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기대상 됐었던 ‘봄꽃’의 대명사… 고귀함으로 디자인·예술에 큰 영향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17세기 가장 비싼 가격을 형성했던 튤립 ‘셈페르 아우구스투스’.

■ 박원순의 지식카페 - ③ 튤립

네덜란드 아닌 터키가 원산지로 ‘완벽하고 깊은 사랑’ 상징… 15~16세기엔 백합 모양, 17세기엔 화려한 줄무늬 꽃 ‘인기’
튤립 파동땐 일부 품종 대저택값과 맞먹어… 도자기·모자이크 타일 문양으로 활용, 현재 품종수만 3000가지 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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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을 기다리게 하는 수많은 꽃이 있지만 그 가운데 튤립이 빠질 수 없다. 튤립은 총천연색 꽃으로 완전한 봄이 왔음을 세상에 알린다. 튤립보다 먼저 피는 설강화, 복수초, 크로커스 같은 꽃도 있지만, 튤립만큼 확실하게 ‘봄을 선언’하는 꽃은 드물다.

애니메이션 영화 속에서 팅커벨이 날아다니며 대지에 요술 가루를 뿌리자 갑자기 온갖 색상의 꽃들이 피어나기 시작하는 장면을 기억한다면, 튤립이 만발한 정원의 풍경이 어떤 모습일지 그려볼 수 있다. 빨강, 노랑, 분홍, 하양, 보라, 주황, 초록 등 이러한 색깔들이 농도와 채도를 달리하며, 제각각 둘 혹은 셋씩 조합을 이룬 복색, 또는 줄무늬가 들어가거나 가장자리만 색깔이 다른 꽃 등 튤립 색깔 조합의 다양성은 이루 다 열거하기 어렵다. 색깔뿐 아니라 모양도 여러 가지다. 홑꽃과 겹꽃은 기본이고, 키가 큰 품종과 작은 품종, S라인을 이루는 백합 모양의 튤립도 있고, 꽃잎 가장자리가 예쁜 술 장식처럼 갈라져 있는 튤립도 있다. 게다가 3월과 5월 사이 꽃이 피는 시기에 따라 아주 일찍, 중간쯤, 그리고 아주 늦게 피는 품종들이 따로 있으니 가드너에게 이렇게 선택의 폭이 다양한 꽃이 또 있을까.

정원마다 튤립을 보여 주는 스타일도 다양하다. 가령 같은 요리라도 식당마다 맛이 다른 것처럼 튤립 정원도 그 느낌이 천차만별이다. 영국의 유명한 정원 디자이너 거트루드 지킬의 색채 이론에 충실하게 색깔별로 튤립을 보여 주는 정원이 있는가 하면, 고즈넉한 시골풍 정원처럼 자연스럽게 온갖 종류의 알뿌리 식물들, 이를테면 튤립을 비롯해 수선화, 히아신스, 프리틸라리아를 다른 봄꽃들과 함께 섞어 놓은 정원도 있다. 가정에서는 집 마당이나 베란다 공간에 다양한 크기의 화분들을 이용해 튤립을 즐기기도 한다.

이렇게 튤립은 이른 봄꽃이 귀한 시기에 거의 모든 색깔의 크고 화려한 꽃들을 보여 주기 때문에 봄꽃의 대명사가 됐다. 역사적으로 튤립은 아름다움을 넘어 부와 고귀함을 상징하며 디자인과 예술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무엇보다 경제사에 큰 획을 그은 튤립 파동 사건을 남겼는데, 이는 오늘날에도 만연한 투기와 거품 경제 현상의 원조라 할 만하다.

튤립 하면 네덜란드를 떠올리지만 원래 터키 지역이 원산지다. 11세기 이전에는 단 한 종류의 튤립만이 알려져 있다가 점차 동아시아와 중앙아시아로부터 다양한 야생튤립이 도입되면서 새로운 품종들이 생겨났다. 오늘날 터키의 전신인 오스만제국 술탄들의 정원에서 튤립은 큰 사랑을 받았다. 특히 15∼16세기에는 꽃의 허리 부분이 잘록한 백합 모양 튤립이 인기가 많았다. 유약을 바른 아름다운 타일엔 튤립이 그려졌고, 각종 도자기에도 그 문양이 새겨졌다. 술레이만 대제의 아들 셀림 2세(1524∼1574)가 시리아에 조성한 황실 정원에도 튤립이 만발했다. 17세기 초 샤 압바스 1세(재위 1587∼1629)가 이스파한에 지은 눈부신 모스크는 튤립이 그려진 매우 정교한 모자이크 타일로 장식됐다. 술레이만 1세의 딸 미흐리마 공주의 사위이자 재상이었던 뤼스템 파샤(Rustem Pasha)의 모스크는 방대한 규모의 이즈니크 타일로 아주 유명하다. 튤립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아름다운 꽃무늬가 기하학적 문양에 따라 벽과 기둥, 현관 외부까지 장식하고 있다. 17세기 후반 술탄 메흐메트 4세는 튤립 목록을 만들어 각각의 꽃에 대한 설명과 육종가의 이름을 수록하고, 튤립 연구회를 구성해 새로운 품종들을 평가할 정도로 열성이었다. 인도 무굴 왕조를 일으킨 바부르 황제도 야생에서 직접 수집한 튤립을 정원에서 즐겼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오스만 제국의 재상 뤼스템 파샤의 모스크에서 볼 수 있는 이즈니크 타일에 그려진 튤립 문양. Islamic Arts Magazine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1640년경 네덜란드 화가 얀 브뤼헐 2세가 그린 ‘튤립 파동에 대한 풍자화’. 튤립 투기자들을 원숭이에 비유했다.

튤립을 처음으로 유럽에 들여온 사람은 오기에르 기셀린 드 뷰스벡(1532∼1592)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1554년 신성 로마 제국 페르디난트 1세의 명을 받아 오스만 제국 술탄에게 파견된 왕실 대사였다. 뷰스벡은 콘스탄티노플 들녘에 가득 피어 있는 난생처음 보는 튤립에 큰 감동을 받았는데, 때마침 튤립을 머리에 꽂고 있었던 가이드에게 그 꽃 이름을 물었다. 가이드는 자신이 쓰고 있는 터번에 대해 물어보는 줄 알고 툴리판드(tulipand)라고 대답했고, 뷰스벡은 그 이름을 꽃에 부여해 이후 튤립으로 널리 불리게 됐다고 한다. 만약 그 가이드가 제대로 대답했다면 튤립은 원래의 이름인 랄레로 불리게 됐을 것이다. 아무튼 1562년 앤트워프의 상인들에 의해 터키로부터 서유럽에 도입된 튤립 알뿌리들은 실용적 측면에서 양파로 오해받는 등 관상용으로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스페인 독립 후 해상 경제를 지배하며 엄청난 자본을 축적해 초강국으로 등극한 네덜란드에서는 장차 일어날 엄청난 튤립 파동의 씨앗이 싹트고 있었다. 그 시작은 의사이자 식물학자였던 카롤루스 클루시우스(Carolus Clusius, 1526∼1609)에 의해서였다. 그는 새롭게 설립된 레이던대의 식물원 감독관으로, 지중해 동부에서 유입되는 수많은 새로운 알뿌리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1590년대 피렌체의 식물 애호가로부터 이란 원산의 튤립 알뿌리를 받았다. 그리고 직접 그 알뿌리들을 식물원에 심어 꽃을 봤다. 사람들은 난생처음 보는 아주 매력적인 꽃에 큰 관심을 가지는가 싶더니 겨울 동안 상당 부분의 튤립 알뿌리들을 훔쳐가고 말았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점점 더 새롭고 희귀한 튤립 품종에 집착했다. 1630년대에는 공급에 비해 수요가 급속도로 늘다 보니 가격도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유명 화가들의 튤립 그림도 고가에 거래됐다. 튤립 알뿌리 가격이 치솟자 그림으로 대리 만족하려는 사람들의 수요도 늘어난 것이다. 가장 비싼 알뿌리는 불꽃처럼 화려한 패턴과 줄무늬를 가진 종류였는데, 가령 ‘셈페르 아우구스투스(Semper Augustus)’라는 품종은 당시 암스테르담에서 가장 비싼 대저택 한 채 값에 맞먹을 정도였다. 하지만 훗날 이 품종 특유의 무늬는 바이러스에 의한 브레이킹(breaking) 현상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아무튼 워낙 희귀 튤립 알뿌리가 귀하다 보니 미리 가격을 정해 놓고 매수 권리를 사고파는 선물 거래와 옵션까지 등장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거래 물량이 뚝 떨어지면서 팔려는 사람만 많아지고 사려는 사람들은 사라졌다. 결국 1637년엔 거품이 꺼지며 시장은 완전히 폭락하고 말았다. 이 짧은 몇 년 동안 튤립을 매개로 일어난 일련의 사건은 오늘날에도 빈번히 발생하고 있는 투기와 거품 경제 현상의 단면을 그대로 보여 준다. 고수익을 위해 장세의 변화에 따라 신속하게 움직이는 스마트 머니를 중심으로 한 잠복 단계부터 기관 투자자가 인식하는 단계, 그리고 투자 지수가 일정 수치 이상을 넘어가는 탐욕과 환상, 대박이 났다는 언론보도가 급증한 후 급기야 새로운 패러다임의 정점을 찍는 광기 단계, 마지막으로 투자자들이 모든 희망을 버리고 주식을 매도하는 투매와 좌절로 이어지는 붕괴 단계까지 오늘날 볼 수 있는 주식 혹은 가상화폐 시장의 흐름과 너무나도 유사한 것이다.

이러한 튤립 파동을 소재로 한 소설과 영화를 보면 그 시대 튤립 열풍이 어느 정도인지 실감할 수 있다. 먼저 프랑스 소설가 알렉상드르 뒤마는 소설 ‘검은 튤립’에서 사람의 목숨보다 귀한 대접을 받았던 튤립에 대한 집착과 광기를 그리고 있다. 2017년 개봉된 영화 ‘튤립 피버’ 역시 17세기 중반 튤립 투기가 한창이었던 그 시절 네덜란드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묘사한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튤립을 네덜란드에 처음 도입한 카롤루스 클루시우스의 이름을 딴 튤리파 클루시아나.

17세기 초 유럽에서 튤립, 수선화, 아네모네, 히아신스 등 알뿌리는 주로 대규모 식물원 또는 부유한 귀족들의 정원에 식재됐고, 17세기 중반 무렵엔 500여 품종이 튤립 카탈로그에 수록될 정도로 선택의 폭이 커졌다. 오스만 제국에서도 튤립에 대한 인기가 계속 이어져 18세기 초 술탄 아흐메드 3세(재위 1703∼1730) 통치 시기에는 그들만의 튤립 전성기가 펼쳐졌다. 랄레 데브르라고 부르는 이 튤립 시대에는 전문 플로리스트들이 술탄을 위해 튤립을 재배했고, 꽃 피는 계절엔 밤마다 호화로운 튤립 파티가 열렸다. 높은 탑과 피라미드가 튤립으로 장식됐고 참가자들은 모두 튤립 의상을 입었다고 하니 그 규모와 분위기를 가히 짐작할 만하다. 이때 주로 사용된 튤립은 전형적인 이스탄불 튤립이었다. 길고 가느다란 꽃잎이 뾰족하고 날렵하게 생긴 이 우아한 튤립은 1725년 발간된 ‘튤립 앨범 Tulip Album’에 많이 등장하고 있다. 19세기 초에 이르러서야 유럽에 도입돼 파리 왕실 정원에 식재된 이 튤립은 튤리파 아쿠미나타(Tulipa auminata)라는 학명을 부여받았다.

이렇게 오랜 역사를 통해 주목받아 온 튤립은 오늘날 품종 수가 3000가지가 넘으며 꽃의 특징에 따라 15개 그룹으로 나뉜다. 싱글 얼리(Single Early, 홑꽃 조생종), 더블 얼리(Double Early, 겹꽃 조생종), 트라이엄프(Triumph, 컵 모양 홑꽃), 다윈 하이브리드(Darwin Hybrid, 타원형 홑꽃), 싱글 레이트(Single Late, 홑꽃 만생종), 릴리 플라워드(Lily flowered, 고블릿 잔 또는 백합 모양 홑꽃), 프린지드(Fringed, 가장자리에 술이 달린 컵 모양 홑꽃, 만생종), 비리디플로라(Viridiflora, 녹색 혹은 줄무늬 복색이 들어간 컵 모양 홑꽃, 만생종), 렘브란트(Rembrandt, 바이러스에 의해 줄무늬 또는 깃털 무늬 복색이 들어간 컵 모양 홑꽃, 만생종), 패럿(Parrot, 꽃잎이 주름이 진 앵무새 깃털 무늬 컵 모양 홑꽃, 만생종), 더블 레이트(Double Late, 그릇 모양 겹꽃, 만생종), 카우프마니아나(Kaufmanniana, 원종 튤립의 일종으로, 종종 복색을 가진 그릇 모양 홑꽃, 조중생종), 포스테리아나(Fosteriana, 원종 튤립의 일종으로 그릇 모양 홑꽃, 중생종), 그레이기(Greigii, 암석원에서 잘 자라는 원종 튤립의 일종으로, 보라색 또는 초록색 복색 잎을 가진 그릇 모양 홑꽃), 그리고 기타 그룹이 있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튤립(Tulipa spp.)

튤립은 다년생 알뿌리 식물이지만, 무덥고 습한 기후에서는 건강하게 생육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웬만큼 규모가 있는 대부분의 정원에서는 매년 10월 말에서 11월에 걸쳐 새로운 알뿌리를 구해 심는다. 보통 알뿌리 크기의 세 배 정도 깊이로 화단에 심는다. 그러면 큰 이변이 없는 한 이듬해 4월 중순 무렵 건강하고 풍성한 꽃을 만나볼 수 있다. 튤립 알뿌리들이 잠들어 있는 겨울 정원의 땅속은 장차 피어날 화려한 꽃들의 요람이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사부작사부작 흙 알갱이들을 밀쳐 내며 자라는 새하얀 뿌리털들은 지렁이처럼 땅속을 파고든다. 추운 겨울 동안 알뿌리를 더 따뜻하고 안전한 곳에 자리 잡게 해 주기 위해서다. 튤립 알뿌리를 심는 일은 다시 찾아올 예쁜 봄을 기약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가드너에게, 튤립 알뿌리 하나 심어 두지 않은 봄만큼 휑한 정원은 없다. 튤립 파동이라는 엄청난 사건을 겪고도 네덜란드를 비롯한 유럽에서 튤립의 인기는 한 번도 사그라든 적이 없다. 작년엔 코로나19로 인해 시장이 크게 위축되긴 했지만, 네덜란드에서만 매년 43억 구가 넘는 튤립 알뿌리가 생산돼 전 세계로 유통되고, 쾨켄호프 같은 정원에서는 700만 구가 넘는 알뿌리가 해마다 상춘객을 맞이한다. 튤립은 분명 인류가 사랑한 꽃의 문화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봄의 전령사이자 완벽하면서도 깊은 사랑의 상징, 가드너의 봄맞이 필수템이다.

국립세종수목원 전시기획운영실장


■ 튤립(Tulipa spp.)

양파처럼 비늘줄기로 이뤄진 알뿌리 식물로, 원산지는 터키를 비롯한 중앙아시아 지역이다. 봄에 꽃이 피고 난 후에는 잎을 통해 광합성을 하며 알뿌리에 양분을 저장하고, 여름에 건조하고 서늘한 곳에서 휴면한다. 가을에 다시 뿌리를 내린 다음, 겨울철 10∼16주 동안 5도 이하의 추위를 겪으며 새롭게 꽃눈을 만들고, 이른 봄에 잎과 함께 꽃을 피운다. 무덥고 습한 곳에서는 여름을 나기 어려우므로, 낙엽수 그늘 밑 배수가 잘되는 곳에 심는 게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