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우의 후룩후룩>‘두부’같은 부흐빈더의 슈베르트

  • 문화일보
  • 입력 2022-06-19 06:14
  • 업데이트 2022-09-23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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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의 후룩후룩>은 문화일보 문화부 공연 담당 이정우 기자가 이어가는 고정란입니다. 지나간(後) 공연을 돌이켜보고(look) 다음(後) 만남을 내다보자(look)는 의미의 리뷰를 모았습니다. 공연을 놓쳐서 아쉬운 마음은 앨범이나 책 같은 물질로 달래봅니다.



photo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루돌프 부흐빈더가 5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21번 D.960을 연주하고 있다. 빈체로 제공



연주자 : 루돌프 부흐빈더

일시·장소 : 6월 5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프로그램 : 슈베르트 네 개의 즉흥곡 D.899,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21번 D.960

앵콜곡 :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8번 ‘비창’ 3악장, 요한 슈트라우스 2세 ‘빈의 저녁’



지난 5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만난 오스트리아 출신의 세계적 피아니스트 루돌프 부흐빈더는 ‘두부’ 같았다. 두부라니. 76세 할아버지한테 못하는 말이 없다. 푸근한 인상은 별론으로 하고, 그가 연주하는 몽글몽글하고 영롱한 음을 듣고 있자면 부드러운 두부가 떠오른다. 그런데 어딘가 쫀쫀하고 밀도 있다. 그 이면엔 정교한 좌우 밸런스란 명인의 비법이 숨어 있다. 부드러운 촉감 아래 쉽사리 부서지지 않는 탱글탱글한 느낌의 두부. 일전에 강원도 속초에서 먹고 감탄했던 명인의 모두부다.

이날 연주한 슈베르트 네 개의 즉흥곡 D.899와 피아노 소나타 21번 D.960은 모두 31세에 요절한 슈베르트가 죽기 1년 전에 만든 후기 작품들이다. 사랑에 실패하고 병마와 싸우던 슈베르트. 이 시기 그의 작품은 어둡고 쓸쓸하지만 절망으로 끝내 떨어지지 않고 희망을 읊조리려는 맑은 이미지가 위안을 준다. 부흐빈더의 이날 연주는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았다. 연주자는 슈베르트의 토로에 훌쩍이지도 않았고, 그 토로를 가벼이 흘려두지도 않았다.

오른손의 템포가 빠르다고 생각되는 순간마다 왼손의 중저음이 흩날릴뻔한 멜로디를 잡아줬다. 방황하는 청년 슈베르트를 부흐빈더 할배가 든든하게 감싸주는 느낌이랄까.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의 연주 버전일까. 피아노 소나타 D.960에서 심증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죽기 1년 전에 쓴 이 곡에서 슈베르트는 기본적으로 침울하지만, 이따금 주체못할 정도의 생동감을 보여준다. 1악장부터 입에서 오물오물 혼잣말을 하며 몰입 상태임을 넌지시 드러낸 부흐빈더의 약동하는 오른손 움직임은 싱그러운 청년이 됐다가 이따금 악동으로도 변모했다. 건실한 왼손은 듬직하게 이를 뒷받침하며 절묘한 밸런스를 만들어냈다.

photo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공연 중인 루돌프 부흐빈더. 빈체로 제공



오른손과 왼손의 협연. 오른손이 슈베르트의 아름답고도 애상적인 멜로디를 샘솟듯 펼쳐내면, 왼손은 묵묵히 중심을 잡으며 너무 슬프지도, 너무 가볍지도 않도록 흐름을 이끌었다. 그래. 부흐빈더 할아버지는 지금 청년 슈베르트와 대화를 나누고 있구나. 30대 슈베르트와 70대 부흐빈더의 시대를 초월한 대화. 18세기 악보에 박제된 청년 슈베르트의 목소리와 21세기 무대에서 숨 쉬는 노년 부흐빈더의 대응이 교차된다.어쩌면 절망과 희망의 경계에서 배회하는 후기 슈베르트의 특성을 정확히 짚어낸 것일지도.

앵콜곡 중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8번 ‘비창’ 3악장은 부흐빈더가 왜 ‘베토벤 스페셜리스트’로 불리는지, 왜 세계 유수의 레이블과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와 협주곡 전곡을 꾸준히 녹음할 수 있는지 보여줬다. 다음엔 베토벤을 들고 한국을 찾을 것이란 할아버지의 예고. 실제로 내년 7월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부흐빈더의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 공연이 예정돼 있다. 다만 좀 더 다양한 작곡가의 곡으로 오래도록 ‘두부’ 할아버지를 만나고 싶다는 소망은 사치일까.

photo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공연을 마치고 인사하는 루돌프 부흐빈더. 빈체로 제공



<제 점수는요>

신선지수 ★

푸근지수 ★★★★★

앵콜지수 ★★★

만족지수 ★★★★★


photo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공연 후 싸인회에서 미소를 짓는 루돌프 부흐빈더. 빈체로 제공



추천 음반 : ‘부흐빈더 - 슈베르트 D.899&D.960’

이날 공연과 동일한 레퍼토리의 음반이 있다. 소니에서 2013년 7월 24일에 출시된 이 음반은 너무 애달프지도, 억지로 위로하지도 않는 부흐빈더의 슈베르트가 잘 드러난다. 손자가 힘들어하는 모습도, 슬퍼하는 모습도, 때로는 신나 하는 모습 모두 묵묵히 보며 곁을 지키는 할아버지의 부드럽지만 강인한 손길. 다만 나이를 잊은 생동감은 공연에서 더 잘 느껴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정우 기자
이정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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