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사 모르는 젊은층 ‘SNS 공략’ … 독재자의 아들, 대권 눈앞

■ 글로벌 포커스 - 내달 새 수장 뽑는 아시아 2곳

- 내달 9일 필리핀 대선…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압도적 선두

부친 망명 35년만에 아들 귀환
온라인 활용 ‘정치 명문가’ 홍보
2030에 ‘정치 아이돌’로 어필

유튜브 구독자 221만명 달해
이번 부통령 후보는 두테르테 딸
당선되면 폭압정치 처벌도 요원
친중노선 계승·강화 전망 나와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지난 4월 13일 필리핀 대통령 후보인 페르디난드 ‘봉봉’ 마르코스 주니어 전 상원의원이 필리핀 케손시에서 유세 연설을 하고 있다. AP연합뉴스

5월 초 필리핀과 홍콩의 수장이 바뀐다. 이번 필리핀 대통령과 홍콩 행정장관 선거의 포인트는 아시아에서 ‘중국의 영향력 강화’ 여부다. 미국과 서방의 대중 견제가 심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당선이 유력한 필리핀의 페르디난드 ‘봉봉’ 마르코스 주니어 전 상원의원은 로드리고 두테르테 현 대통령의 친중 노선을 계승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아시아 핵심 동맹인 필리핀의 친중 행보는 향후 미국의 동남아 정책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관측된다. 홍콩에서도 친중파 존 리 후보가 당선될 것으로 예상되면서 홍콩 민주주의의 위기가 심화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마르코스가 돌아왔다.’

오는 5월 9일 제17대 대선을 앞두고 필리핀에서 다시 마르코스 열풍이 불고 있다. ‘필리핀 최악의 독재자’로 불리는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대통령이 미국으로 망명한 지 35년이 지난 지금,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아들 페르디난드 ‘봉봉’ 마르코스 주니어(64) 전 상원의원이 대선에서 압도적 선두를 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필리핀 여론조사기관인 ‘펄스아시아’가 지난 3월 17∼21일 실시한 조사결과에 따르면 마르코스 전 상원의원은 지지율 56%로, 2위인 레니 로브레도 부통령(24%)을 2배 이상으로 앞서가고 있다. 도주하듯 쫓겨난 ‘독재자의 아들’은 어떻게 압도적 승기를 손에 쥐게 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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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독재’ 모르는 젊은층에 SNS로 구애 성공…엘리트 정치 가문 이미지 적극 활용 = 마르코스 전 상원의원의 전략은 ‘틱톡’을 기반으로 한 SNS를 통한 젊은 세대 공략이었다. 그는 소셜미디어를 통해 선거운동을 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동영상 플랫폼 틱톡에만 123만 명에 가까운 팔로어가 있다. 유튜브 채널 ‘봉봉 마르코스’ 구독자는 221만 명이다. 지난해 7월 기준 전체 등록 유권자 6046만 명 중 52%가 18∼40세 젊은층이라는 점이 이 전략이 적중하는 기반이 됐다. 마르코스 전 상원의원은 SNS를 통해 콘서트를 방불케 하는 행사를 여는 방식으로 ‘정치 아이돌’ 이미지를 쌓아 올렸다. ‘가짜뉴스’도 활용했다. 지지자들은 경쟁 후보인 로브레도 부통령 딸의 거짓 성관계 영상을 유포했고, 다른 후보들을 비방하는 가짜뉴스들을 빠르게 공유하며 인터넷에서 세를 모았다.

젊은층이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독재를 잘 모르는 것도 득이 됐다. 공립학교 현대사 교과서에 6%밖에 담기지 않은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독재를 2030세대는 잘 모르지만, 장년층에게는 ‘흑역사’다. 마르코스 전 대통령은 1965∼1986년까지 필리핀을 장기 집권했고, 1972년 9월에는 계엄령을 선포하면서까지 독재를 이어갔다. 반정권 인사 7만여 명이 구금됐고, 이 중 3000명 이상이 고문 등으로 사망했다.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부인 이멜다(92)는 ‘사치의 여왕’으로도 유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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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마르코스 전 상원의원은 본인을 ‘정치 명문가’ 출신으로 포장했다. 엘리트 가문에서 돌아가며 정권을 잡아온 필리핀 특유의 정치 풍토를 활용한 것. 실제로 필리핀 정치는 ‘대물림 문화’가 만연한데, 아키노 가문은 모자(母子) 대통령을 배출하기도 했다. 역대 16명의 필리핀 대통령 중 4명이 혈연관계다. 마르코스 전 상원의원 역시 1982년 26세에 가문의 연고지인 일로코스노르테 주지사로 취임하면서 필리핀 정계에 입문한 뒤 승승장구해왔다. 게다가 부통령 러닝메이트로 출마한 사라 두테르테 역시 신흥 정치 가문 출신이다. 로드리고 두테르테 현 대통령의 장녀이기 때문이다. 별도 투표로 이뤄지는 부통령 선거에서 사라 역시 선두를 달리고 있다. 차기 대통령·부통령 모두가 ‘정치 가문’ 출신이 되는 셈이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필리핀 대선 후보인 페르디난드 ‘봉봉’ 마르코스 주니어 전 상원의원이 지난 24일 유튜브 ‘봉봉 마르코스’에 올린 유세 현장 사진에서 지지자들이 마치 콘서트에 온 것처럼 환호하고 있다. 유튜브 캡처

◇‘두테르테 범죄와의 전쟁’ 감싸고 친중 노선 강화… “필리핀, 싱가포르처럼 만들 것” = 이번 대선의 주요 관전 포인트 중 하나는 ‘폭압 정치’를 이어온 두테르테 현 대통령의 운명이다. 대선 결과에 따라 운명이 갈리기 때문인데, 두테르테 대통령의 딸 사라가 부통령에 당선되면 두테르테 대통령은 2016년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한 뒤 자행한 무단 체포와 즉결 처형 등에서 면죄부를 받을 가능성이 크다. 현재 두테르테 대통령은 마약밀매업자를 비롯한 민간인 6000여 명을 살해한 혐의로 국제형사재판소(ICC) 조사도 받고 있다. 인권 운동가들은 두테르테 정부의 임의 처형에 대한 법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줄기차게 요구하고 있지만, 이번 대선에서 마르코스 전 상원의원이 당선되면 두테르테 대통령의 처벌은 요원해질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당선이 유력한 마르코스 전 상원의원이 두테르테 대통령의 든든한 뒷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마르코스 가문은 2016년 대선에서 두테르테 대통령을 지지했고, 두테르테 대통령은 이에 화답하듯 취임 직후 마르코스 가문의 숙원 사업이던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유해를 마닐라 국립묘지에 안장하는 것을 허용하기도 했다. ICC는 필리핀 정부 요청에 따라 ‘마약과의 전쟁’에 대한 조사를 유예하고 있는데, 마르코스 정권이 들어서면 필리핀 정부는 자주권과 관할권을 주장하며 ICC 조사에 협조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더 나아가 마르코스 정권이 들어서면 두테르테 대통령의 ‘마약과의 전쟁’ 기조를 이어갈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외교적 측면에서도 마르코스 전 상원의원은 두테르테 대통령의 친중 노선을 계승할 것으로 보인다. 마르코스 전 상원의원은 대선 캠페인 과정에서 “남중국해 분쟁에 대한 군사적 해결을 우선시하지 않을 것이며 중국과의 포용정책을 추진하는 ‘올바른 접근’을 계속할 것”이라고 밝혔다. 일각에서는 두테르테 대통령보다 더 강한 ‘친중 노선’이 펼쳐질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마르코스 전 상원의원은 경제 정책에서는 경제난 타개를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다. “코로나19 위기를 최우선 과제로 두고 예방접종률을 높이고 소비자 지출과 인프라 투자를 강화해 서비스 산업을 정상 궤도에 올려놓겠다”는 것. 또 중소기업에 국가자금 투자를 2배로 늘리고, 공중보건 전문가 등 각 분야의 전문 인력을 정부 주요인사로 포진시켜 필리핀을 싱가포르 수준의 경제 부국으로 만들겠다는 청사진을 내놨다. ‘마르코스 왕조의 귀환’이 필리핀의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귀추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