의 척박한 풍토와 수난의 역사로 점철된 사람들의 삶에 개안(開眼)했을 때, 나는 제주를 에워싼 바다가 전위적인 황톳빛으로 물들어감을 체험했다.” 그의 제주 시기 그림에는 조랑말, 까마귀, 해, 바다, 돛단배, 돌담, 초가, 소나무, 지팡이 짚은 노인 등이 자주 등장한다. 주로 황톳빛이다. 바람이 거세게 분다. 수평선은 이상과 현실, 삶과 죽음, 고통과 위안, 하늘·바다·땅이 잇닿은 것을 상징한다.

그가 제주 시절 38년 동안 제주를 그린 주요 작품 40여 점을 한자리에 모은 전시회 ‘변시지-시대의 빛과 바람’이 서울 종로구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지난 10월 16일 시작해, 오는 15일 끝난다. 미술평론가 이건용이 “고향을 잃어버린 현대인의 실존을 애잔하게 표현한 것”이라고 하고, 서종택 고려대 명예교수가 “인간 존재의 소슬함, 자연에 대한 외경이 황톳빛으로 상징·승화됐다”고 한 그의 걸작들 앞에 서면, 누구나 어떤 바람이 가슴속에 휘몰아친다고 느끼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