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반의 해방자’ 유자왕[이정우의 후룩후룩]

  • 문화일보
  • 입력 2022-07-02 08:02
  • 업데이트 2022-12-22 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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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後) 공연을 돌이켜보고(look) 다음(後) 만남을 내다보자(look)는 의미의 리뷰 <이정우의 후룩후룩>. 공연을 놓쳐서 아쉬운 마음은 앨범이나 책 같은 물질로 달래봅니다.

photo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유자왕이 19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독주회에서 연주하고 있다. 마스트미디어 제공



연주자 : 유자왕(王羽佳, 35)
일시·장소 : 6월 19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프로그램 : 슈베르트/리스트(편곡) ‘백조의 노래’ 중 1번 ‘사랑의 전령’ 5번 ‘안식처’, 슈베르트의 12가곡 중 4번 ‘마왕’, 쇤베르크 피아노 모음곡 Op.25, 슈베르트 헝가리안 멜로디, 리게티 연습곡 6번 ‘바르샤바의 가을’ 13번 ‘악마의 계단’, 스크랴빈 피아노 소나타 3번, 알베니스 이베리아 모음곡 4권 1번 ‘말라가’ 3권 3번 ‘라바피에스’
앵콜곡 : 필립 글래스 연습곡 6번, 마르케스 단존 2번, 브람스/치프라(편곡) 헝가리 무곡 5번, 비제/호로비츠(편곡) 카르멘 변주곡, 슈베르트/리스트(편곡) ‘물레 감는 그레첸’, 슈베르트의 12가곡 중 2번 ‘물 위에서 노래하는’, 리스트 순례의 해 제1년 : 스위스 중 4번 ‘샘가에서’, 프로코피에프 피아노 소나타 7번 3악장, 모차르트/볼로도스(편곡) 터키 행진곡, 멘델스존 ‘무언가’ Op.67 2번, 차이콥스키 발레 ‘백조의 호수’ 중 ‘네 마리 백조의 춤’, 글룩 오페라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 중 ‘멜로디’

피아노 건반은 총 88개다. 그렇지만 연주 때마다 이 모든 건반을 치는 것은 아니다. 너무 낮거나 너무 높은 음은 보통 쓰이지 않는다. 19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만난 중국 출신 피아니스트 유자 왕은 ‘건반의 해방자’ 같았다. 피아노 건반이 이렇게나 많은데 매번 쓰이는 건반만 치는 작품은 따분하다는 듯이 그녀는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모든 건반을 쓸었다. 그녀의 남김없는 건반 소비 덕분에 관객들은 피아노가 가진 음폭과 음역을 포식할 수 있었다. 90도로 온몸을 젓히는 특유의 씩씩한 인사 만큼이나 박력있는 유자왕의 연주로 진지하고 엄숙하게만 보였던 예술의전당은 들썩거렸다.

유자 왕이 의도한 피아노 건반의 자아 실현은 리게티의 연습곡 6번 ‘바르샤바의 가을’과 13번 ‘악마의 계단’에서 잘 드러났다. 헝가리 출신 죄르지 리게티(1923~2006)는 실험적이고 진보적인 작품을 다수 남긴 대표적 현대음악가다. 특히 그의 피아노 연습곡집은 14세기 다성 양식부터 재즈, 로큰롤 등 현대 음악까지 모든 음악사조가 집합돼 리게티 음악의 종착역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유자왕의 빠르고 정확한 타건은 곡 특유의 긴장감을 보다 고조시켰고, 환각적 정취에 동석한 아내는 불안해 했다. 시종일관 강력한 타건을 요하는 ‘악마의 계단’에선 유자왕이 신은 하이힐이 또각대면서 급경사인 계단을 오르내리는 모습이 연상됐다.

미리 공지한 연주 목록과 다르게 연주하는 그녀만의 방식은 관객에게 가장 ‘신선한 음악’을 제공하려는 그녀만의 ‘비법’ 같았다. 다음에 어떤 곡이 나올지 모르는 관객은 그녀의 손 끝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이전에 들었던 연주와 실황을 비교해보는 고전적 관람 전략 역시 수정이 불가피하다. 이날 연주한 어떤 곡은 갓 짜낸 생과일주스 같았고, 어떤 곡은 선도 높은 육회 같았다.(어떤 곡이 주스고, 어떤 곡이 육회인지는 공지하지 않겠다. 유자왕의 곡목 선정처럼 현장 느낌과 분위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photo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공연 중인 유자왕. 마스트미디어 제공



전반적으로 템포가 점점 빨라지는 듯한 느낌은 아쉬웠지만, 한편으론 경이로웠다. 아무리 빨라져도 타건은 힘있고 정확했기 때문이다. 유자왕은 그 와중에 꾸밈음까지 사이사이 집어 넣으며 모든 여백을 채우려는 듯 바삐 움직였다. 쉴새없는 페달링도 돋보였다. 무대 위에선 화려하게만 보이는 유자왕이지만, 얼마나 연습을 하는 건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마치 물 위에선 평온하지만 물 밑에선 쉴새없이 발을 움직이는 오리처럼.

관객과 자신에게 그 순간 다가오는 음악을 신선하게 내놓고, 템포 보단 기분(feel)을 우선하는 듯 쉴새 없이 건반을 쳐나가는 그녀의 방식은 앙코르에서 진가를 발휘했다. 연주자가 피아노 앞에서 아이패드로 곡을 고르면서 어떤 곡을 해야 하나 망설이는 모습은 신선했고, 관객의 호응을 높였다. 앙코르곡만 12곡.(다음날 인천에선 18곡을 했다고 한다..) 프로코피예프 피아노 소나타 7번 3악장은 차력을 방불케 한 박력 있는 연주로 건반을 망치로 두들기는 것 아니냐는 의심마저 들게 했다. 최근 방송에서 피아니스트 손열음이 치면서 화제가 됐던 볼로도스 편곡 버전의 ‘터키 행진곡’에서 유자왕은 여백 하나 없이 속도광처럼 질주하지만, 원곡의 경쾌함과 어딘지 모를 우울감 모두를 잡아냈다. 단순히 테크닉만 있는 연주자가 아니란 사실을 증명하고 또 증명한 유자왕에게 관객들은 열광적인 기립박수로 화답했다.

photo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공연을 마치고 인사하는 유자왕. 마스트미디어 제공



<제 점수는요>
파워지수 ★★★★★
서정지수 ★
앵콜지수 ★★★★★
만족지수 ★★★★

<추천 음반 : 존 애덤스 ‘마귀가 좋은 선율을 다 가져야 합니까’ 두다멜·유자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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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이치 그라모폰에서 2020년에 LP로 한정 발매한 존 애덤스 피아노 협주곡 ‘마귀가 좋은 선율을 다 가져야 합니까’는 유자왕이 초연한 곡이다. 유자왕은 2019년 3월 구스타보 두다멜이 이끄는 로스앤젤레스필하모닉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통해 이 곡을 세상에 선보였다. 유자왕의 현대음악에 대한 섬세한 해석과 거침없는 연주를 들을 수 있다. 그런데 솔직히 고백하면 박력 있는 유자왕의 연주는 음반보단 공연으로 느끼는 게 좋지 않을까.

이정우 기자 krusty@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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