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손에 피묻은 칼과 붓을 든… ‘또 한명의 미켈란젤로’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김병종, 바보예수, 118×95㎝, 혼합재료에 먹과채색.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 김병종의 시화기행 - (104) 바티칸 미술관의 천재들 - 下

서른여섯 살의 카라바조
시비 끝에 귀족 살해하고
몰타섬에 숨어 신분 세탁
2년만에 ‘성 요한의 참수’
목이 잘리는 그림만 12점
자신에게 내린 징벌·속죄
39세에 해변에서 生 마감

땅 위의 고통과 슬픔 통해
하늘의 구원 전한 대변자

작업실에 들어가 처음 화면 앞에 서면 백(白)의 공포가 밀려온다. 대작일수록 더 그렇다. 창 대신 붓 한 자루 들고 맹수 앞에 선 느낌이다.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씩 허리를 굽혔다 폈다 하다 보면 끊어질 듯 아파올 때도 있다. 문득 허기에 두꺼운 커튼을 밀어 밖을 보면 어느새 어둠이 몰려와 있다. 이럴 때 생각하는 두 사람의 미켈란젤로가 있다. 한 사람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고 또 한 사람은 화가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다.

그런데 미켈란젤로라는 두 이름 위에 신은 재능과 함께 각각 평생 싸워야 할 적을 심어놨던 것 같다. 그 적은 물론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와 미켈란젤로 메리시 자신이었다. 가끔 작업이 안 풀려 울고 싶어질 때, 마음이 곤두박질칠 때, 무리해 신열이 나고 허리가 아파 도망치고 싶을 때 나는 이제 거의 외우다시피 한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편지를 떠올리며 스스로 등짝에 죽비를 내리곤 한다. 그리고 나 역시 내 안에서 고개를 드는 적과 싸운다. ‘도망치지 마라. 다시 저 광막한 화면을 향해 창 대신 붓을 들어라.’

“나는 뒤틀린 자세로 일한 탓에 갑상선종에 걸렸고 결국 배와 턱이 붙어버렸다. 턱수염은 하늘을 향해 날리고 이제는 뇌가 목덜미 쪽에 붙어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쉴새 없이 움직이는 붓에서 흘러내린 물감으로 얼굴은 총천연색 양탄자가 되고 말았고 허리가 창자를 뚫고 들어가 간신히 말처럼 엉덩이를 빼서 균형을 잡는다…. 그리고 장님처럼 걸어 다니는데 몸은 전체적으로 시리아 화살처럼 휘어버렸다. 비뚤어진 화살총의 총신이 과녁을 제대로 맞힐 수 없듯이 내 지각은 이제 왜곡되고 부정확해졌다.”

친구에게 보낸 이 편지로 미뤄 병고에 시달리는 팔십객쯤의 미켈란젤로가 떠오르지만 천만의 말씀, 겨우 30대 중반이었을 뿐이다. 비계에 올라 나무판 위에 누워 ‘천지창조’의 천장화를 그리던 무렵(1508∼1512) 친구에게 쓴 편지다. 이 푸르디푸른 나이에 몸이 망가져 이미 노년의 상태에 들어갔던 것이다. 작업하다 허리가 뻐근해질 때면 나는 바닥에 누워 주문처럼 이 편지를 떠올리곤 한다. ‘너는 몸이 활처럼 굽지도 않았고 시각장애인처럼 걷지도 않는다. 그리고 배와 턱은 각각 제자리에 붙어 있다. 자, 다시 붓을 일으켜라.’

또 한 사람의 미켈란젤로인 카라바조 역시 평생 자기 안의 또 다른 자기와 피투성이로 싸운 사람이었다. 그리고 싸움으로 말하면 훨씬 더 격렬했다. 신은 그에게 역시 섬광 같은 재능과 함께 이겨내야 할 악마까지 허락했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로렌초 메디치가에 머물던 청소년기에 싸움질로 코뼈가 부러지고 천장화를 의뢰한 교황 율리우스 2세와는 심하게 싸워 교황의 머리 위로 판자를 내던지는 바람에 멀리 피렌체까지 도망을 쳤는가 하면 높은 비계 위에서 추락해 20년 이상을 절며 걸어야 하는 등 질풍노도의 시기를 거쳐야 했지만 다른 미켈란젤로, 즉 카라바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만큼 그는 극적인 생애를 산 화가였다. 가공할 집중력으로 보름쯤 문을 걸어 잠그고 작업한 뒤에 그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저잣거리에 나타나곤 했다. 응축됐던 에너지가 한껏 풀어지는 순간이다. 자주 시비에 휘말리며 주먹질을 했고 급기야 그 나이 서른여섯 살 때 한 귀족의 자제를 죽이게 된다. 막 스무 살이 되던 해 입성해 그 빛나는 재능으로 단박에 교황청을 사로잡았던 천재는 하루아침에 “누구든 그를 만나면 현장에서 죽여도 좋다”는 흉악범이 돼 도주하는 신세로 바뀌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 타고난 화가는 천신만고 끝에 몰타섬에 숨어들어가 신분 세탁을 하며 그 유명한 ‘성 요한의 참수’를 그리게 된다. 나는 높이 3.6m 폭 5.2m의 이 명작을 몰타섬에 가서 보며 소름이 돋았던 기억이 있다. 장사진을 친 사람들 속에 섞여 가슴 두근대며 봤던 그 불후의 명작은 화가가 살인한 후, 그 섬에 숨어들어온 지 불과 2년 만에 완성한 작품이었다. 그의 상처, 고통, 실의, 낙망, 좌절, 그리고 사죄에 대한 한줄기 소망이 그대로 투사된 그림이었다. 교회당 중앙에는 촛불이 일렁이는 성소와 제대가 있었지만 사람들은 성 요한의 참소 앞에 운집해 있었고 나 또한 그 속에 섞여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참수당한 성 요한의 모습은 너무도 생생하고 극적이어서 마치 내가 그 현장에 있는 느낌이었다. 붙잡히면 참수당할지도 모를 자신에 대한 자의식이 투사된 것으로 보였다. 실제로 그는 참수당해 목이 잘리는 끔찍한 그림을 무려 열두 점이나 그렸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는 스스로에게 내린 징벌과 속죄, 의식의 발로에서였을 것이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김병종 화가, 가천대 석좌교수

몰타에서 그는 ‘성 요한의 참수’ 제작으로 성(聖)기사단(Knight of Malta)의 일원이 돼 비로소 오명을 벗어나는가 싶었지만 도피 중인 살인범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다시 투옥과 탈옥, 도주의 삶이 펼쳐지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재능을 아끼고 한때 교황 바오로 5세 앞에서 공개적으로 옹호까지 했던 보르게세 추기경을 떠올린다. 그를 통해 교황에게 사면을 요청할 심산이었다. 그에게 바칠 그림을 제작해 시칠리아와 나폴리를 거쳐 로마로 다시 입성한다는 계획을 세웠고, 지중해를 오가는 배를 잡아탔지만, 로마로 가지는 못한 채 1610년 뜨거운 7월에 토스카나의 포르토 에르콜레라는 해변의 검은 모래밭 위에서 사망한다. 자객에게 살해됐다거나 급성 말라리아로 죽었다는 등 설왕설래가 많았지만 오랜 세월이 지난 2001년에 성모 마리아 자생병원에서 그의 사망 증명서가 발견되고 이탈리아 중부 작은 교회 한 납골당에서 그의 유해로 추정되는 시신이 발굴되면서 한 많은 서른아홉 살 생애에 대한 에필로그가 드러나게 된다.

예수께서는 ‘나는 의인을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했다. 예수의 가장 충실한 전도자로 살다 순교의 길을 간 바울이나 베드로 역시 흠결 많은 인간이었고, 모세 또한 살인자였다. 예컨대 죄 없는 순결한 자만이 예수의 곁에 올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징표인 셈이다. 그런 면에서 교회당에 걸린 성화라고 다를 수는 없을 것이다. 말하자면, 흠결 없는 생애를 산 화가나 조각가만이 성화를 그리고 성상을 조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죄성을 가졌으나 끊임없이 싸우면서 비틀거리는 걸음으로라도 천성을 바라보며 걸으려 하는 자에게 창조주를 찬양할 수 있는 붓이 허락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 점에서 카라바조는 땅의 죄와 고통과 슬픔의 서사를 통해 하늘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던 대변자였다고 할 수 있다.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죄인임을 노출시키고 그래서 절대자가 내미는 구원의 손이 필요함을 그림을 통해 보여주는 것이다. 진실로 성(聖)과 속(俗), 죄와 구원, 빛과 어둠의 경계에서 땅을 딛고 하늘을 바라본 사람이었다. 양손에 붓과 피 묻은 칼을 든 채.

화가, 가천대 석좌교수


■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

어둠과 惡을 통해 빛과 善을 드러내는 심리적 상황 묘사 뛰어나

1571년 9월 밀라노 출생. 본명은 미켈란젤로 메리시. 카라바조에서 태어났다 해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1571∼1610)로 알려져 있고 흔히 미술사에서는 카라바조라는 이름으로 통용된다. 명암의 극적 대비 속에 근대적 사실성과 심리를 드러내는 키아로스쿠로(Chiaros Curo) 기법의 개척자로 루벤스, 렘브란트 등 후대 바로크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밑그림이나 드로잉 없이 곧바로 본화(本畵)를 그릴만큼 천재적 재능에 극적인 연출력과 서사로 상황 묘사에 뛰어났다. 종교화에 있어서도 이른바 거룩하고 성스러운 이콘의 루틴에서 벗어나 세속과 지상의 이야기를 통해 성서적 진리와 천상의 메시지를 전하는 그림을 그려 종종 교황, 종교 지도자들과 마찰을 빚었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어둠과 악(惡)을 통해 빛과 선(善)을 드러내는 심리적 상황 묘사에 뛰어나 이른바 카라바조형 인물들을 많이 남겼다. 서른아홉 살에 객사하기까지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삶을 살았는데 교황청의 천재 화가에서 살인을 저지르고 도망자로 전락하며 여러 지방을 전전했다. 한때 몰타섬으로 도피해 대작 ‘성 요한의 참수’를 그리기도 했고 그 작품은 현재 현지의 성 요한 교회에 걸려 있다. 또한 유독 자전적 성향의 그림을 많이 남겼는데 여러 마리의 뱀이 머리를 감고 있는 ‘메두사(사진)’나 ‘홀로페르네스를 참수하는 유디트’ 같은 작품도 그 계열이다.

최근 두 명의 교황을 배출한 바 있는 이탈리아 그레고리오 가문의 2800m 규모 별장에서 그의 유화 천장화 ‘목성, 해왕성 그리고 명왕성(1597)’이 경매로 나왔대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짧은 생애 동안, 그것도 도피와 수형 등의 신산한 삶 속에서도 다수의 걸작을 남겼는데 본격적으로 근대성의 문을 연 화가로 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