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자기결정권 강화시킨 피임법 … 인류의 새 질서 출발점이었다[과학자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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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보
입력 2023-02-03 09:01
업데이트 2023-02-03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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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학자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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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콘노섹’. 콘돔 없으면 섹스도 없다. 상식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짐승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류의 짝짓기는 거의 대부분 번식 행위가 아니라 유희다. 그런데 이게 도덕적으로 합당한 행위가 아니라는 분도 많다. 2010년 당시 교황이었던 베네딕토 16세가 “특수한 경우에 한해 콘돔 사용을 허락할 수 있다”고 말하자 교황청 신앙교리성은 “교황의 발언이 피임을 위해 콘돔을 사용할 수 있다”는 뜻으로 곡해하지 말라고 밝혔을 정도다.

100년도 더 걸렸다. 간호사 출신의 여성 사회운동가 마거릿 생어가 1920년에 출판한 ‘여성과 새로운 인류’의 한글 완역판(동아시아)이 이제야 나왔다. 저자는 “열한 명의 아이를 낳은 내 어머니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라고 헌사에 썼다. 생어는 피임법을 개발하고 가르쳤다는 이유로 체포됐다. 맙소사! 지구가 돈다고 주장한 것도 아니고, 모든 생명은 진화의 결과물이라고 가르친 것도 아니고, 겨우 원치 않는 임신을 피할 방법을 개발하고 가르쳤다고 체포되다니 이게 말이 되는가. 민주주의가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니듯 우리의 피임법과 피임권도 누군가의 투쟁 결과다.

책에 나오는 피임과 관련한 내용은 이제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도 가르칠 만한 것들이다. 생어는 단지 피임이 여성의 행복추구의 수단에 그치지 않고 모든 인류의 문제를 해결하는 시발점이라고 주장한다. 다산이 아니었다면 폭정, 저임금 노동, 실업, 아동 노동 같은 것은 없었을 것이다. 여성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회적 재앙을 초래했다. 이 재앙을 원 상태로 되돌리기 위해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 시작이 바로 산아제한, 즉 피임이라고 이야기를 풀어낸다.

책 제목에 있는 ‘새로운 인류’란 자신의 몸을 제어하고 생식 건강에 대해 과학적인 정보에 입각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여성을 말한다. 굳이 ‘새로운’이라는 관형어를 붙인 이유는 전통적인 성 역할의 제약에서 벗어나면 자신과 미래 세대를 위한 새로운 길을 개척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 때문이다. 아기가 태어나면 제발 죽게 해달라고 기도하던 엄마에서 의식적이고 신중한 결정으로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엄마로 변한 여성들이 바로 새로운 인류다.

책을 읽다 보면 현대인의 시각에서 마뜩지 않은 부분과 자주 부딪힌다. 인종, 계급, 성별에 대한 현대적 이해에 비추어 보면 우생학과 인구 통제에 대한 생어의 견해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생어는 100년 전 사람이다. 찰스 다윈의 ‘비글호 항해기’나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의 ‘말레이 제도’를 읽으면서 당황스러운 장면과 마주치는 것과 마찬가지다.

독일 유학 시절 신학기가 시작할 때마다 학생회가 주는 선물더미 안에는 콘돔이 꼭 들어 있었다. 이제 곧 신학기가 시작된다. 집 밖에 나가는 자녀에게 콘돔을 챙겨주자. 콘돔 자판기를 곳곳에 설치하자. 우리는 짐승이 아니다. 섹스는 유희다.

이정모 국립과천과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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